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67 >
“다시 원터치 패스! 베일!”
그리고 성배 역시 오른발 아웃프론트를 활용해 원터치 패스로 베일에게 볼을 넘겨주었다.
성배에게서 시작한 2대1 패스가 베일에게 이어지는 2대1 패스로 마무리된 것이었다.
‘이런!’
성배의 장점이 킥이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준비된 킥에 한정된 것이었다.
피나는 노력으로 반 박자 빠른 킥, 준비되지 않은 킥에서도 정확도를 유지했지만, 지금과 같이 트릭적인 면이 강한 킥은 성배의 전공이 아니었다.
“베일, 엄청납니다! 중앙에서 슈팅!!”
하지만 베일은 베일이었다.
성배의 패스가 살짝 길어져 받아내기 힘들었음에도 중앙에서 대기하며 내려온 데니우손보다 먼저 볼을 따낸 것이었다.
괴물 같은 스피드가 다시 한 번 발휘되었다.
“아쉽게 뜨고 마는 슈팅! 크로스바 위를 훌쩍 넘어갑니다.”
아쉽게도 아직 오른발에 익숙하지 않은 베일의 슈팅은 크로스바를 넘어가고 말았다.
베일에게 돌려준 성배의 패스가 불친절했던 것도 슈팅이 정확하지 못했던 이유였다.
“미안하다. 패스가 좀 길었어.”
자신의 플레이가 아쉬웠던 성배는 바로 베일에게 사과했다.
타고난 발밑 감각의 한계인지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짧고 화려한 패스는 쉽게 발전하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을 보면 이 정도가 한계인 듯싶기도 했다.
“나쁘진 않았으니까 됐지, 뭐. 이렇게 이어진 것도 대단한 거니까.”
베일은 별것 아니라는 듯 간단히 넘겼다.
사실 성배만큼 친절한 패스를 보내주는 선수도 몇 없었다.
비록 1군 무대에서 주전급으로 활약하는 것이 처음인 베일이지만, 1군 무대에서만 그럴 뿐이었다.
모든 선수가 그렇듯 축구계에 들어온 지 10년이 훌쩍 넘었고, 그동안 성배처럼 편안한 패스를 보내주는 선수는 없었다.
“그래도 아쉽긴 아쉽다. 주도 그렇고 나도 움직임 좋았는데.”
“또 한 번 만들어야지.”
비록 득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토트넘의 페널티박스 부근에서 볼을 따낸 이후 돌파한 성배의 움직임과 2대1 패스를 두 번 중첩한 두 선수의 호흡이 굉장히 좋았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웠다.
들어가기만 했다면 이번 라운드는 물론 이번 달 베스트 골도 노려볼 수 있었을 정도로 멋진 플레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럼. 열심히 달릴 테니까 한 번만 제대로 찔러줘.”
성배의 복귀 이후로 플레이가 살아나기 시작한 베일은 신이 난 듯했다.
실제로 표정도 굉장히 좋아져 있었다.
기분이 좋아지니 당연히 플레이도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토트넘의 공격도 아스날 수비진을 쉽사리 뚫어내진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분위기는 토트넘 쪽이 좋은 것으로 보입니다.”
“양 팀 모두 답답한 경기를 펼치고 있지만, 그래도 공격하는 쪽은 토트넘이고, 골을 넣어야 승리하는 스포츠인 만큼 경기는 공격하는 쪽이 유리할 수밖에 없어요.”
똑같이 답답한 경기를 펼쳐도 유리한 쪽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토트넘이 그랬다.
토트넘의 단단한 수비와는 별개로 공격진의 힘 자체가 떨어진 아스날과 달리 토트넘은 평소보다 못할 뿐, 어느 정도의 힘은 갖추고 있었다.
“아스날, 지금 북런던 더비에서 3연패를 거두고 있는데, 오늘마저도 패배하면 정말 큰일 납니다. 오늘 경기는 꼭 잡아야 하는데 분위기는 좋지 않습니다.”
“아스날이 북런던 더비에서 세 경기 연속으로 패배했던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요, 이렇게 가다가는 4연패까지 연패 기록이 이어질 것 같은 상황이죠?”
지금까지의 3연패는 그나마 2군과 유망주 위주로 출전한 지난 시즌 칼링컵 4강전 두 경기가 포함되어 있었기에 팬들이 힘들게나마 넘어가 준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까지 패배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4-1로 앞서다 4-5로 역전당한 지난 홈경기에 이어 원정경기에서까지 패배하며 이번 시즌 리그 맞대결 전패를 기록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토트넘이 결승에 올라있는 칼링컵에서는 아스날이 탈락했고, 아스날이 16강에 오른 FA컵에서는 토트넘이 탈락했기 때문에 오늘이 이번 시즌 마지막 북런던 더비입니다. 오늘마저 패배한다면 아스날은 이번 시즌 북런던 더비를 전패로 마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스날, 이대로 무너지나요? 아직 경기는 0-0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아무래도 아스날 쪽의 분위기가 좋지 않아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네요.”
화이트 하트 레인, 토트넘이 홈구장인 이 곳의 분위기는 점점 달아올랐다.
경기 분위기는 그 누구보다도 팬들이 가장 잘 알았다.
축구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관중들의 분위기와 기분을 보면 그 경기를 누가 주도하고 있는지 바로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정확했다.
“모드리치, 중앙으로! 데포가 파고들지만, 갈라스의 태클! 골라인 넘어가면서 토트넘의 코너킥이 선언됩니다.”
공격진과 미드필더진에서 부상자가 대거 발생하며 전력에 큰 공백이 생겨버린 아스날이었다.
그나마 그런 아스날이 승리는 거두지 못하더라도 무승부로 아득바득 승점을 따내는 것은 수비진 덕분이었다.
다행히 수비진에서는 이탈이 없었다.
“아스날, 경기가 잘 풀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실점은 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클리시와 사냐의 양쪽 사이드, 그리고 갈라스와 투레의 최후방 라인까지. 아스날의 수비력은 굉장히 좋아요. 경기가 잘 풀리지는 않지만, 분위기를 내줘도 쉽게 실점하지는 않고 있거든요?”
아스날의 포백 라인은 어디에 내놓아도 밀리지 않았다.
포백 라인을 보호해줄 미드필더의 부족은 비에이라의 이적 이후 항상 아스날의 약점이 되었다.
예를 들면 첼시의 마켈렐레나 에시엔 같은 역할을 해줄 선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약점 때문에 실점률은 좀 높은 편이었지만, 수비수 개개인의 능력만큼은 뛰어난 편이었다.
‘측면이 죽으니까 힘드네.’
특히나 아스날 수비진의 장점은 사냐와 클리시가 담당하는 측면 수비에 있었다.
양 선수 모두 프리미어리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가볍게 꼽히는 선수들이었다.
재능만큼은 최고이지만 아직 미숙한 베일과 스피드에 비해 플레이가 투박한 레넌이 공격의 중심이 되는 토트넘으로서는 반갑지 않았다.
‘세트피스를 살려야겠어.’
모드리치와 데포가 얻어낸 코너킥은 그래서 중요했다.
아스날 수비진의 장점은 스피드에 있었다.
중앙 수비수인 투레와 갈라스 모두 측면 수비까지 담당할 수 있을 정도로 스피드가 뛰어난 편이었다.
클리시와 사냐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단점도 확실했다.
‘세트피스는 우리가 확실히 우위에 있어.’
언제나 아스날과의 경기에서는 세트피스에 더욱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아스날의 두 가지 단점을 꼽으라면 높이와 리더십의 부재를 꼽을 수 있었다.
투레와 갈라스 모두 180cm 초반의 단신이었고, 토트넘은 프리미어리그에서 평균 신장이 큰 편에 속했다.
“도슨, 우드게이트, 허들스톤까지 모두 박스 안으로 들어옵니다. 아스날, 위기를 맞이합니다.”
“아스날 수비진은 미드필드에서 1차로 저지가 되지 않아 실점하는 경우가 많지만, 세트피스에서의 실점도 리그 내 상위권을 달릴 정도로 높이에 약점이 있거든요? 토트넘은 이 부분을 공략하려고 할 거예요.”
경기가 잘 풀린다고 할지라도 세트피스에 힘을 주었을 토트넘이었다.
그런데 경기까지 잘 안 풀리니 당연히 세트피스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높이 띄우는 게 나으려나.’
갈라스와 투레는 신장이 작고 점프력으로 신장을 커버했던 칸나바로와는 달리 점프력이 엄청난 편인 것도 아니라서 높게 띄워주는 볼에 약점이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노련미와 경험으로 커버했기 때문에 아주 구멍 수준도 아니었다.
그래서 차라리 적당히 낮고 빠르게 띄워서 동료들이 점프할 필요가 없게 올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음?’
그때, 성배의 눈이 반짝였다.
빈틈을 찾은 것이었다.
“주심의 경기 재개 휘슬! 주, 볼을 향해 달려와서... 아! 바깥으로!”
성배는 볼을 바깥으로 빼주었다.
자신들의 약점을 알고 있는 아스날 선수들은 박스 안에서의 공중볼 경합에 지나치게 정신이 팔려있었다.
페널티박스 바깥에서 미드필더들의 2선 침투나 리바운드 슈팅에 대비해야 할 중원 요원들마저도 그러고 있었고, 그것이 성배의 눈에 띈 것이었다.
“모드리치, 달려들면서 슈팅!”
2선에서 대기하던 모드리치는 그 덕에 편한 상황에서 슈팅을 시도할 수 있었다.
송과 데니우손이 뒤늦게 달려와 봤지만, 이미 늦어있었다.
“빨랫줄 같은 슈팅으로 선취 골을 기록하는 루카! 모드리치! 리그 3호 골입니다!”
모드리치의 시원한 슈팅은 레이저와 같은 궤적으로 아스날의 골망을 갈랐다.
알무니아 골키퍼가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멍하니 지켜봐야만 했을 정도로 엄청난 슈팅이었다.
공중볼 경합에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던 아스날 선수들 모두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아! 주, 아스날의 빈틈을 제대로 찔렀어요! 정말 시야가 넓은 선수죠! 자세히 보면 모드리치는 물론이고 다른 토트넘 선수들도 잠시 당황한 모습이 보이거든요? 아스날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순간적으로 선택을 바꾼 것 같은데, 굉장히 과감했고, 결과도 좋았어요!”
약점이 있다는 것은 약점 그 자체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약점에 신경 쓰느라 다른 것들을 놓치는 것도 문제였다.
성배는 그 부분을 제대로 파고든 것이었다.
“제공권에 약점이 있는 건 맞지만, 그래도 공중볼 수비는 수비수들에게 맡기고 자신들의 역할을 해줬어야 했어요. 하지만 아스날의 미드필더들, 송과 데니우손은 자신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박스 내 제공권 경합에 지나치게 정신을 팔고 있었고, 그 모습을 주에게 들키기까지 하면서 선취 실점의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아스날의 또 다른 약점, 리더십 부재가 여기서 나타나는 것이었다.
비에이라의 이적 이후, 아스날에는 마땅한 리더가 없었다.
그나마 앙리가 주장 완장을 찼을 때는 리더십이 아닌 본인의 기량으로나마 팀을 이끌었지만, 앙리까지 이탈한 뒤에는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
벵거 감독이 선수단의 유일한 리더가 되었다.
그리고 감독과는 다른 리더십으로 선수들을 하나로 모으고 그라운드 위에서 그들을 이끌어야 할 리더가 없다는 것은 아스날이 중요한 순간 미끄러지는 이유가 되고 있었다.
“멋진 선택이었어. 거기서 그런 선택을 할 줄이야.”
“뭘, 놀란 척이야. 가볍게 넣었으면서.”
순간적인 재치로 아스날의 빈틈을 파고든 성배도 성배지만, 갑작스러운 패스에도 흔들리지 않고 멋진 슈팅을 보여준 모드리치도 대단했다.
특히 허를 찌르는 목적이었기 때문에 패스가 느린 것도 아니었는데 가볍게 슈팅까지 이어갔다는 것이 더 대단했다.
“하하, 그럼 이렇게 4연승 가는 건가?”
“4연승이라...”
오늘까지 이기면 아스날을 상대로 4연승을 기록하게 되는 토트넘이었다.
치열한 라이벌 관계지만, 보통은 당하는 입장이었던 토트넘이었기에 더욱 기쁠 수밖에 없었다.
***
“푸하하하! 꺼져라! 꺼져버려! 다신 개기지 말라고!”
“이제 너흰 우리 상대가 아니라고! 어디 가서 라이벌이라고 하지 마라, 쪽팔리니까!”
“우우! 아스날 따위! 벌써 4년째 우승이 없는데 빅4는 얼어 죽을!”
성배와 모드리치의 호흡으로 선취 골을 기록한 토트넘은 그 골을 마지막까지 잘 지켜서 승리를 따냈다.
리그 여섯 경기 연속 무승 행진 이후 세 경기 연속 승리를 거두면서 리그 순위도 다시 9위까지 올라 UEFA컵 출전 티켓을 노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패배한 아스날은 패배한 것도 서러운데 아스날 구역으로 돌아가는 동안 승리의 기쁨에 취한 토트넘 서포터들에게 다시 한 번 버스 테러를 당하고 있었다.
‘경기에서 졌는데 또 저런 거 당하면 멘탈 무너지지.’
성배가 잠시 동정했을 정도로 비참한 광경이었다.
토트넘에 합류한 이후 북런던 더비에서 전승을 거두었기에 경험은 없었지만, 윤기표는 경험이 있었다.
그는 고개까지 저어가며 경기에서 패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저런 테러까지 당하면 그야말로 멘탈이 깨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오늘은 이걸로 끝이 아닐 것 같은데...’
저 멀리, 토트넘 구역과 아스날 구역의 경계가 보였다.
그런데 그쪽에도 일련의 팬들이 모여 있었다.
이쪽에는 하얀색 유니폼을 입은 서포터들이 신이 나서 버스를 향해 이것저것 던지고 있었고, 저쪽에는 붉은색 유니폼을 입은 서포터들이 성이 난 채 대기하고 있었다.
손에 이것저것이 들려있기도 했다.
북런던 더비 4연패에 성이 난 아스날 서포터들이었다.
< 낭만필드 - 16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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