< 낭만필드 - 172 >
“오닐, 다시 한 번 날아갑니다! 오늘의 주는 정말 단단합니다!”
맨유와의 칼링컵 결승전 이후, 성배는 한층 더 성장한 경기력을 선보였다.
성배의 활약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결승전에서 아쉬운 모습을 보였던 것은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
오늘 성배는 미들스브로의 오른쪽 윙어 개리 오닐을 상대로 완벽한 경기력을 선보이며 압살하고 있었다.
“바로 지난 경기에서 호날두를 잘 막아내긴 했지만, 평소답지 않게 정돈되지 않은 모습을 보였었는데, 오늘은 소름 끼치도록 차분하면서도 터프한 플레이로 미들스브로의 오른쪽 측면을 완벽히 털어버리네요. 잘은 모르겠지만, 지난 경기를 계기로 뭔가 크게 성장한 것 같아요.”
오닐과 호이트.
성배와 같은 측면에서 끊임없이 맞부딪히고 있는 두 선수는 오늘 신나게 그라운드 위를 구르고 있었다.
드디어 트라우마를 완벽히 떨쳐버리고 적재적소에 몸싸움을 활용하는 성배 때문이었다.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그렇습니까?”
“평소에는 굉장히 깔끔한 수비를 보여주었었죠. 교과서에 실려도 될 정도로 깔끔한 플레이가 장점이긴 했지만, 사실 깔끔하기만 해서는 절대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없어요. 실전에서는 예상치 못한 플레이도 많고, 상대하는 선수들 역시 최고의 선수들이기 때문에 허를 찔리는 경우도 분명히 나오거든요? 그 상황에서 깔끔하게만 막으려고 하다가 뚫리는 경우도 많았죠.”
교과서적이라는 표현은 칭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비아냥이기도 했다.
교과서적인 플레이를 익히기 위해서는 분명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계속된 반복 숙달과 피나는 훈련이 동반되어야만 이상적인 움직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교과서’라는 표현은 누구나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말은 예상하기 쉽다는 뜻과 같았고, 일정 수준 이상의 기량을 갖춘 선수라면 성배의 플레이를 예상할 수 있다는 뜻도 되었다.
성배의 경우, 그런 플레이 스타일의 단점을 임기응변과 노련함, 속임수를 통해 커버하려 했고, 덕분에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정상급 풀백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다.
하지만 몸싸움을 기피하는, 정확히 말하면 몸싸움을 어색해하는 플레이 때문에 어려움이 있기도 했다.
“지난 칼링컵 결승전에서도 느꼈지만, 이제 몸싸움을 피하는듯한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어요. 필요한 순간마다 적극적으로 몸싸움을 펼쳐주면서 상대하는 선수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주고 있죠?”
물론 오늘 상대하는 오닐과 호이트가 피지컬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성배의 피지컬도 평균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몸싸움을 펼칠 때, 반 박자 정도 밀리던 딜레이가 사라졌다는 것만으로도 큰 발전이 있었다.
딜레이가 사라지자 성배의 장점인 타이밍 포착과 스피드를 활용한 위치 선점 등 다른 요인들이 빛을 발한 것이었다.
“정상급 선수들을 상대로도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지가 확인되어야 하겠지만, 일단 오늘 보여준 모습만으로는 크게 성장한 것이 확실해 보이네요. 아직 어린 선수인데 성장 속도가 정말 무서울 정도로 빠르죠?”
일단 한 경기뿐이고 상대 팀도 리그 18위의 미들스브로인 데다가 상대 선수들 역시 본래 중앙 자원인 오닐에 유망주인 호이트였지만, 지금까지의 활약만큼은 분명 뛰어났다.
“반대편으로 감아차는 슈팅! 멋진 슈팅! 시원하게 골망을 흔드는 주성배의 프리킥! 리그 4호 골을 터뜨립니다! 이번 시즌 5호 골! 멋집니다!”
오늘 경기에서 완벽한 플레이를 보여주고 있는 성배는 수비뿐만 아니라 공격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쳤다.
본업인 수비가 잘 풀리고 상대의 오른쪽 측면 플레이어들을 완벽히 묶어버렸으니 부담이 없어졌고, 부담이 없으니 공격도 잘 풀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 15라운드 에버튼전에서 4호 골을 터뜨린 이후 열세 경기 만에 5호 골을 기록하는 주성배! 오랜만에 터진 프리킥 득점! 완벽한 궤적을 그린 프리킥이 미들스브로의 골망을 흔들었습니다!”
리그 4호 골, 시즌 5호 골까지 기록하며 오늘 완벽한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난 시즌 프리킥으로만 7골을 기록했던 성배는 이번 시즌에도 5골을 기록하며 프리키커로서 완전히 자리 잡았다.
석 달 동안 골을 넣지 못했다는 것은 좀 아쉬운 일이었지만, 골만 넣지 못했을 뿐 어시스트도 많이 기록했기 때문에 동료들과 팬들에게 키커로서 확실한 신임을 받고 있었다.
“오늘 정말 좋네요. 이번 시즌 주의 활약은 정말 대단하죠. 시즌 내내 부침이 많았던 토트넘을 이끌고 오다시피 했는데, 한 단계 더욱 성장한 모습까지 보이거든요? 앞으로 주의 활약이 정말 기대됩니다.”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한 성배를 앞세워 토트넘은 미들스브로에게 4-0 승리를 거두었다.
성배가 부상에서 복귀한 지난 23라운드 스토크 시티전 이후 볼턴, 아스날, 헐 시티에 이어 미들스브로까지.
중반의 부진을 딛고 5연승을 거두며 리그 7위까지 올라갔다.
이번 시즌 최고 순위였다.
***
미들스브로에게 4-0의 대승을 거둔 토트넘은 다음 경기인 선덜랜드 원정에서 무승부에 그치긴 했지만, 다시 아스톤빌라를 잡아내며 성배 복귀 후 일곱 경기 6승 1무의 호성적을 이어갔다.
그리고 30라운드.
토트넘은 리그 3위의 첼시와 만났다.
“상승세의 두 팀의 경기라서 그런지 확실히 수준 높은 공방전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양 팀 모두 절대 물러서지 않습니다!”
하지만 상승세는 첼시도 만만치 않았다.
호비뉴의 영입 실패부터 시작해서 시작부터 흔들렸던 스콜라리 체제는 베테랑들이 반기를 들고 에시엔이 부상으로 빠지는 등의 악재로 인해 시즌 초반의 분위기를 이어가지 못했다.
결국, 리그 순위가 4위까지 떨어졌고, 아브라모비치는 스콜라리를 경질했다.
그렇게 새로 선임된 감독이 바로 거스 히딩크.
이번 시즌까지만 팀을 맡기로 한 히딩크 감독은 부임 이후 리그 4전 전승, 총 6승 1무에 챔스 16강에서 유벤투스까지 잡아내며 팀 분위기를 일거에 쇄신했다.
그 기반에는 선수들과의 첫 미팅에서 "너희들은 감독이 없어도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선수들이다. 나는 너희에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고, 너희도 나한테 신경 쓸 필요 없으니 너희 하고 싶은 대로 해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즉, 지금 첼시의 분위기 쇄신은 심리적인 문제가 경기력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었다.
“콰레스마, 오른쪽 측면을 파고듭니다! 하지만 그 앞에 버티고 선 주성배!”
그렇다고 히딩크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제 몫을 하지 못하던 비싼 선수들을 부활시켜 핵심 자원으로 활용했다.
말루다, 발락, 아넬카 등 스콜라리 체제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던 선수들이 히딩크의 부임과 함께 부활했다.
이들은 명실공히 첼시의 상승세를 이끄는 주역들이었다.
스콜라리 체제와 비교해 별다른 전술적 변화는 없었지만, 특유의 카리스마와 선수단 장악력을 통해 엄청난 변화를 이끌어낸 히딩크는 자신이 왜 세계적인 명장인지를 증명했다.
“콰레스마, 돌파 시도! 멋진 발놀림으로 방향 전환합니다! 중앙으로 움직이지만, 밀려 넘어집니다! 파울 선언되지 않았고, 주, 빠르게 역습으로 전개합니다!”
하지만 콰레스마만큼은 히딩크도 살려내지 못했다.
포르투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며 3,000만 유로라는 거액에 무리뉴 감독의 인테르로 이적한 콰레스마는 완벽히 망했다.
전설의 콰밥만훈 라인의 일원으로 [콰]라 불렸다.
그리고 첼시로 임대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나지 못했다.
작년 말부터 국가대표에서도 제외되었다.
“전방으로 길게 때려줍니다! 반대편의 레넌에게!”
성배는 오늘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칼링컵 결승을 통해 한 단계 더 성장한 이후, 모든 경기에서 토트넘의 왼쪽 측면을 완벽히 지켜냈다.
첼시는 에시엔을 수비형 미드필더로 두고 새로운 재능을 발견한 벨레티와 발락을 중앙 미드필더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램파드를 두며 중원에 집중했다.
“득점이 되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도 좋은 패스를 보여줍니다. 주를 좀 더 막아낼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요.”
첼시가 중원에 집중하면서 성배는 비교적 여유로웠고, 공격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해주었다.
직접적으로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진 못했지만, 첼시의 강력한 중원 압박에 고생한 모드리치를 대신해 공격을 이끌었다.
“말루다의 투입은 공격력 강화를 위한 목적도 분명 있겠지만, 주의 움직임을 좀 제한하려는 의미도 있을 거예요. 괴롭혀줄 수 있는 윙어가 없다 보니 주가 너무 활개를 쳤거든요? 말루다가 그 역할을 잘 해주어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마땅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어요.”
수비수를 마크하기 위해 공격수를 투입할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냈으니 그 활약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성배는 직접적인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경기 내내 토트넘에서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선취 골이자 결승 골이 된 모드리치의 득점 역시 대지를 가르는 성배의 패스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성배의 활약과 성배와 함께 좋은 모습을 보여준 모드리치, 베일, 레넌 등의 활약으로 토트넘은 나란히 상승세를 달리던 첼시와의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며 6위 에버턴에 승점 2점 차까지 따라붙었다.
***
“오랜만이네, 다들. 다들 잘 나가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첼시와의 리그 경기를 마친 성배는 2010 남아공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에 참가하기 위해 벨기에로 날아왔다.
그리고 이제는 국가대표팀 경기가 있을 때마다 당연하다는 듯 젊은 선수들의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연히 성배가 이를 주도했다.
‘다들 모이는 게 자연스러워졌어. 좋은 징조야.’
물론 아직은 서로 간에 보이지 않는 벽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조급할 필요는 없었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런 자리가 자연스러워졌다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다행은 무슨. 지가 제일 잘 나가면서.”
성배의 인사에 베르마엘렌이 발끈해 외쳤다.
실제로 여기 모인 선수들 중 성배보다 잘 나가는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굳이 같은 나이 또래가 아니더라도 현재 벨기에 선수들 중에 성배보다 높은 위상을 가진 선수는 반 바이텐이 유일했다.
반 바이텐도 이제 서른이 넘었기 때문에 슬슬 성배에게 벨기에 최고 스타의 자리를 물려주는 중이었다.
“내가 잘 나가는 건 사실이지만, 너희가 잘 나가서 기분 좋은 것도 사실이지.”
이젠 성배도 자신의 위치를 누리기로 했다.
예전이었으면 이런 말들이 나올 때마다 자신은 비교도 안 되는 재능을 가졌고, 나중에는 자신보다 더 크게 성공할 그들에게 접어주는 감이 있었지만, 이젠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 것이었다.
“와, 저 건방진 거 봐라. 키야, 역시 성공하더니 변했네, 변했어.”
이번엔 펠라이니.
성배와 반 바이텐, 그리고 2009년 들어서부터 잠재력이 폭발 중인 콤파니를 제외하면 현재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였다.
EPL의 에버튼에 합류한 이후 특유의 터프함과 묵묵한 플레이를 무기로 자신의 자리를 확보했다.
벌써 여섯 골을 넣었고, 에버튼 중원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그나저나 부상 당한 친구들이 너무 많아서 걱정인데.”
슬슬 벨기에의 황금기를 이뤄낼 선수들이 전면에 등장해 기량을 키워나가고 있었지만, 현재의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베르통헨과 마르텐스, 미랄라스 등이 부상으로 빠졌고, 데 뮬은 세비야에서 기회를 잡지 못해 경기력이 바닥을 기었다.
미랄라스, 데 뮬, 마르텐스 등이 빠진 공격진의 문제가 심각했다.
“늦어서 죄송요! 하하, 미안, 미안.”
“아니, 지금 선배들도 다 먼저 와서 기다리는데 막내가 이렇게 늦어도 되는 거야? 앙?”
그때, 한 선수가 조금 늦게 도착해 멋쩍은 미소와 함께 들어왔다.
모여있던 프랑스계 선수들은 모두 그 선수를 타박했지만, 모두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네덜란드계 선수들은 그저 눈인사나 손인사 정도를 보낼 뿐이었다.
“에당, 너무 늦었다고. 앞으로 약속시간은 좀 지켜. 처음부터 이러면 어떡해.”
“미안해요. 잘못했으니까 봐줘요.”
에당 아자르.
구멍이 숭숭 뚫린 벨기에 공격진에 새로운 힘이 되어줄 그가 드디어 국가대표팀에 처음으로 소집되었다.
< 낭만필드 - 172 > 끝
ⓒ 미에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