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161화 (285/356)

< 낭만필드 - 161 >

“경기 끝났습니다. 토트넘과 맨유, 맨유와 토트넘의 17라운드 경기는 0-0 무승부로 끝이 났습니다.”

“굉장히 재미있는 경기였어요. 비록 골은 나오지 않았지만, 수준 높은 공방전이 오고 간 좋은 경기였죠?”

승패는 가려지지 않았다.

호날두를 앞세운 맨유의 공격은 굉장히 위협적이었고, 몇 번의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실점만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으며 버텼다.

토트넘의 공격진 역시 맨유의 수비진을 뚫지 못했지만, 무승부를 거두었다는 건 토트넘에게 웃어주는 결과였다.

“토트넘이 굉장히 잘 버텨주었어요. 경기 초반부터 맨유의 날카로운 공격이 이어졌는데, 뚫릴 듯 뚫릴 듯 불안한 모습은 보였지만, 실점만큼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겠다는 토트넘 선수들의 절박함이 좋았죠.”

우드게이트의 부상 이탈 이후, 토트넘 선수들은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으로 플레이할 수밖에 없었다.

수비진의 중심을 잡아주던 우드게이트가 그라운드를 떠났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부담이었다.

그리고 평소 킹과 우드게이트가 없으면 수비라인 조율의 역할을 맡아주었던 성배조차 호날두와의 맞대결만으로도 버거워서 라인 조율에 신경 쓰지 못했다.

“평소보다 살짝 투박한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까?”

“그런 부분은 분명히 있었죠.”

라인 조율이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 토트넘의 수비 전술 역시 투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선수들 사이의 거리나 역할 분담 등 여러 가지 부분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선수들 개개인의 파이팅이 아주 좋았어요. 킹과 우드게이트, 그리고 주의 뒤에 가려져 있었던 촐루카, 도슨, 허들스톤의 기량, 가능성이 한 눈에 보인 경기였다고 하고 싶네요.”

킹이나 우드게이트, 성배는 라인 조율에 일가견이 있는 선수들이었다.

이들과 함께하면 수비수 개개인의 능력보다는 이들의 라인 조율 능력만 주목받았다.

개인 기량보다 시스템에 의한 수비가 이루어지고, 시스템 수비 속에서 눈에 들어오는 몇몇 장면들은 이들 세 명의 차지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세 명의 선수가 각자의 이유로 일선에서 빠지게 되니 나머지 세 선수의 매력이 확연히 드러났다.

“물론 이 세 선수는 세 명의 수비 에이스에 비하면 부족한 점도 많아요. 촐루카와 도슨은 훌륭한 선수들이지만, 섬세함과 디테일이 아쉽고, 허들스톤은 아직 유망주죠.”

지난 시즌의 허술했던 수비진에게는 이미 안녕을 고했다.

토트넘이 이번 시즌 가지고 있는 문제는 지난 시즌에 리그 최강이라 했던 공격진에 있었다.

수비진은 고작 1년 만에 리그 정상급을 향해 가고 있었다.

에이스들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도 훌륭한 기량을 갖춘 덕분이었다.

“베일 선수를 위시해서 토트넘의 공격진도 이제 슬슬 올라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 힘을 받아 어느새 순위도 9위까지 올라왔고요. 이대로라면 토트넘이 기적을 이뤄낼 것도 같아요.”

오늘, 맨유와의 경기는 사실 결과가 좋았을 뿐, 내용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시즌 초반과 비교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경기력이 올라온 것도 사실이었다.

“오늘도 내가 이겼네. 내가 말했었지? 한 번이라도 나를 이겼다는 건 대대손손 자랑해도 좋을 일이라고.”

“...하. 오늘은 별로 할 말이 없다. 그래, 인정하지.”

언제나처럼 호날두가 말을 걸어왔지만, 성배는 언제나처럼 대답할 수 없었다.

오늘, 성배는 오랜만에 벽을 마주한 느낌을 받았다.

회귀 이후에는 느껴본 적 없었던 감정이었다.

“이런. 이러면 재미없는데. 너까지 이러면 재미가 없어진다고. 어떻게든 나를 잡아보겠다고 달려드는 사람이 많아야 재밌지. 내가 그래서 콜을 좋아하는 거야. 물론,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호날두는 분명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이미지는 그렇지 않지만, 그는 투쟁을 좋아하고 치열하게 살아가며 축구에 모든 걸 바친 사람이었다.

다혈질이라 원하는 대로 플레이가 되지 않으면 짜증을 내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이 지금의 호날두를 만들었다.

그래서 호날두는 콜이나 성배처럼 자신을 괴롭힐 수 있는 선수들을 좋아했고, 그들과의 대결을 즐겼다.

“앞서가지 마. 네가 나보다 위라는 걸 인정했을 뿐, 달라질 건 없어. 나와 너의 기량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한 거지. 그러니까 다음번엔 기대해도 좋아. 실망하지 않을 거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기대되는데?”

호날두는 이번에도 성배를 향해 유니폼을 내밀었다.

벌써 호날두의 유니폼만 세 번째였다.

국가대표 유니폼, 원정 유니폼, 홈 유니폼 전부 다 가지고 있었다.

‘다음번에는 내가 승자의 입장으로 유니폼을 내밀어주지.’

성배 역시 별말 하지 않고 자신의 유니폼을 내밀었다.

유니폼이 하나하나 쌓일 때마다 그를 향한 호승심이 커지기만 했다.

‘이제 기회가 많지 않아...’

호날두는 아마 이번에도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할 것이었다.

자신은 라리가로 따라갈 생각도 없었고,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는 자신이 이적한다고 해도 주전으로 뛰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호날두와 마주칠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고, 그를 다시 한 번 꺾어낼 기회도 몇 번 없었다.

“표정이 복잡하네. 무슨 일 있어?”

“아, 형. 아니, 뭐 별건 아니에요.”

라커룸으로 돌아가던 박인진이 성배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그 역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밝은 모습은 아니었다.

“호날두는 완전히 다른 세계 사람이야. 너무 그렇게 신경 쓰지는 마.”

성배가 벽을 느꼈다고는 하지만, 박인진 만큼은 아니었다.

박인진은 호날두의 경쟁자였고, 매일 옆에서 호날두를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얼마나 대단한 재능을 가졌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누구보다 좌절하기도 했을 것이었다.

“쟤랑 우리를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하면 스스로에게 좋지 않아. 정말 태어나길 다르게 태어난 사람이거든.”

박인진의 말에서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느껴졌다.

처음 맨유에 입단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호날두와 크게 다르지 않은, 수비가담이 괜찮다는 것만 빼면 공격적인 윙어였던 박인진이 왜 지금과 같은 스타일로의 변신을 꾀했는지를 알 것도 같았다.

“형. 그래도 나는 좀 달라요.”

하지만 성배 역시 호날두처럼 출발점부터 달랐다.

그것이 재능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선수로서의 출발점일 뿐이었지만, 호날두에 못지않은 어마어마한 메리트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부분은 똑같았다.

그래서 더더욱 호날두에게 밀릴 수 없었다.

“난 내가 호날두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진심으로.”

성배의 확신에 찬 말에 박인진의 표정은 그닥 좋지 않았다.

상대와 자신의 역량 차이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줄 알고, 그 판단에 따라 상황에 맞게 플레이하는 것이 성배의 장점이었다.

호날두라는 높은 벽을 만나 그러한 판단력이 흐트러진 것이라 생각했고, 그것이 아쉬운 것이었다.

‘젠장. 다음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준다.’

박인진의 그러한 표정을 눈치챈 성배는 다시 한 번 전의를 불태웠다.

호날두만 만나면 분명 그 냉정한 판단력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이것이 장점이 될지, 아니면 독으로 작용할지는 조금 더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

“주, 왼쪽에서 빠르게 올라갑니다! 중앙으로 크로스! 휴즈가 한발 앞서 걷어냅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악명높은 박싱데이 일정이 시작되었다.

12월 26일, 토트넘은 풀럼을 홈으로 불러들여 리그 19라운드 경기를 가졌다.

“오늘도 토트넘의 경기력이 별로 좋지 못한 모습입니다. 주와 모드리치가 분전 중이지만, 딱히 위협적인 장면을 연출하진 못하고 있습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일방적으로 밀리기는 했어도 최선을 다해 마지막까지 달라붙었던 토트넘이었다.

비록 경기 자체는 밀렸지만, 투혼을 보여주었고, 그 경기를 기점으로 백업 선수들의 각성과 함께 위로 올라갈 것으로 예측한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두 선수는 잘해주고 있어요. 그런데 나머지 선수들이 너무 실망스럽네요.”

EPL의 일정은 그야말로 살인적이었다.

두 개의 컵대회뿐 아니라 리그 일정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고의적으로 흥행을 위해 크리스마스 즈음해서 빡빡하게 일정을 짜는 것이 EPL의 전통이었다.

칼링컵에서도 4강에 진출해 있고, UEFA컵과 FA컵까지 소화해야 하는 토트넘 선수들은 이미 지쳐버렸다.

“혜성처럼 나타났던 베일의 약발도 이제 떨어졌고, 베일의 약발이 떨어지자 시즌 초반, 극도로 부진했던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에요. 그때처럼 주와 모드리치 밖에 안 보이거든요?”

베일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선수였다.

그 약점을 눈치챈 상대 팀들은 베일에게 달릴 수 있는 공간을 주지 않는 것에 집중했고, 성배와 모드리치가 아무리 공간을 만들어주려 해도 어지간해서는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공간이 없어지자, 베일의 위력은 반감되었다.

“주와 모드리치는 여전히 잘해주지만, 오버페이스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어요. 리그는 물론이고 UEFA컵과 칼링컵까지, 너무 많은 경기에 출전하고 있거든요?”

성배와 모드리치의 혹사 논란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두 선수를 빼면 팀의 플레이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레드냅 감독도 이 둘을 도저히 빼지 못했다.

네 개 대회를 병행하는 시점에서 둘의 체력이 버텨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특히 주는 더 심각한데요, 수비에서도 중심 역할을 해줘야 하고 공격이 막히면 풀어주는 역할까지 맡아주고 있거든요? 정말 대단한 활약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걱정이 되네요.”

성배가 팀에서 맡는 역할이 지나치게 많았다.

모드리치 덕분에 롱패스에 대한 부담감이 좀 줄었지만, 모드리치를 제외한 나머지 미드필더들은 성배의 부담을 덜어주지 못했다.

게다가 베일이 막히면서 시즌 초반처럼 측면 돌파까지 성배의 몫이 되었다.

또 킹과 우드게이트가 위명에 걸맞게 번갈아 빠져주면서 성배의 수비 부담까지 가중시켰다.

“주도 슬슬 체력이 방전되는 모습이 보이거든요? 사람이면 저럴 수밖에 없어요. 주의 역할이 큰 만큼, 완전히 방전되기 전에 레드냅 감독도 대책을 세워야죠. 막상 다른 선수들의 경기력이 올라왔을 때, 주가 방전되면 올라갈 수 없어요.”

박싱데이는 모든 팀에게 힘든 일정이었다.

하지만 토트넘의 일정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맨유와의 경기 이후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와 UEFA컵 경기를 가졌고, 두 경기 모두 홈경기였다.

그다음 뉴캐슬과의 경기에서 1-2로 패배했고, 풀럼과 경기를 치르는 중이었다.

풀럼과의 경기가 끝나면 이틀 뒤 웨스트브롬과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박싱데이 일정이 끝났다.

맨유를 제외하면 15위의 뉴캐슬, 8위의 풀럼, 20위의 웨스트브롬으로 크게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모드리치, 다시 왼쪽으로. 주, 다시 한 번 돌파를 시도합니다!”

팀의 공격을 조율하는 역할의 모드리치도 성배에게 볼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성배가 아닌 다른 선수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플레이메이커 입장에서 가장 마음 놓고 볼을 전달할 수 있는 선수가 공격수도, 미드필더도 아닌 수비수라는 것.

이것이 토트넘의 현 상황을 대변했다.

“주의 빠른 돌파! 베어드, 태클! 앗! 깊습니다!”

성배에게 또 한 번 돌파를 허용한 풀럼의 라이트백, 크리스 베어드의 태클이 성배의 발목을 노렸다.

“아-악!!!”

그리고 성배의 비명이 화이트 하트 레인을 정적에 빠뜨렸다.

< 낭만필드 - 161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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