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70 >
“파울 선언되지 않습니다! 그대로 경기 진행!”
다행히 주심은 경기를 그대로 진행시켰다.
먼저 유니폼을 잡아당긴 사람이 성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셔가 먼저 성배의 유니폼을 잡아당겼고, 두 선수의 유니폼이 비슷하게 늘어났다.
그 말은 두 선수가 같은 힘으로 당겼다는 뜻이었다.
주심은 오셔가 먼저 파울을 범했다고 판단했고, 성배의 파울을 선언하지 않았다.
‘내가 해결해야 해. 뭐라도 해내야 해.’
심리적으로 쫓기고 있던 성배는 자신이 직접 해내려는 욕심을 부렸다.
오셔까지 따돌린 이후, 크로스 찬스가 났지만, 크로스를 선택하지 않고 직접 중앙으로 치고 들어갔다.
자신의 장점인 크로스가 아니라 슈팅을 선택한 것이었다.
“에반스가 뛰쳐나오고, 그대로 슈팅!”
에반스가 각도를 좁히며 뛰쳐나오자 성배는 다소 급하게 슈팅을 날렸다.
오셔를 따돌리면서 자유로운 상황이 되었지만, 그렇게까지 여유가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에반스의 압박이 부담될 수밖에 없었다.
‘젠장, 젠장!’
강하게 슈팅하면 안 그래도 정확도가 떨어지는 편인데, 거기서 압박까지 받으면서 때렸으니 정확한 슈팅을 시도하기엔 무리였다.
슈팅을 때린 성배는 아주 많이 빗나가지는 않았어도 살짝 벗어나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아! 모드리치!”
슈팅이 빗나갔다는 것을 깨닫고 땅을 강하게 걷어차던 그때, 모드리치가 볼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대로 나갈 것이라 생각하고 살짝 긴장을 풀었던 포스터 골키퍼와 맨유 수비수들은 깜짝 놀랐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골! 골입니다! 모드리치, 골대 안으로 볼을 밀어 넣었습니다! 엄청난 골! 엄청난 반사신경입니다!”
몸을 날린 모드리치는 그대로 아웃 될 것처럼 보였던 볼을 발끝으로 밀어 넣어 골을 기록했다.
맨유 선수들은 물론 성배와 토트넘 동료들마저도 상상하지 못한 엄청난 플레이였다.
“굉장한 골이에요! 모드리치의 멋진 플레이가 드디어 토트넘에게 리드를 안겨줍니다!”
유망주 위주로 나선 맨유를 상대로 경기를 주도해나갔던 토트넘은 후반전 초중반에 접어들고 나서야 드디어 리드를 잡았다.
득점은 모드리치, 어시스트는 성배의 것이었다.
“으아아아!!!!!”
그리고 성배는 골이 들어간 순간, 무슨 괴수 영화의 괴수처럼 울부짖었다.
지난 1년간 쌓였던 울분을 터뜨리는 울음이었다.
겉으로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자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속에 쌓였던 것들이 터져나오는 느낌이었다.
“골이야! 골이라고! 또 한 번 우승 가자!!”
골을 넣은 모드리치도 가장 먼저 성배를 향해 달려와 안겼다.
그리고 그 주위를 팀 동료들이 둘러쌌다.
몇몇 선수들은 성배와 모드리치를 눕히고 그 위에 탑을 쌓기도 했다.
‘이 정도면 나도 밥값한 거지?’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면서 마음의 짐을 그나마 조금 덜어낸 성배였다.
폭주하느라 이성을 잃고 무리해서 직접 슈팅을 시도했던 성배지만, 그래도 중요한 건 득점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는 것이었다.
“뭐해? 네가 만든 거나 다름없는 골인데 팬들에게 손이라도 흔들어줘야지.”
세리머니가 끝나고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성배를 향해 모드리치가 입을 열었다.
원래는 패스가 아니었고, 벗어나던 슈팅을 믿을 수 없는 반사 신경으로 골대 안에 욱여넣은 모드리치도 분명 대단했다.
하지만 호날두의 볼을 빼앗아 50여 미터를 질주한 성배의 돌파가 이번 득점의 시작이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다.
성배의 돌파가 없었다면 득점은 없었을 것이었다.
“하아...”
하지만 성배는 자리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아무래도 쌓였던 게 많았고, 이번 플레이에서도 볼 수 있듯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막상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고 나니 잠시 몸에서 힘이 빠졌다.
“뭐 때문에 그렇게 조급한 건지 물어봐도 되나?”
성배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모드리치가 쪼그려 앉으며 물었다.
오늘 성배의 플레이에서 이상함을 느낀 몇 안 되는 선수였다.
아니, 성배의 플레이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은 다들 알았지만, 그 모습에서 성배가 불안하다는 것을 느낀 몇 안 되는 선수였다.
“조급하다, 라...”
모드리치의 말에 성배는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면서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자, 오늘 경기에서 자신이 보여준 모습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득점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고 공격 포인트를 따냈다는 것은 성배의 마음 속에 여유를 돌려놔 주었다.
“그러게. 왜 그렇게 조급했을까.”
성배는 자신이 조급했음을 인정했다.
조급했고, 민감했다.
호날두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으면서, 호날두에게 완벽하게 압도당하자 꼭지가 돌아버린 것이었다.
평소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고 그 평가를 기반으로 경기에 임하는 자신의 스타일과는 분명 달랐다.
“내 주제에 호날두를 라이벌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성배는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항상 아니라고, 자신은 호날두보다 분명 부족한 선수라고, 비교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줄 알았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상대해 볼만 하다고 여겼던 것이었다.
“왜? 네가 뭐 어때서. 세계에서 호날두를 그 정도로 괴롭힐 수 있는 선수는 몇 안 돼. 자신감을 가져도 되니까 너무 자학하지는 마.”
자조적인 성배의 태도에 오히려 모드리치가 더 화를 내며 나섰다.
실제로 맨유와의 지난 몇 경기 동안 성배는 호날두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고 생각해 마음속에 화가 쌓였지만, 동료 선수들은 그래도 성배 덕분에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성배가 호날두에게 밀렸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혼자서 호날두를 막아주면서 동료들이 자신의 플레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그리고 오늘도 그랬다.
전반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고등학생이 프로를 막는 것처럼 신나게 털렸던 성배였지만, 그 이후로는 오히려 전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성배의 거친 플레이가 호날두를 막아준 덕분에 토트넘은 경기 분위기를 주도할 수 있었다.
“진짜야. 네가 흔들리면 팀이 흔들려. 네 위치에 대해 자각을 좀 하라고. 리그의 어떤 레프트백도 너만큼 팀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해. 다른 건 모르겠지만, 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는 레프트백은 너야. 네가 대단한 선수라는 자각을 좀 하라고.”
모드리치의 말에 성배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까지 자신을 높게 평가해주니, 그것도 모드리치가 그렇게 평가해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 경기를 통해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한 프라이드라는 놈을 만족하게 해 줄 수 있는 말이었다.
“나도 어느새 그 정도로 대단한 놈이 된 건가.”
성배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웃어 보였다.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게 되어 마음에 여유가 좀 생기자 오늘 자신의 모습을 다시 돌아볼 수 있었다.
‘너무 찌질했어.’
성배는 자신의 모습을 찌질했다 자평했다.
자신이 호날두에 밀리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진실’이었다.
자신도 잘 알고 있었으면서 그것 때문에 프라이드에 상처를 입어 천둥벌거숭이처럼 나댔던 것은 자신답지 않았다.
‘프라이드라... 나에게도 그런 게 생긴 건가.’
천천히 생각해보면 자신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 생겨난 프라이드라는 녀석이 문제였다.
자신은 프라이드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몰랐다.
그리고 프라이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배우지 못하는 동안 호날두가 성배의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고 절벽에서 새끼를 밀어 떨어뜨리는 사자처럼 거친 방식으로 그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이젠 좀 나아진 것 같아?”
“그래. 고맙다. 네가 골을 넣어준 덕분에 여유가 좀 생겼고, 네 말 덕분에 시야가 좀 넓어지는 기분이니까. 고맙다고 해두지.”
물론 평소와 같은 냉정함을 바로 되찾을 순 없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여유가 생겼고, 자신의 지난 플레이들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
“자, 이제 맨유도 슬슬 급해집니다. 아무리 백업 선수들 위주로 출전시켰다고 하지만, 그래도 결승전이지 않습니까? 겨우 한 골 차이인데 포기하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성배와 모드리치, 토트넘을 이끄는 두 선수가 합작해낸 골로 리드를 빼앗기게 된 맨유는 이후 만회 골을 만들어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깁슨을 긱스와 교체해주고 성배에게 돌파를 허용하며 실점의 원흉이 된 오셔도 비디치와 교체해주었다.
비록 유망주들 위주로 나섰지만, 우승을 포기하지는 않겠다는 퍼거슨 감독의 의중이 보였다.
‘이성을 잃고 흥분했을 때, 오히려 더 잘 막아냈어.’
성배는 자신이 전반 중반 이후 흥분했을 때 오히려 더 좋은 수비를 보여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생각해보았다.
‘거친 플레이. 거칠게 해야 한다는 건가. 아직 벌크업이 된 상황도 아니고 내가 그렇게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봤을 테니.’
자신의 거친 플레이가 호날두를 당황하게 만든 것이라 확신했다.
자신이 흥분하기 시작해 동작이 커지고 거칠어진 다음부터 호날두의 플레이가 삐걱대기 시작했던 것 같았다.
‘그렇다면 계속 거칠게 해줘야지.’
오늘 경기에서 호날두는 전반 중반 이후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성배가 나름 잘 막아낸 덕분이었다.
함께 출전한 동료들의 서포트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성배 때문에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던 호날두가 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안데르송, 오른쪽으로 패스하고, 호날두가 볼 잡았습니다.”
그래도 맨유는 결국 호날두였다.
호날두가 헤매기 시작한 이후부터 테베즈도 호날두의 짐을 덜어주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결국은 호날두였다.
“어느 순간부터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요, 이제는 뭔가 해주어야 할 타이밍이거든요? 팀의 우승 트로피를 위해서는 호날두가 꼭 살아나 줘야 해요.”
자신의 계산과 진짜 실력으로 호날두를 막아내고 싶었다.
흥분해서 자신도 모르게 나온 플레이로 얼떨결에 잡아낸 것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3년 만에 처음으로 호날두에게 우위를 점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거칠게 달려드는 것이 정답이라는 이야기였다.
“눈이 좀 좋아진 것 같은데. 정신을 좀 차렸나?”
호날두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성배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 경기 내내 호날두와의 대화를 거부했었기 때문이었다.
“호날두, 다시 한 번 돌파 시도! 멀리 차 놓고 뛰어듭니다!”
그리고 호날두 역시 성배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말을 걸었던 것은 조그마한 빈틈이라도 만들어보려는 이유였다.
그리고 아주 작은 틈이 보이자 바로 볼을 쑤셔넣고 이어 몸까지 쑤셔넣었다.
‘이런. 약아빠진 자식.’
선수를 빼앗긴 성배는 호날두의 뒤에서 쫓아가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거친 플레이를 잊어버리지 않았다.
오른손으로 호날두의 가슴팍을 잡고 끌어당겼다.
‘잠깐!’
그런데 그때,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호날두의 몸이 살짝 제껴진 것이었다.
팔을 활용해 그의 가슴을 위쪽으로 밀어내던 상황이었기에 성배의 팔은 자연스럽게 위로 솟구치며 뒤로 휘둘러졌다.
“으아악!!”
‘아. 이거 큰일 났다!’
그리고 호날두는 비명과 함께 얼굴 쪽을 감싸 쥔 채 그라운드 위에 누워버렸다.
< 낭만필드 - 17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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