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62 >
“크윽...”
베어드의 태클에 발목을 걷어차인 성배는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괜찮아? 많이 다친 거 아냐?”
베일이 가장 먼저 달려왔다.
자신의 플레이가 막히기 시작하면서 성배에게 점점 더 의지하고 있는 베일이었다.
성배의 부상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으으, 음... 멀쩡하진 않은 것 같은데. 크흠.”
사실 통증은 굉장히 익숙했다.
동반자와 같은 존재였고, 아버지, 어머니는 물론 자스민보다도 익숙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전생에서는 고등학교 시절 당한 부상 때문에 경기를 뛰고 나면 항상 통증이 따라왔었다.
한 번 경기를 뛰면 하루에서 이틀 정도는 제대로 뛰지도 못할 정도였으니 말이 필요 없었다.
그런 성배가 느끼기에도 작지 않은 통증이 느껴졌고, 오늘 경기는 물론 몇 주 정도 경기에 나서지 못할 것 같았다.
“벤치로 교체를 요청하는데요, 큰 부상인가요?”
성배의 표정이 비교적 멀쩡해 보였기에 부상의 정도가 크지 않다고 생각했던 중계진은 성배의 교체 요구에 당황했다.
중계진은 물론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많이 당황한 사람은 역시 레드냅 감독이었다.
에코토가 벤치 명단에 포함되어 있어 다행이었지만, 성배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엔 무리였다.
“아니, 들것은 됐고, 부축이나 해주세요.”
성배를 데리고 나가기 위해 들것이 들어왔지만, 거절했다.
들것에 누워 나가는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다.
마치 큰 부상을 당한 느낌이었고, 큰 부상이 아니었어도 큰 부상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걸어갈 수 있다면 걸어가는 것이 좋았다.
“의료진의 부축을 받으며 경기장을 빠져나갑니다. 왼쪽 발목을 저는 모습입니다.”
성배는 양쪽에 선 의료진의 부축을 받으며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그라운드를 벗어났다.
화이트 하트 레인을 가득 메운 토트넘 홈팬들은 그런 성배의 모습을 보며 얼굴에 아쉬움을 가득 채웠다.
“자네한테 주와 같은 움직임을 바라진 않아. 주가 해줬던 전진 패스, 그건 너도 충분히 할 수 있어. 전진 패스, 그리고 가끔 오버래핑도 좀 해주고. 그것만 해주면 돼.”
성배가 절뚝이며 벤치로 돌아왔지만, 레드냅 감독은 그런 성배를 맞이하러 가지 않았다.
누구보다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이 경기를 잡는 것이 더 중요했다.
성배를 대신해 투입될 에코토를 붙잡고 이런저런 지시를 내려야 했다.
“오늘 경기는 부담이 적으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다른 건 몰라도 네 킥력 만큼은 믿고 있다.”
성배에게 밀려서 그렇지, 에코토의 기량도 나쁘지 않았다.
전생에서는 지금 시점에서 몇 년 뒤에 EPL 레프트백 삼대장으로 꼽혔을 정도로 잠재력도 갖추고 있는 선수였다.
특히, 성배 못지않은 킥력을 기반으로 뿌려주는 대각선 패스와 얼리 크로스는 알아줘야 했다.
“괜찮아? 많이 안 좋은 거야?”
“아니, 뭐. 그렇게 안 좋은 건 아니고. 그냥저냥해요. 2-3 주 정도는 쉬어야겠지만.”
벤치로 돌아온 성배를 맞아준 사람은 구스타프 포옛, 일반 코치였다.
의료진은 성배의 발에 아이싱을 해주기 위해 급히 준비 중이었다.
“발목은 어때? 크게 다친 건 아니지?”
“저는 괜찮은데. 의료진에게 여쭤보시죠.”
에코토를 투입한 레드냅 감독은 급히 성배에게 달려왔다.
역시나 부상 정도가 가장 궁금했는지 그것부터 물어보았다.
“아주 큰 부상은 아닌데... 정밀 검사를 받아봐야 알겠지만, 최소 2주에서 길면 한 달까지는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제대로 된 검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조심스러웠지만, 의료진은 대략 2주에서 4주 정도 회복 기간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리 큰 부상은 아니어서 다행이었지만, 박싱데이 일정이 절반도 더 남아 있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었다.
“병원 가야지?”
“경기 끝나고 가겠습니다. 뭐, 한두 시간 빨리 간다고 달라질 것도 없으니.”
성배는 벤치에 앉아 경기를 지켜본 뒤, 경기가 끝나고 병원을 찾기로 했다.
그렇게까지 통증이 심한 부상은 아니었고, 일찍 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있는 부상도 아니었다.
‘슬슬 쉴 필요가 있기도 했지.’
성배의 체력과 지구력은 분명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내구성은 좋다고 할 수 없었다.
피지컬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이는 후천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었고, 타고난 골격 자체가 부상에 강한 편이 아니었다.
스트레칭과 필라테스, 크로스핏 등의 운동으로 유연성을 길러 많이 좋아진 편이지만, 호날두나 사네티, K리그의 전설 김부석처럼 타고난 강골이 아닌 이상 한계가 있었다.
‘요즘 안 그래도 무리하는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차라리 잘 된 건지도 모르지.’
부상의 위험성을 성배만큼 뼈저리게 느낀 사람도 몇 없었다.
평범한 수준의 내구성을 가진 몸으로 지금처럼 미친 듯 뛰어다녔다가는 큰 부상을 입게 될 확률도 낮지 않았다.
‘경기에 나가서 페이스를 조절할 정도는 아니니까.’
팀 내에서는 물론이고 리그 내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한 성배였지만, 아직은 모든 경기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성배의 장점이 공수의 밸런스, 그리고 적절한 상황에서의 적절한 플레이였기 때문이었다.
토트넘 이상의 클럽을 노리기 때문이기도 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선수생활에 부상은 당연히 따라오는 거니까.’
어쨌든 이번 부상으로 인해 부상 위험이 가장 큰 박싱데이를 무사히 넘길 수 있게 되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부상 자체는 절대로 반갑지 않았지만, 그래도 경미한 부상으로 위기를 넘겼다는 것에 만족하려 노력했다.
부상은 선수생활의 동반자였고, 6개월짜리 장기 부상 한 번보다 3-4주짜리 작은 부상 열 번이 훨씬 나았다.
‘절대 지난 생에서처럼 부상 한 번에 훅 가는 일이 일어나면 안 되니까.’
안더레흐트 시절, 성배를 고생시켰던 부상 트라우마는 분명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몸싸움 타이밍은 반 박자 정도 늦었고, 그 덕에 손해도 보고 있었다.
부상이 무서운 성배는 작은 부상으로 위험한 시기를 넘겼다는 것이 그나마 만족스러웠다.
***
“의료진의 말을 들어보니까 이제 경기에 뛰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던데. 어때?”
레드냅 감독은 성배를 감독실로 불렀다.
성배의 몸 상태를 체크하고 슬슬 경기에 출전시키기 위해서였다.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 완벽하진 않습니다. 며칠에서 길게는 일주일까지 좀 더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성배는 2주에서 3주 정도의 휴식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성배가 토트넘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했을 때, 큰 타격이었다.
“아직도? 의사들은 괜찮다던데?”
성배의 이탈 이후, 토트넘은 시즌 초반 이후 최대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나마 경기력은 괜찮았기에 경기력까지 최악이었던 시즌 초반과 비교하기 미안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성적 자체는 그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팀이 좀 어려워. 이젠 좀 복귀했으면 좋겠다.”
성배가 부상으로 빠진 풀럼전에서 0-0 무승부에 그친 토트넘은 최하위 웨스트브롬과 7위 위건과의 경기에서 2연패를 당했다.
FA컵 3라운드 위건전과 칼링컵 4강 1차전 번리전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리그 순위를 올리는 것이 더 급한 레드냅 감독은 이에 만족할 수 없었다.
“몸이 제대로 낫지도 않은 상황에서 제가 복귀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차라리 확실하게 완치된 뒤에 100%의 몸으로 돌아가는 게 훨씬 나을 겁니다.”
성배도 물러서지 않았다.
레드냅 감독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감독과 팀의 입장보다는 자신의 몸이 훨씬 더 중요했다.
팀과 감독을 위해 희생할 마음은 없었다.
‘어디서 수작이야.’
의료진의 진단은 진단이고, 자신의 몸은 자신이 판단하는 것이었다.
괜히 그들을 위해 희생하는 셈 치고 아직 뻐근한 상태에서 복귀했다가 부상이 악화되면 자신만 손해였다.
팀과 감독은 지금 위기를 봉합할 생각만 있을 뿐, 그로 인해 성배가 감당할 몫을 나눠서 감당하지 않았다.
“지금 팀이 워낙 안 좋다. 조나단도 없고, 리드도 없고. 주전 수비수 중에는 베르단 한 명만 뛰고 있다. 누구 한 명이라도 빨리 복귀할 필요가 있어.”
주성배-우드게이트-킹-촐루카.
리그 어떤 팀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수비진이었지만, 제대로 가동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토트넘 합류 후 처음으로 부상당한 성배는 그렇다 치더라도 우드게이트와 킹은 태그 매치라도 하는 것처럼 번갈아서 부상 당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리몸답지 않게 고작 네 경기 결장한 우드게이트였고, 나머지 경기들은 전부 킹이 결장했다.
우드게이트가 웬일로 건강하자, 킹이 그의 몫까지 대신 아파주었다.
“곧 조나단도 복귀하지 않습니까? 킹은 이미 지난 경기에 복귀했으니까 저 빼고 전부 복귀했네요. 저도 회복에 만전을 기해서 이번 주 안으로 복귀하겠습니다.”
성배는 끝까지 레드냅의 요구를 거절했다.
상황이 급했기에 끈질기게 부탁해왔지만, 그 정도에 흔들릴 성배가 아니었다.
‘나랑 한 판 붙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겠지.’
축구계에서 감독은 생각보다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팀을 대표하는 스타들도 감독과 대놓고 파워 게임을 벌이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은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성배는 아직 그 정도 위상이 아니었지만, 토트넘에서 그 위치에 가장 가까운 선수 중 한 명이었다.
나름 네임밸류가 있는 레드냅 감독이라도 강하게 나서기 힘들었다.
‘아직 이적시장이 열려있으니. 강권할 수도 없을 거고.’
게다가 지금 성배는 맨체스터 시티, 그리고 만수르, 심지어 맨체스터 시티의 서포터즈에게까지 큰 관심을 받고 있었다.
만수르는 바이아웃 금액을 지르는 것도 불사하겠다 밝혔고, 그가 바이아웃을 질러버리면 오로지 성배에게 선택권이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니 레드냅 감독도 성배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자신이 잘못해서 성배의 심기가 상하고, 팀에 애정이 떨어지게 된다면, 그 날이 팀을 떠나는 날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엄청난 비난에 직면할 것이 뻔했다.
“그래. 알겠다. 그러면 최대한 빨리 회복하도록. 괜찮아졌다 싶으면 바로 나한테 전해주고.”
“알겠습니다.”
성배의 판단대로 레드냅이 먼저 한발 물러났다.
다른 클럽들의 관심을 받는 핵심 선수를 건드리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레드냅이 아무리 잉글랜드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감독이라고 하더라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한두 경기 빠진다고 타격이 있을 만한 시기는 지났지.’
지금 성배의 위상은 한두 경기 빠지는 것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올라가 있었다.
에코토가 잘하고 있기는 했지만, 성배와 비교하면 손색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성배가 빠진 동안 팬들은 성배의 중요성을 더 크게 느끼고 있었다.
‘피로가 쌓인 몸도 원상태로 돌려놓고, 팬들에게 나의 중요성도 어필할 수 있다...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 하는 건가.’
이제 남은 것은 완벽하게 몸을 만드는 것, 그리고 복귀 후 좋은 활약을 펼쳐서 토트넘의 안 좋은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것뿐이었다.
가뜩이나 분위기가 가라앉아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복귀하고, 복귀 이후 좋은 활약으로 팀의 분위기 반전을 이끈다면 그것 또한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 낭만필드 - 16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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