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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171화 (125/356)

< 낭만필드 - 171 >

“주심의 휘슬이 울립니다! 포이 주심, 주를 향해서 달려갑니다.”

“이거 설마? 설마 카드 나오나요?”

주심이 성배를 향해 달려오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성배는 이미 경고 한 장을 받은 상태였다.

“아니, 아니.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오늘 파울을 많이 한 건 알겠는데, 이번엔 아닙니다. 이번만큼은 시뮬레이션 액션입니다!”

주심이 달려오는 것을 본 성배는 당황해서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성배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흔치 않은 장면이었다.

“에이,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닙니다. 이번에는 혼자 넘어진 겁니다. 누가 봐도 안 걸렸지 않습니까?”

“주심! 이건 호날두한테 경고를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주가 팔을 휘두르기 전에 이미 뒤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토트넘 선수들도 일제히 포이 주심을 둘러싸고 항의했다.

이렇게 다급하게 나선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포이 주심의 손이 윗주머니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경고 나옵니까? 지금 경고가 나오면 큰일입니다!”

“주는 이미 경고 한 장을 받고 있거든요? 여기서 한 장 더 받으면 퇴장이에요!”

만약 지금 성배가 퇴장당한다면, 토트넘 입장에서는 막대한 타격이었다.

전반 중반까지는 도움은커녕 방해가 되었지만, 중반 이후부터는 거친 플레이가 오히려 호날두를 자극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성배였다.

그리고 선취 골을 도운 이후부터는 냉정한 상태로 거친 플레이를 이어가며 호날두를 꽁꽁 묶어주었다.

지금 상황에서의 퇴장은 토트넘에게 치명적이었다.

“아! 경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퇴장! 레드 카드입니다!”

성배와 토트넘 선수들의 격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포이 주심은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윗주머니에서 옐로 카드가 나왔고, 곧이어 레드 카드가 따라 나왔다.

“젠장...”

성배는 나지막이 욕설을 씹어뱉었다.

그리고 호날두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감싸 쥐고 그라운드 위에 누워있는 호날두와 마침 눈이 마주쳤다.

‘드디어 뭐가 좀 되나 했더니.’

호날두가 리그는 물론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다이버라는 것을 잠시 깜빡하고 말았다.

상세하게 기억나지 않는 자신의 거친 플레이가 호날두를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것에 빠져서 그가 언제든 파울을 얻어낼 수 있는 선수라는 걸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발목을 잡았다.

“느린 그림으로 보니까 팔꿈치에 맞기 전에 이미 뒤로 넘어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네요. 호날두의 절묘한 연기가 주를 그라운드에서 쫓아냈어요.”

느린 장면으로 상황을 다시 돌려 본 중계진은 호날두의 상체가 먼저 넘어가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들이 확인했다고 해서 판정이 바뀌진 않았다.

“파울인지 아닌지는 애매한데, 충분히 파울 콜이 나올 순 있는 상황이에요. 그런데 경고가 나올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네요. 하지만 이것도 다 주가 자초한 일이죠.”

오늘 성배의 플레이가 너무 거칠었던 것이 문제였다.

계속된 반칙에 주심도 사람인지라 짜증이 난 것이었다.

구두로 몇 번이나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놓고 저지르는 반칙이 주심의 심기를 건드렸고, 주심의 뇌리에 성배는 거친 플레이를 한다는 것이 박혔다.

그리고 지금 그것이 경고로 돌아왔다.

“경고 두 개로 퇴장당하긴 했지만, 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실제로 초반에는 호날두에게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는데, 거칠게 플레이한 중반 이후부터는 오히려 호날두가 주를 상대로 고전하는 모습이지 않았습니까?”

“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은 해요. 실제로 결과가 그렇게 나왔으니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아직 경기가 20분 정도 남았는데, 너무 빠른 퇴장이네요. 과연 토트넘이 이 상황을 어떻게 넘길지 궁금합니다.”

전체적으로 오늘 성배의 플레이는 나쁘지 않았다.

성배 자신은 자신이 생각한 대로 플레이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움직였던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결과만 놓고 보자면 천하의 호날두를 상대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더욱 치명적이었다.

‘첫 퇴장인가...’

돌아온 이후 첫 번째 퇴장이었다.

안더레흐트에서 데뷔한 이래 4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커리어 사상 첫 번째 퇴장 기록이 오늘 세워졌다.

***

“벤틀리, 슈팅! 아! 빗나갑니다! 토트넘의 네 번째 키커, 벤틀리가 실축하면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칼링컵 우승 트로피를 가져갑니다!”

경기가 끝났다.

토트넘의 승부차기 네 번째 키커, 벤틀리가 실축하면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승리, 칼링컵 우승 트로피를 가져갔다.

“결국, 수적인 열세를 이겨내지 못한 토트넘이 승부차기 끝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무릎을 꿇었네요. 전체적으로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선취 골을 너무 늦게 넣었던 것이 결국 이런 결과를 불렀죠.”

성배의 퇴장 이후, 데포를 빼고 에코토를 투입해 수비를 강화한 토트넘이었지만, 에코토는 호날두를 감당할 수 없었다.

성배의 거친 플레이를 피하기 위해 몸을 사렸던 호날두는 성배가 퇴장당하고 5분 뒤, 후반 30분에 한 골을 득점했다.

“데포를 빼고 파블류첸코를 남긴 것도 이제 와서 보면 아쉬운 선택이었죠. 토트넘의 장점이라면 베일과 레넌의 양 날개에 데포 혹은 벤트가 합세한 스피드인데, 데포가 빠지면서 스피드의 장점을 잃고 말았어요. 파블류첸코가 아니라 데포나 벤트였다면 몇 번의 역습 찬스를 살릴 수도 있었는데요.”

이런저런 아쉬움이 있었지만, 결국 가장 큰 타격은 성배의 퇴장일 수밖에 없었다.

성배의 퇴장으로 인한 수적인 열세와 호날두의 부활이 토트넘의 발목을 잡았고, 그것이 토트넘의 칼링컵 2연패를 가로막았다.

“이번 시즌 토트넘을 이끌며 두 번의 큰 부진을 빠져나올 때 선봉장 역할을 해주었던 주이지만, 칼링컵 결승전이라는 중요한 무대에서 치명적인 퇴장으로 팀을 가로막고 말았습니다.”

오늘 퇴장당한 선수가 지금까지 팀을 이끌어온 성배가 아니었다면 큰 비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나마 난세의 영웅으로 떠오른 성배였기 때문에 그렇게 큰 비난은 없겠지만, 그래도 아예 없을 수는 없을 것으로 보였다.

인터넷 용어로 하면 ‘까방권’, 욕먹지 않을 수 있는 티켓 한 장을 소모한 성배였다.

***

‘비록 퇴장까지 당하고 우승 트로피를 걷어차 버린 경기였지만... 얻은 게 없지는 않아.’

경기 종료 후, 성배는 오랜만에 펜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았다.

맨유와의 칼링컵 결승은 성배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그렇게까지 흥분한 이유부터 찾아야 해.’

경기 초반부터 이상하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컨디션 관리도 완벽했고, 몸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면 신체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호날두를 상대한다는 부담감? 그것 때문인가? 그렇다기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심리적인 문제에서 찾아보려고 해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호날두와 대결을 펼친 것이 처음도 아니었다.

성배는 외부적인 요인이 아닌 자신에게서 이유를 찾아보기로 했다.

‘내가 달라진 건 뭔가.’

외부적인 요인에서 별다를 게 없었다면 결국 이유는 자신에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호날두를 만났던 과거의 경기들과 이번 경기에서 자신이 다른 점은 하나였다.

그냥 팀의 주전 선수 중 한 명이었던 지난 경기들과 달리 지금은 자신이 팀의 핵심 중 핵심이라는 것이었다.

‘내 비중이 높아져서 내 안의 뭔가가 달라졌다는 이야긴데...’

결국, 프라이드의 문제였다.

그리고 자신이 흔들리면 팀이 흔들릴 수도 있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자신의 안에 프라이드와 함께 부담감이라는 것이 자리 잡았다는 것을 깨달은 성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아무것도 아닌 선수였던 게 아니었나. 그런 프라이드,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성배는 자신의 기량에 대해 한 번도 만족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대단한 선수라고 생각했던 적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천천히 생각해보니 어느새 자신은 자신의 기량과 위치, 활약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만족하고 안주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좋은 소식인가. 억지로라도 그렇게 생각하려 노력했던 적은 있었는데.’

흔히 TV나 책을 보면 자기 자신이 먼저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남들도 자신을 높게 평가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성배도 억지로나마 그렇게 생각하려 노력했던 적이 있었다.

마음처럼 되지 않았고, 그래서 포기하긴 했지만.

‘그래. 지금의 난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자격이 있어.’

억지로 채찍질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앞만 보고 달리는 방식이 더는 통하지 않을 시기가 된 듯했다.

이젠 여유를 좀 가질 필요가 있었다.

물론 여유를 갖는다는 이야기가 위로 올라가려는 노력을 소홀히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내가 호날두를 상대로 프라이드를 세우는 날이 오다니.’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미 발롱도르 트로피를 손에 넣은 호날두를 상대로 자신이 자존심을 세운 것이었다.

호날두에게 몇 번 뚫렸다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 흥분하고 어울리지 않는 거친 플레이로 복수했다니.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몸으로 밀어붙였을 때... 호날두가 오히려 밀렸어.’

거친 플레이를 했다는 것도 놀라운데, 호날두가 그 거친 플레이에 말려들었다는 것 역시 놀라웠다.

항상 중요한 순간마다 성배의 발목을 붙잡았던 건 피지컬이었다.

평균에도 훨씬 못 미치는 피지컬 때문에 평생을 2부 리그에서 썩었어야 했다.

하지만 이번 경기에선 호날두를 상대로 피지컬에서 우위를 점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드리블러 타입이지만, 피지컬이 특별히 안 좋은 선수도 아닌데. 아니, 오히려 괜찮은 편에 드는 선수인데.’

아직 벌크업하기 전이라고 하지만, 호날두의 피지컬은 윙어 중 중상위권에 속했다.

타고난 능력치가 좋은 선수였다.

그런데 몸으로 밀고 들어오는 성배의 플레이에 계속 그라운드를 굴렀다.

‘헐크 같은 선수만 안 만나면 충분히 해볼 만하겠는데.’

호날두와 정면 대결을 펼쳐 이 정도의 성과를 냈다면, 힘이 특별하게 강한 몇몇 선수들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선수들과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이야기였다.

어지간한 선수들은 이제 자신에게 부담을 줄 수 없었다.

피지컬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필요도 있었다.

몸이 만들어졌는데도 이제야 그것을 깨달았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몸싸움을 피한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몸이 만들어졌어도 이것을 활용하지 못한다면 전과 달라질 게 없었다.

흥분해서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든 이번 경기에서의 플레이를 제정신에서도 펼칠 수 있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몸싸움을 전혀 피하지 않았어.’

어제 경기를 다시 돌려보는 동안 계속 신경을 자극하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바로 거칠게 플레이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부상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몸싸움을 펼칠 때마다 항상 미묘하게 박자가 늦었었다.

하지만 비디오를 통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서 그런 건 보이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브레이크가 걸린다고 생각했는데, 무의식 속에서 경기를 펼치는 자신에겐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다.

타이밍이 늦었던 이유는 자신이 의식적으로 브레이크를 걸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였다.

‘... 몸싸움의 약점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겠는데.’

어제 경기를 통해 얻은 것은 한둘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와 피지컬, 그리고 몸싸움 문제.

자신을 괴롭혔던 대표적인 약점들을 극복할 실마리가 단 한 경기를 통해 모두 나타났다.

‘칼링컵 우승 트로피 따위는 비교도 안 되는 것들을 얻었군.’

따낼 수 있는 우승 트로피 중 가장 가치가 낮은 칼링컵 트로피였다.

그 칼링컵 트로피 하나로 이 모든 것을 얻어냈다면, 완전히 남는 장사였다.

팀이나 동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성배는 패배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한 번 남았지?'

리그에서 있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호날두와의 마지막 대결.

그때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었다.

회귀 이후, 한 선수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끝냈던 적은 없었다.

결국에는 복수를 했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 낭만필드 - 171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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