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60 >
‘대책 없는...’
일단 시간의 로스를 줄이기 위해 허들스톤의 몸을 뛰어넘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바로 앞에 누워버린 허들스톤 때문에 다리에 살짝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성배는 우드게이트가 아니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이거 늦겠다.’
그래도 이대로라면 호날두가 슈팅을 시도하기 전에 막을 수 없었다.
한 번 완전히 속아 넘어갔던 것도 문제였고, 허들스톤 때문에 시간이 지체된 것도 아쉬웠다.
‘어쩔 수 없지.’
허들스톤을 피해 점프했던 성배는 땅을 디딤과 동시에 앞으로 몸을 날렸다.
태클을 시도하기에 좋은 위치는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젠장.’
슈팅하기 좋은 위치를 잡기 위해 호날두가 움직였다.
성배에게 등을 돌린 자세였다.
성배의 태클은 자연스레 백태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미 백태클을 피할 순 없는 상황이었다.
호날두의 슈팅 기회이기도 했다.
카드는 무조건 나올 상황이었고, 조금만 거칠어지면 레드카드가 나올 수도 있었다.
“주! 뒤늦은 태클! 호날두, 그대로 쓰러집니다!”
성배의 태클에 호날두는 그라운드 위를 굴렀다.
성배처럼 자연스럽진 않았지만, 살짝 오버하는 연기는 호날두도 일가견이 있었다.
호날두는 저 멀리 날아갔고, 주심은 휘슬을 불었다.
“뒤에서 들어간 태클입니다. 살짝 위험한 태클이었는데, 부상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는 원래 무리한 태클을 잘 안 하는 선수인데요, 지금은 어쩔 수 없었죠? 허들스톤이 섣부르게 몸을 날렸고, 허들스톤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요.”
곧 슬로우 비디오로 성배의 태클 장면이 다시 재생되었다.
호날두가 몸을 돌렸고, 그 모습을 본 성배의 다리가 접히며 최대한 위험하지 않은 자세로 들어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태클 자체는 굉장히 위험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다리를 접으면서 최대한 위험하지 않게 하려는 모습이 인상적이네요. 그리고 볼을 먼저 건드렸어요. 태클 시도는 무리수였기에 파울이 선언되는 거 어쩔 수 없었지만, 태클 그 자체만 놓고 보면 깔끔했네요.”
“경고가 주어집니다. 지금은 꽤 위험했기 때문에 경고 한 장으로 막은 건 그나마 다행인 것 같습니다.”
“경고 한 장이면 싸게 막은 거죠. 최근 호날두 선수의 폼을 보면 지금과 같은 기회를 거의 놓치지 않거든요?”
주심은 성배에게 옐로우 카드를 꺼내 보였다.
마지막 순간, 발끝을 노련하게 움직여 볼을 먼저 건드렸지만, 태클 자체가 깊고 완전히 뒤에서 들어갔기에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을 감안했을 때, 성배가 아닌 다른 어린 선수였다면 십중팔구 퇴장을 당했을 것이었다.
“이미 판정 나왔으니까 연기하지 말고 일어나. 다들 눈치챘어.”
“뭔 소리야! 그딴 식으로 태클해놓고 연기라니!”
“이 자식, 이거 웃긴 놈이네!”
성배는 아직도 누워있는 호날두에게 다가가 한 마디 툭 던졌다.
팀 내 에이스인 호날두가 괴로워하자 놀라서 달려온 캐릭, 테베즈 등은 성배의 발언에 발끈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박인진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거짓말.”
“거짓말은 무슨. 여기 두 친구도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지. 같은 팀이니까.”
그라운드를 구르던 호날두는 성배의 말에 흠칫했다.
그리고 실눈을 뜨고 성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자신의 옆에 있던 박인진, 캐릭 등의 동료들 역시 쓴웃음 짓는 것을 보며 멋쩍게 미소 지었다.
“이런. 아직 멀었나 봐.”
“아직 멀었지. 특히 유럽에서 활약하는 아시아계 선수는 속이려고 하지 마. 그런 거 전문이니까.”
성배는 호날두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박인진도 파울 유도 부분에서만큼은 전문가였다.
애초에 성규한이나 채인호 같은 사기캐릭터가 아니고서야 아시안들이 유럽에서 정면으로 맞부딪히기는 힘들었다.
그럴 때 가장 편한 것은 파울을 유도해내는 것이었다.
“호날두, 부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주의 손을 잡고 일어납니다.”
“그래도 보기 좋네요. 호날두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맨유 선수들 역시 주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격려하는 모습이죠?”
호날두는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을 얻어냈다.
토트넘이 긴장할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호날두의 프리킥 역시 굉장히 위력적이었고, 위치까지 좋았기 때문에 화이트 하트 레인의 토트넘 팬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
“베일, 측면 돌파! 하파엘이 끈질기게 괴롭힙니다!”
호날두의 프리킥은 고메스의 선방에 막혔고, 경기는 여전히 0-0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우드게이트의 갑작스러운 부상 이탈로 맨유의 일방적인 분위기로 경기가 진행될 거라 생각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토트넘도 나름 잘 버텨주었다.
그 최전방에는 레넌과 베일의 양쪽 날개가 있었다.
“베일의 돌파! 아! 퍼디난드가 커버합니다. 스로인.”
“하파엘, 아직 조금 더 성장할 필요가 있어요. 상대가 리그 정상급 풀백인 주와 풀백 출신의 베일이라서 별 활약은 없지만, 공격력은 괜찮아요. 그런데 수비력의 문제는 아직 작지 않네요.”
1990년생으로 쌍둥이 형 파비우와 함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한 하파엘은 분명 재능이 넘치는 선수였다.
고작 열여덟의 나이에 맨유 1군에서 활약하는 것만 봐도 그 재능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다른 브라질리언 풀백 유망주들처럼 뛰어난 공격력에 비해 아직 수비가 완성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호날두를 수비하느라 바빠 성배가 공격에 가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평소만큼만 공격에 가담했다면 크게 고생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베일도 아직 순수 윙어로서는 크게 위협적이지 못한 모습입니다.. 주가 호날두 때문에 묶여있으니까 베일의 위력도 반감된 느낌이죠?”
“베일은 아직 백업이 필요한 선수죠. 모드리치가 열심히 받쳐주고는 있지만, 모드리치는 토트넘의 플레이 메이커라 중앙과 오른쪽에도 신경을 써야 하거든요? 베일과 함께 왼쪽 측면을 담당하는 주의 백업이 없다면 힘들어요.”
하파엘은 수비가 약한 선수였지만, 베일 역시 아직은 공격 옵션이 그리 많지 않은 선수였다.
성배가 도와주었다면 압도적인 한두 개의 무기를 활용해 하파엘을 멀리 보내버렸겠지만, 성배는 호날두에게 묶여 있었다.
“오늘 토트넘이 좋은 결과를 받아들기 위해서는 레넌의 분전이 필요할 것 같네요. 그나마 레넌이 있는 오른쪽에서 토트넘의 공격이 좀 풀리고 있죠?”
토트넘이 그나마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루트는 레넌이 있는 오른쪽밖에 없었다.
중앙에서 모드리치가 선방하고는 있지만, 원톱인 파블류첸코가 클로킹 모드를 풀지 않았기에 한계가 있었고, 왼쪽의 베일도 혼자서는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만능열쇠지만, 만능 땜빵에 불과한 오셔는 레넌의 스피드에 약간이나마 밀리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가는 패스가 비디치에게 끊깁니다! 캐릭에게, 캐릭 바로 전방 패스!”
하지만 그것도 비디치와 퍼디난드의 적절한 커버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스로인으로 공격을 재개한 토트넘의 패스가 비디치에 의해 끊겼고, 비디치는 바로 캐릭에게 패스했다.
맨유의 후방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해주는 캐릭이었다.
캐릭의 패스는 곧바로 전방을 향해 날아갔다.
“호날두에게 높게!”
양 팀 모두 득점이 급한 상황이었다.
어느새 경기도 종반에 접어들었고, 토트넘보다는 맨유가 조금 더 급한 시간대였다.
맨유의 제공권도 그리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롱패스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진짜... 높이도 뛰네.’
그리고 맨유의 타겟은 호날두였다.
지난 경기에서 성배의 제공권이 그리 뛰어나지 않음을 확인한 퍼거슨 감독의 지시였다.
벌크업 전의 호날두지만, 호날두는 그전에도 타고난 점프력을 활용한 제공권에 장점이 있었다.
성배를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성배에게 우세를 점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충분했다.
“호날두! 테베즈에게! 테베즈, 다시 리턴!”
‘이런!’
그쪽으로 워낙 독보적인 루니가 있었기 때문에 살짝 가려진 감이 있었지만, 테베즈 역시 1선과 2선을 오가며 공격 작업이 가능한 선수였다.
호날두의 볼을 받아주기 위해 측면으로 빠졌던 테베즈는 바로 호날두를 향해 리턴 패스를 넣어주었고, 떨어지자마자 출발한 호날두는 성배보다 한발 앞서있었다.
‘괜히 떴나.’
자리도 빼앗겼고, 점프력도 부족한데 괜히 함께 떴나, 싶었다.
땅에 발을 디딘 성배는 후회할 시간도 없이 급히 호날두의 뒤를 따라가야 했다.
“호날두, 빠른 돌파! 태클 피합니다!”
먼저 출발했기 때문에 한발 앞서있었던 호날두는 볼을 안쪽으로 확 꺾은 뒤, 따라 움직였다.
성배의 진로를 방해하며 그 앞으로 가로지른 것이었다.
‘이걸?’
성배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호날두의 움직임에서 자신의 앞으로 지나가려는 기미가 보이자, 바로 다리를 뻗은 것이었다.
하지만 호날두는 발에 걸리고도 손으로 땅을 짚으며 중심을 회복해 돌파를 이어갔다.
“뒤쪽으로, 베르바토프!!”
호날두의 중앙 돌파로 허들스톤이 달려왔고, 호날두는 허들스톤이 움직이면서 생긴 공간을 향해 파고드는 베르바토프에게 볼을 내주었다.
절호의 찬스를 맞이한 베르바토프는 마음먹고 강한 슈팅을 시도했다.
“아, 이게 뭡니까! 떴습니다! 크로스바 위로 날아가는 베르바토프의 슈팅!”
“전 소속팀에 대한 예의인가요? 옛정 때문에 봐준 건가요? 그게 아니고서야 설명할 수 없는, 어이없는 슈팅이죠!”
절호의 찬스에서 베르바토프가 때린 슈팅은 크로스바를 아득히 넘어가 토트넘 팬들 사이에 떨어졌다.
슈팅을 시도한 베르바토프는 물론 호날두나 도슨 등 맨유, 토트넘 할 것 없이 모두 탄식을 내뱉었다.
[베르바!! 베르바!! 베르바!!]
화이트 하트 레인을 가득 메운 토트넘 홈팬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머리를 감싸쥐고 있었는데, 지금은 베르바토프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분명 지난 시즌까지는 이것이 베르바토프를 향한 응원의 의미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이들의 목소리는 베르바토프를 조롱하는 목소리였다.
“아아, 토트넘 팬들, 야유보다 더한 환호로 베르바토프를 조롱합니다. 베르바토프, 굉장히 괴롭겠습니다.”
“토트넘과 베르바토프의 이별 과정이 그리 깔끔하진 않았거든요? 토트넘 팬들이 베르바토프를 미워하는 것도 당연하죠.”
이번 시즌, 토트넘 부진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베르바토프의 이탈이 결정적이었다.
마지막까지 베르바토프를 잡으려 했던 토트넘이 대체할 자원을 알아보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기에, 굳이 따지자면 클럽의 삽질이었다.
하지만 팬들 입장에서는 마지막까지 꼬장을 부려가며 팀을 떠난 베르바토프를 좋아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호날두에게 하루종일 털리는 게 내가 할 일이냐.’
베르바토프에게 야유가 쏟아지는 것과는 별개로 성배 역시 이 야유가 달갑지 않았다.
마치 자신에게 쏟아지는 야유처럼 느껴졌다.
호날두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발롱도르에 가장 가까운 선수다운 플레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날두, 득점이 되지는 않았지만, 멋졌습니다.”
“최근 가장 핫한 레프트백인 주성배 선수가 전혀 힘을 못 쓰네요. 그나마 주성배 선수였기에 이 정도라도 막아내는 것이지만, 호날두 앞에서는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어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성배의 플레이가 아주 형편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었다.
콜과 비교하면 호날두를 전혀 막아내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제길...’
테베즈에게 당했을 때는 애초에 포지션과 역할이 달랐다고 위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성배는 진짜 탑클래스와 자신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꼈다.
< 낭만필드 - 160 > 끝
ⓒ 미에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