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168화 (122/356)

< 낭만필드 - 168 >

“UEFA컵을 포기하면서까지 준비한 칼링컵이다. 무조건 이겨서 팬들에게 부진에 대한 용서를 받아야 한다.”

2009년 3월의 첫날.

한국에서는 3.1 운동을 기억할 때, 토트넘은 이번 시즌 가장 중요한 경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경기를 준비했다.

샤흐타르와의 UEFA컵 16강 경기를 백업 선수들 위주로 치러 거의 포기하다시피 해 탈락하면서까지 준비했을 정도로 중요한 경기였다.

“지난 시즌에도 우린 이 칼링컵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팬들의 용서를 받았다. 이번 시즌에도 마찬가지다. 지난 시즌보다는 그나마 조금 낫지만, 우린 여전히 기대에 못 미치는 순위에 그쳐 있다. 최소한 칼링컵 우승 트로피라도 들어야 팬들에게 용서받을 수 있다.”

바로 2008/09시즌 칼링컵 결승전 경기였다.

지난 시즌, 칼링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9년 만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던 토트넘은 이번 시즌에도 결승에 진출, 2년 연속 칼링컵 결승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레드냅 감독 부임 이후 분위기가 좋을 때 4강까지 진출했고, 번리가 까다로운 상대인 아스날을 8강에서 잡아 준 덕분이었다.

“맨유는 물론 부담스럽다. 하지만 맨유도 최근 타이트한 일정 때문에 살짝 기세가 꺾여 있다. 너희들도 봤겠지만, 오늘 선발 명단도 주전 절반에 나머지는 후보 선수로 구성되어 있으니 100%의 전력도 아니다.”

칼링컵 결승에서 토트넘을 기다리고 있던 팀은 바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전반기 맞대결에서 토트넘을 농락했고, FA컵에서조차 토트넘의 다음 라운드 진출을 막아 세웠던 바로 그 팀이었다.

이번 시즌 상대전적 전패에 지난 시즌에도, 그 지난 시즌에도 항상 토트넘보다 위에 있던 클럽이었기에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성배가 생각하기에도 오늘 경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그래도 토트넘 쪽에 조금이나마 웃어주는 것은 챔피언스리그와 FA컵, 리그까지 병행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주전 선수들을 아꼈다는 점이었다.

비디치가 출전하지 않았고, 루니, 긱스, 박인진, 플레처, 캐릭, 베르바토프 역시 빠졌으며, 심지어 골키퍼도 부동의 NO.1 반 데 사르가 빠지고 NO.2인 쿠쉬착도 아닌 NO.3의 벤 포스터가 출전했다.

맨유가 칼링컵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선발 명단이었다.

‘그래도... 호날두랑 테베즈는 출전했으니...’

하지만 호날두와 테베즈, 이 두 선수가 출전했다는 것만으로도 결코 쉽게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두 선수 외에도 로테이션으로 밀렸지만 여전한 센스를 보여주는 스콜스가 출전해 있었다.

백업이라고 해도 웰벡, 나니, 에반스, 깁슨 등 재능 있는 어린 선수들로 구성되어 토트넘을 압박했다.

맨유의 두터운 선수층이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후우, 또 호날두인가.’

그리고 성배 개인적으로도 부담스러운 경기였다.

아약스 시절, 호날두를 완벽히 묶어버렸던 그 날 이후 호날두는 자신과 만나면 진지하게 달려들었다.

그 어떤 방심도 없었다.

‘쥐뿔도 없으면서 건방지기만 할 때가 상대하기 좋았는데.’

바로 그 시즌 후반기에 대폭발하며 월드클래스로 올라섰고, 지난 시즌에는 리그에서만 31골을 넣으며 스물세 살의 나이에 발롱도르 트로피까지 타낸 호날두였다.

그런 그가 이젠 방심도 하지 않았다.

기량도 미숙한 데다가 방심까지 한 틈을 타서 한 번 막아냈다는 이유만으로 성배는 최고 상태의 호날두와 매번 맞부딪혀야 했다.

‘기회가 있을 때 최대한 많이 붙었어야 했는데.’

안더레흐트 시절, 챔피언스리그에서 로번, 호아킨, 가르시아 등 뛰어난 윙어들을 상대로 끈질기게 달라붙으며 이름을 알렸던 성배가 본격적으로 빅클럽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맨유와의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면서부터였다.

차기 발롱도르 후보라 주목받던 호날두를 막아낸 덕분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호날두는 그 이후 가파른 성장세로 발롱도르 위너가 되었고, 성배도 성장하긴 했지만, 프리미어리그에서 알아주는 수준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앞으로는 점점 벌어지겠지.’

성배는 그때도 이미 호날두를 이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임을 알고 있었다.

프리미어리그 입성 이후 몇 번의 맞대결을 가졌었고, 그때는 첫 대결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언론들도 이미 두 선수의 관계에 흥미를 잃은 상황이었다.

2년 전 일로 두 선수의 관계를 설정하기엔 이미 그 위상에 너무 많은 차이가 있었다.

‘어차피 나한테 그 자리는 너무 과분했지. 뭐라도 된 것처럼 나대지 말자.’

호날두의 천적, 혹은 라이벌이라는 평가는 지나치게 과분했다.

16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온 후에야 겨우 유망주 시절의 호날두에게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호날두는 다른 세상 사람이었다.

‘날 왜 그렇게까지 의식하는 건지. 골치 아프네.’

그런데 호날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천적으로 유명한 애쉴리 콜 못지않게 성배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기량의 차이도 있는데 방심조차 하지 않는 호날두를 어떻게 막아야 할지, 방법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경기 전부터 상대와의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 성배의 스타일인데, 이럴 때는 경기 전부터 지고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또 그냥 박살 나더라도 들러붙는 수밖에 없겠어.’

호날두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대결을 펼칠 때마다 고민하지만, 그때마다 답은 똑같았다.

‘방법이 없으니 근성으로 맞붙는다!’는 열혈 만화나 쌍팔년도 한국 축구계에나 나올 법한 결론이 나오는 것이었다.

성배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기도 했다.

‘무력하다...’

이미 전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을 쌓은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만큼 상대하는 선수들 역시 차원이 달랐다.

고만고만했던 벨기에 2부리그 선수들보다 최고의 무대에서 뛰는 선수들의 기량 차이가 더 큰 느낌이었다.

더 높은 곳이 없기에 다른 세상에 사는 선수들이 같은 무대에서 뛰고 있었다.

***

선발 명단의 반 이상을 백업 선수들로 채운 맨유와 우승을 위해 베스트 라인업을 가동한 토트넘의 경기는 토트넘이 아주 미세하게 우위를 가진 채 진행되었다.

아무리 맨유이고 스쿼드가 두텁다고 하더라도 같은 프리미어리그 소속에 분위기를 다시 타기 시작한 토트넘을 상대로 백업 선수들이 우세한 경기를 펼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벌써 지친 건 아니지? 표정에 여유가 없는데?”

하지만 적어도 한 곳만큼은 맨유가 확실한 우위를 잡아나가고 있었다.

‘제길. 벌써 표정이 무너졌나.’

바로 성배와 호날두가 맞붙은 토트넘의 왼쪽 측면이었다.

호날두의 지적에 급히 표정을 정비했다.

심리전의 대가인 성배가 벌써부터 힘들어하는 표정을 들킬 정도로 호날두는 성배를 상대로 비교적 쉽게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스콜스, 오른쪽으로 띄워줍니다!”

그리고 맨유 역시 호날두를 중심으로 공격을 전개했다.

반대편 측면의 나니는 아직 단점이 너무 확실한 선수라 촐루카를 상대로 별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그래서 호날두의 공격 비중이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었고, 성배는 고생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놓쳤다.’

표정 관리를 지적받은 탓에 집중이 흐트러진 순간이었다.

스콜스의 패스에 반응이 늦었고, 이미 출발한 호날두를 막아내긴 힘들었다.

반칙으로 끊으려 해도 이미 눈치챘는지 멀리 돌아가고 있었다.

“호날두, 중앙으로 꺾어주고, 도슨이 걷어냅니다!”

다행히 도슨이 막아준 덕분에 크게 위험한 상황을 맞이하진 않았다.

오늘 경기가 평소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대부분의 경기에서는 성배가 1인분 이상의 활약을 펼쳐주며 동료들을 도왔는데, 오늘은 성배의 부진을 다른 동료들이 메워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늘따라 내 마음대로 플레이가 안 되는데. 생각이 많아서 그런가.’

성배는 오늘 자신의 플레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호날두는 분명 대단했다.

최고가 괜히 최고인가?

자신이 최고의 컨디션이었어도 쉽게 막아낼 수 없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오늘 자신의 플레이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컨디션은 나쁘지 않은데.’

컨디션 문제는 아니었다.

스피드나 반응 속도 등은 평소와 같았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상대의 움직임을 읽어내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한 박자 빠르게 움직이질 못했다.

자신의 최대 장점이 발휘되지 않은 것이었다.

“오늘 왜 이래? 평소랑은 좀 다른 것 같은데. 어디 안 좋은가?”

호날두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그는 벌써 성배가 평소와 다름을 눈치챈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호날두가 다른 선수들에게 전달해 자신에게 더욱 볼을 집중시킬 것이었다.

‘상황이 좋지 않은데...’

이래저래 좋지 않았다.

그나마 맨유가 유망주 위주의 라인업을 들고나와 자신을 제외한 동료들은 여유가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미 실점하고 끌려가는 중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다시 오른쪽으로! 호날두, 또 한 번 돌파에 성공합니다! 그대로 중앙으로 크로스! 킹, 머리로 먼저 걷어냅니다!”

이후에도 성배는 호날두를 상대로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성배의 컨디션이 좋지 않고 호날두를 전혀 감당해낼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자, 맨유의 공격은 당연히 오른쪽으로 집중되었다.

‘제기랄.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회귀 이후 처음으로 경험하는 무력감이었다.

지금까지 살짝 고전했던 적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이 자리에 올라서기까지 승승장구해왔던 성배였다.

물론 좌절 경험은 많았다.

하지만 계속된 성공으로 인해 낯선 느낌과 함께 짜증이 치솟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기회를 얻어내고도 고작 이 정도라는 건가. 최고가 되겠다는 것도 아닌데.’

성배답지 않은 사념들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평소였다면 호날두를 상대로 이 정도 부진했다고 멘탈이 흔들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어차피 호날두는 다른 세계 사람이었고, 그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자신의 그릇과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 누구보다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그것이 성배의 장점이었다.

‘너무한 거 아닙니까. 다시 살게 해주셨으면, 뭐 하나라도, 초능력이든 피지컬이든 뭐라도 주셨어도 좋지 않습니까.’

기어이 초월적인 누군가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다른 것보다 상대가 호날두라는 사실도 성배를 흔들었다.

세계 최고의 선수이자 이번 발롱도르 수상자인 호날두가 자신을 신경 써준다는 사실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자부심을 느꼈던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작 이 정도로 그 단단한 멘탈이 흔들릴 리 없었다.

“뭐야? 왜 그러고 있어?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성배에게 꽤 관심이 많은 호날두가 가장 먼저 성배의 이상을 알아챘다.

아무리 밀려도 여유로운 표정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심리전을 걸어왔던 성배였다.

여유를 잃은 성배의 모습을 처음 본 호날두는 성배가 평소와 같지 않음을 눈치챘다.

“...”

평소였으면 여기서 평소와 다른 모습을 의도적으로 보이면서 심리전에 우위를 가져가려 노력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성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호날두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다고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당연히 자신보다 나은 선수이고, 고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는데, 정작 그 앞에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자 자존심이 상했다.

세계 최고의 선수를 상대로 자존심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 낭만필드 - 168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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