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169화 (123/356)

< 낭만필드 - 169 >

“끈질기게 오른쪽을 통해 공격을 시도하는 맨유, 다시 한 번 호날두에게 볼이 연결됩니다.”

성배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맨유는 더욱 집중적으로 성배를 공략했다.

당연한 선택이었다.

확률이 높은 쪽으로 공격하는 것은 모든 전술의 기본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 주가 영 힘을 쓰지 못하는데요?”

평소답지 않게 나사 하나 정도는 빠진 듯한 성배의 플레이에 중계진들도 이상함을 느꼈다.

물론 경기마다 선수들의 컨디션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성배의 경우 컨디션이 안 좋아도 최소한 1인분은 해주는 안정적인 플레이가 장점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젠장할. 아주 대놓고 내 쪽으로 오는구나.’

계속되는 맨유의 집중 공략에 성배도 피곤함을 넘어 짜증을 느끼고 있었다.

당연히 평소에는 그랬을 리 없었다.

예전에도 같은 경우가 있었는데, 그때는 가볍게 막아내면서 오히려 상대 팀을 괴롭히려 했지, 분노하거나 짜증 낸 적은 없었다.

“오늘 이상해, 확실히.”

볼을 툭툭 치면서 조금씩 전진하던 호날두가 말했다.

성배의 귀에도 그 목소리가 들어오긴 했지만, 뇌로 전달되지는 않았다.

경기 초반부터 이어진, 아니, 지난 몇 경기들에서부터 이어진 일방적인 대결 결과가 성배를 자극하고 있었다.

‘중앙!’

가볍게 조금씩 움직이던 호날두가 갑작스레 속도를 냈다.

한 번의 페이크 이후 왼발 바깥쪽으로 볼을 밀어내 중앙 돌파를 시도하려 한 것이었다.

성배는 늦지 않게 한 발 먼저 중앙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페이크입니다! 빠른 측면 돌파!”

하지만 페이크였다.

중앙 쪽으로 중심을 옮겨 버린 성배는 옆으로 빠져나가는 호날두의 움직임을 막아서지 못했다.

이번에도 너무 무력하게 호날두의 페인트에 속아버리고 말았다.

‘......’

이젠 그냥 속으로 욕하는 것도 지쳐서 생각이 없어질 정도였다.

성배는 그저 열심히 호날두의 뒤를 따라갈 뿐이었다.

“호날두, 오른발로 크로스, 도 페인트! 왼발 앞으로!”

겨우 쫓아간 성배는 호날두의 크로스를 막기 위해 빠르게 달려가 왼발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것도 페이크였다.

발을 높이 들어 올리며 달려든 성배는 당연히 앞쪽으로 튀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

또 한 번 속아버렸지만, 이젠 성배에게도 악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앞으로 튕겨 나갔던 성배는 왼발을 강하게 찍으며 앞으로 쏠리려는 몸을 멈춰 세웠고, 다시 몸을 돌려 호날두에게 달려들었다.

“아악!!”

성배도 이젠 깔끔하게 막아낼 생각을 버린 듯했다.

호날두를 향한 성배의 태클은 파울이 되더라도 상관없다는 듯 굉장히 거칠게 들어갔다.

평소 교묘하게 파울을 활용하긴 해도 플레이 자체는 깔끔한 편이었기에 호날두도 예측하지 못했다.

“호날두, 크로... 아! 주의 태클이 깊었습니다! 위험한 태클!”

“주, 오늘은 확실히 뭔가 다른데요? 이렇게 러프한 느낌은 처음이에요.”

성배의 플레이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평범한 팬들도 눈치 채기 시작했다.

그 정도로 오늘의 성배는 뭔가 이상했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호날두와의 대결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지, 아니면 실질적으로 처음 겪는 EPL의 살인적인 일정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컨디션이 나빠진 것인지.

성배조차도 알 수 없었다.

“너무 거칠었어. 계속 이런 식으로 플레이하면 나도 어쩔 수 없네.”

경기를 진행하는 포이 주심은 성배를 향해 달려와 자제를 요구했다.

호날두에게 무력하게 당하다가 처음으로 막아낸 이번 플레이는 너무 거칠었다.

다행히 처음이었고, 아직은 최소한의 이성이 남아있어 발바닥은 눕히고 들어간 태클이었기 때문에 구두경고 정도로 끝낼 수 있었다.

“......”

평소였으면 넉살 좋게 웃으며 애교를 부리던지 깍듯하고 예의 있는 모습을 보이든지 해서 주심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을 성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도 없었다.

멋모르고 축구했던 초등학교 시절 이후 처음으로 아무 생각 없이 본능에 입각한 축구를 하고 있었다.

“토트넘은 뭔가 다른 수를 생각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주가 토트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보통 큰 게 아니거든요? 수비는 물론이고 공격에서도 역할을 해줘야 하는 선수이기 때문에 차라리 베일을 좀 내려서 수비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수비수가 본업이지만, 성배의 롱패스는 공격에서도 큰 역할을 해주었다.

즉, 성배가 호날두에게 이렇게까지 위축되고 압도되어 있다면, 토트넘의 공격도 쉽게 풀리지는 않을 것이란 이야기였다.

다행히 맨유의 선발 명단이 유망주 위주라서 성배가 이렇게 묶여 있어도 토트넘이 경기를 주도하는 게 가능했지만, 성배의 롱패스를 봉인해두는 것은 좋지 않았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지금이라도 가레스를 좀 내릴까요?”

“음...”

토트넘 벤치도 생각이 복잡해졌다.

다른 선수였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베일을 내려서 수비적인 백업을 주문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선수가 아닌 성배였다.

성배라면 어떻게든 해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섣부른 판단을 가로막았다.

“주가 경기 내내 이렇게 밀렸던 적이 있었던가.”

“아뇨. 없습니다.”

아직 전반전 중후반에 불과했다.

호날두를 비롯한 그 어떤 선수를 만나도 상대적으로 조금 밀렸던 적은 있었지만, 경기 내내 압도당했던 적은 없었던 성배였다.

최소한의 역할을 항상 해주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일단 전반전까지는 두고 보지.”

“스읍, 뭐, 알겠습니다.”

레드냅 감독은 성배를 조금 더 믿어보기로 결정했다.

성배라면 최소한 자기 몫이라도 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에브라, 반대편으로 크게 열어줍니다! 호날두에게!”

반대편 측면에서 에브라가 길게 볼을 넘겨주었고, 역시나 호날두를 향했다.

“호날두, 가슴으로 트래핑!”

에브라의 패스를 가슴으로 받아낸 호날두는 달려오는 성배를 보았다.

성배가 워낙 거칠게 달려들고 있었기에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확신했고, 오른발로 볼을 멀리 차 놓았다.

예상대로 성배는 득달같이 달려들었고, 볼은 성배의 옆을 지나쳐갔다.

호날두도 볼을 따라 성배의 옆을 뚫어냈다.

‘어딜!’

“툭 치고 들어가는데, 넘어집니다!”

사실 볼은 이미 지나가 있었다.

조금 전부터 성배는 완전히 흥분 상태였다.

그라운드 위에서 이성을 잃은 것은 전생에서 공격수로 활약할 때 이후 처음이었다.

지금도 너무 쉽게 놓쳤고, 완전히 지나간 호날두의 발을 걷어차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은 봐줄 수 없네.”

이번에는 주심도 그냥 넘어가 주지 않았다.

계속된 거친 플레이에 몇 번의 구두경고를 주었음에도 또 한 번 대놓고 반칙을 범했기에 옐로우 카드를 피할 순 없었다.

“음...”

성배가 경고를 받는 모습을 보면서 레드냅 감독은 턱을 쓰다듬었다.

언젠가 경고를 받겠지, 했는데 생각보단 꽤 오래 버틴 편이었다.

후반전 10분 정도였으니, 남은 30여 분만 잘 버텨준다면 문제없이 끝낼 수 있을 것이었다.

“생각보다 잘 버티는 것 같습니다.”

“그러게. 내 생각보다도 더 잘해주는군.”

그리고 의외로 성배는 호날두를 잘 막아내는 중이었다.

이성을 잃고 흥분한 성배의 플레이가 오히려 호날두를 당황하게 했다.

완전히 계산이 빗나간 것치고는 호날두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경기 초반처럼 성배를 압도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너무 흥분한 감은 있습니다. 이러다가 사고 칠 지도 모릅니다.”

“음...”

지금 성배의 플레이는 팽팽하게 당겨진 실과 같았다.

그래도 이성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닌지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고는 있었지만,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태라면 언제 그 실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어!”

그리고 그때, 성배의 플레이에 호날두가 다시 한 번 굴렀다.

피지컬이 굉장히 좋아진 호날두였지만, 성배도 마찬가지였다.

호날두도 아직은 드리블러 스타일을 고수하느라 몸을 크게 키우지 않아서 그렇게까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마음 먹고 달려드는 성배를 쉽게 이겨낼 수 없었다.

“이번에는 휘슬이 울리지 않습니다! 주, 볼을 빼앗고 그대로 돌파 시도!”

다행히 이번에는 반칙이 선언되지 않았다.

바로 전에 옐로우 카드가 주어져서 그런 것인지 심판들이 살짝 봐준 듯한 느낌이었다.

어찌 되었든 반칙이 아니었고, 성배는 흥분한 기분 그대로 내달렸다.

“정말 경기 중간에 저 친구 때문에 이렇게 가슴을 졸여보는 건 처음인 것 같군.”

레드냅 감독의 말이 이 상황을 설명했다.

방금 전 플레이에서 정말 천운으로 반칙이 선언되지 않았지만, 까다로운 주심이라면 카드도 꺼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경고 한 장을 이미 받아놓고 여전히 거친 플레이를 보여주는 성배 때문에 감독과 코치들은 다시 조마조마해졌다.

부상으로 인해 속을 썩이긴 했지만, 원래 그라운드 위에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 선수였다.

하지만 오늘은 누구보다 속을 썩이고 있었다.

‘건들지 말라고.’

호날두를 넘어뜨리며 볼을 빼앗아낸 성배는 혼자서 거칠게 돌파해나갔다.

성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성배의 지금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만큼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오늘 보여주는 성배의 모습 자체가 굉장히 거칠고 정돈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아, 짜증나게!’

동작 하나하나가 굉장히 커져 있었다.

성배의 돌파를 막기 위해 깁슨이 달려들었는데, 성배는 팔을 뒤로 크게 휘두르며 깁슨의 방해를 뿌리쳤다.

모든 플레이가 이랬다.

주심의 성향을 파악하고 시야를 계산해 교묘하게 플레이했던 원래의 모습과는 달리 오늘의 성배는 아슬아슬한 느낌이었다.

“깁슨도 떨어져 나갑니다! 주의 시원한 돌파! 오늘 처음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지금까지 계속 호날두에게 묶여 수비만 했던 성배였다.

당연히 답답함이 쌓여 있었다.

그 답답함을 한 번에 풀어버리려는 듯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거칠게 달려나가는 성배를 아무도 막아서지 못했다.

특히나 호날두의 뒤에 버티고 있는 선수들은 모두 백업 선수들이었기에 더했다.

이성을 잃은 사람을 상대로 정면 대결을 펼쳐서는 원래 승산이 없는 법이었는데, 다행히 모든 맨유 선수들은 정면으로 맞붙어주었다.

“주, 마지막까지 돌파 시도! 이건 좀 무리인 것 같은데요!”

깁슨까지 멀리 떨쳐낸 성배는 마지막 수비수인 오셔와 부딪혔다.

잠시 멈춰서 고민했지만, 이번에도 돌파를 이어갔다.

‘나도 할 수 있다고!’

살짝 무리한 돌파 시도이기는 했다.

하지만 오셔의 스피드가 부족했기에 그나마 돌파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오셔는 성배의 스피드를 따라오지 못했고, 그 덕에 조금씩이나마 돌파가 이뤄졌다.

‘잡지 마!’

스피드에서 밀리고 피지컬에서까지 밀려버린 오셔는 다급해져서 성배의 유니폼을 잡아당겼다.

성배 역시 오른손으로 오셔의 복부 쪽 유니폼을 잡고 끌어내렸다.

두 선수의 팔이 교차되어 서로의 유니폼을 잡아 내리고 있었다.

‘잡지 마라. 나도 이제 괜찮은 선수라고!’

오른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오셔 역시 더욱 강하게 유니폼을 잡아당기며 맞불을 놓았다.

두 선수의 유니폼이 찢어지기 직전까지 늘어났다.

“오셔가 먼저 넘어집니다!”

성배의 의지가 한 수 위였다.

오셔는 그대로 앞으로 넘어졌고, 성배는 가까스로 균형을 유지한 채 돌파를 이어갔다.

‘나도 정말 열심히 했다고!’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거기에 16년의 경험이 더해졌다.

항상 자신을 낮게 평가했던 성배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자기 자신에게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호날두에게 몇 경기 째 계속 압도당하면서 그 프라이드에 상처를 입었고, 다시 과거의 모습이, 패배의식에 젖어있던 그 모습이 드러나려했다.

‘이제 더 이상 실패한 선수가 아니야!’

그리고 그것은 마음 한구석에 숨어있다가 성배가 약해진 틈을 타 방어막을 찢고 뛰쳐나왔다.

오늘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다시 과거로 돌아갈 것임을 성배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처절하게 뛰었다.

“그대로 진행하나요?”

평소였다면 심판의 반응부터 살폈을 성배였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플레이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성배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주심에게로 향했다.

< 낭만필드 - 169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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