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55 >
“완전히 다른 팀이 온 것 같습니다. 토트넘, 전반전과 후반전의 경기력이 판이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요?”
“정말 후반전의 토트넘은 완전히 다른 팀이네요. 전반전에 세 골을 실점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무기력하게 그냥 경기를 내주는, 최하위 팀에 어울리는 모습이었거든요? 그런데 후반전 들어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네요.”
볼턴전에서의 승리가 토트넘 선수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였다.
시즌 첫 승리였으니 상대가 누구이고 현재 순위가 몇 위이고를 떠나서 큰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늘.
형편없는 경기력을 보여주던 토트넘은 뒤늦게 힘을 받아 아스날을 상대로 한 원정 경기에서 4-1에서 4-4를 만들어내는 저력을 보였다.
“아스날도 이 경기를 이렇게 놓칠 수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90분에 딱 맞춰서 동점 골을 허용한 이후 수비를 그만두고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서고 있습니다.”
“아스날로서는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죠. 오늘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면 타격이 크거든요? 거너스들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겠지만, 승리를 거두기만 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아스날이었다.
홈인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에서 펼쳐지는 북런던 더비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들은 3위, 토트넘은 19위.
여기에 또 더해서 전반전 3-1, 후반전 4-1 리드.
절대로 승점 1점에 만족해서는 안 되는 경기였다.
“라인 지켜! 뒤로 물러나! 아데바요르 잡고!”
정신없이 밀려드는 아스날의 공격에 정신이 없는 도슨과 우드게이트를 대신해서 성배가 수비라인을 조율했다.
성배의 손짓과 외침에 포백라인과 허들스톤, 제나스의 중원 저지선 위치가 결정되었다.
“아, 아스날! 무뎌요! 무딥니다! 너무 일찍 축배를 터뜨렸습니다!”
90분까지 4-3의 리드를 잡았던 아스날이었기 때문에 수비를 강화하는 선수 교체를 단행한 상태였다.
공격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반 페르시와 나스리가 각각 디아비, 송과 교체되어 나갔고, 교체된 선수들은 이전 선수들보다 수비적인 스타일이었다.
게다가 경기 후반에 힘을 받을 수 있는 스피드 스타, 월콧까지 수비력에 강점이 있는 에보우에와 교체되어 나간 상황.
“무서운 기세로 공격하고는 있는데, 말씀하신 대로 너무 무디네요. 우직한 망치를 들고 찌르기 공격을 하는 느낌이에요. 묵직하기는 한데, 쓰임새가 잘못되었죠.”
당연히 공격의 힘이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모조리 올라와서 ‘우아악’하고 달려드는데, 토트넘 수비진은 큰 문제 없이 이를 막아냈다.
“파브레가스, 박스 안쪽으로 싸움을 붙여줍니다! 아데바요르, 헤더!”
중원에서 볼을 공급하는 파브레가스도 이 경기를 끌고 가는 것이 점점 힘에 부쳤다.
플레이메이커의 부담을 나눠서 짊어졌던 나스리가 그라운드를 떠났고, 믿고 볼을 넘길 수 있는 반 페르시마저 그라운드를 떠났다.
심지어 플레이메이커의 히든 카드라 할 수 있는 스피드 스타마저 떠나버렸으니 할 수 있는 것이 몇 개 되지 않았다.
시간도 없으니 그나마 남은 아데바요르를 활용한 제공권 싸움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고메스, 선방! 고메스가 손끝으로 펀칭, 막아냅니다!”
“이야, 방금 건 아스날이 조금 아쉽겠는데요? 빗맞은 헤더가 절묘하게 꺾였는데, 조금 느렸어요. 고메스 골키퍼의 반사신경을 뚫기에는 약간 무리였네요.”
추가 시간도 절반이 흐른 후반 47분.
절묘하게 빗맞은 아데바요르의 헤더가 고메스의 선방에 걸리고 말았다.
그리고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코너킥을 얻어낸 아스날은 센터백들까지 모두 올라와 마지막 세트피스를 준비했다.
“파브레가스, 크게 심호흡하며 숨을 고르는 모습입니다.”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거든요? 절대로 져서는 안 되는 경기이기 때문에 떨릴 수밖에 없죠. 급하게 처리해서 될 건 아니니까 차라리 시간을 좀 끌더라도 완벽하게 해내는 것이 나을 수도 있어요.”
아스날 선수들이 긴장하는 것만큼이나 토트넘 선수들 역시 긴장하고 있었다.
코너킥은 언제나 위협적인 공격 루트였다.
토트넘도 이를 막아내기 위해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가레스! 가레스!”
그리고 성배는 급하게 베일을 찾았다.
패스와 서포트를 받으면서 이번 경기를 통해 성배의 말이라면 일단 믿게 된 베일은 바로 성배를 향해 달려왔다.
“왜? 무슨 일이야?”
“너는 하프라인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어. 만약 나한테 볼이 오면 바로 찌를 거니까, 내가 볼을 잡을 것 같다싶으면 일단 달려.”
성배는 아직 승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가장 위협적인 공격 루트는 아직 체력도 생생하고 무지막지한 스피드를 가진 베일을 활용해 이뤄지는 역습이었다.
아스날이 반대편에서 코너킥을 얻어냈기 때문에 아스날 선수들 역시 그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멀리 때려줄 거니까 뒤에서부터 달리는 것도 괜찮아. 아스날 수비수들도 많이 나와 있으니까 아예 하프라인 밑에서부터 달려서 오프사이드에 걸리지 않는 것도 괜찮겠지.”
센터백들이 코너킥에 참여하기 위해 올라간 상황에서 뒤를 지키는 것은 두 명의 풀백과 데니우손이었다.
사냐는 전반전에는 레넌과 성배를 막아야 했던 데다가 후반전에는 베일에게 지나치게 고생했기 때문에 이미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베일이 마음먹고 달리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었다.
클리시는 어쨌든 반대편에 있었다.
“오케이. 시키는 대로 할게.”
“그래. 잘 부탁한다. 마지막으로 믿을 건 너밖에 없다.”
베일에게 볼이 이어지기만 한다면 80% 이상 득점으로 이어질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나머지 20%는 슈팅이 어색한 베일의 실수나 알무니아의 말도 안 되는 슈퍼 세이브가 나올 확률이었다.
“토트넘도 대부분의 선수들을 박스 근처로 불러서 마지막 고비를 넘기기 위해 애쓰고 있는 모습입니다.”
“제공권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레넌과 체력이 많이 남아있는 베일, 최전방 스트라이커 벤트를 제외한 모든 선수가 박스 근처까지 내려왔죠? 지금 토트넘 박스 근처에만 열다섯 명이 넘는 선수들이 모여 있어요. 그 정도로 중요한 상황입니다.”
토트넘 페널티 박스에 선수들이 바글바글 모여있는 지금, 드디어 주심의 휘슬이 울렸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파브레가스는 볼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달려들어 중앙으로 올려주었다.
‘튀어나와라...’
베일을 활용한 역습을 준비 중인 성배는 어떻게든 볼이 바깥으로 나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파브레가스의 코너킥이 토트넘 박스 안으로 들어왔다.
“실베스트리, 중앙으로 헤더! 도슨이 걷어내고!”
파브레가스의 코너킥은 반대편에서 쇄도하는 실베스트리를 향해 길게 날아왔다.
너무 길고 골라인 가까이 붙었기 때문에 직접 슈팅하지는 못했지만, 실베스트리는 박스 중앙 쪽으로 볼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주었다.
하지만 한발 앞서서 도슨이 머리를 가져다 대며 걷어냈다.
완전히 클리어 되지 않은 볼은 박스 경계선 부근에 떨어졌고, 허들스톤과 디아비가 떠올랐다.
“허들스톤! 디아비를 날려버리고 클리어! 모드리치에게!”
디아비는 허들스톤과 싸움이 되지 않았다.
제자리에서 피지컬을 활용해 경합을 붙으면 허들스톤을 이길만한 선수가 거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루카!”
볼이 허들스톤과 디아비를 향해 날아간 순간, 성배는 스타트를 끊었다.
저 볼은 토트넘의 것이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성배의 예상대로 허들스톤의 머리에 맞은 볼은 모드리치를 향했다.
“모드리치, 등진 채.. 아! 곧바로 패스! 왼쪽으로! 주!”
토트넘의 골대를 보면서 서 있던 모드리치의 시선에는 성배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성배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을 읽을 수 있었고, 덤으로 대략적인 위치까지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담긴 의미를 파악한 모드리치는 몸을 돌리지도, 볼을 트래핑하지도 않고 바로 오른발 아웃사이드로 방향만 바꿔서 성배에게 볼을 이어주었다.
“완벽한 패스! 토트넘, 역습기회!! 주, 달립니다!”
‘완벽해!’
묘기와도 같은 모드리치의 패스가 성배에게 이어졌다.
아크로바틱한 패스였지만 친절했다.
모드리치의 패스를 발밑으로 깔끔하게 내려놓은 성배는 바로 베일을 찾았다.
‘좋았어!’
베일의 움직임은 성배가 원한 바로 그것이었다.
측면으로 치우치지 않고 측면을 통해 중앙으로 올라가는 베일을 향해 성배의 발이 움직였다.
“끌지 않고 바로 패스! 베일!! 엄청난 스피드입니다!”
성배에게도 신경을 써야 했고 베일에게도 신경을 써야 했던 사냐는 성배의 패스도, 베일의 돌파도 막을 수 없었다.
사냐가 막을 수 없는 것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베일! 단독 드리블! 아무도 없습니다!”
성배의 패스 덕분에 베일에게 단독 찬스가 주어졌다.
데니우손은 스피드가 부족해서, 클리시는 거리가 멀어서 아직 도착하지 못한 상황.
알무니아는 골대를 버리고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제쳐버려.’
마음속으로 주문했다.
어차피 베일에게 섬세한 마무리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냥 스피드를 활용해서 볼 먼저 차 놓고 따라가는 것.
베일하면 모두가 떠올리게 될 ‘치달’이 지금 상황에서는 정답이었다.
“툭 차 놓고 제칩니다! 그리고 가볍게 툭! 골라인 넘었습니다!!!!!! 골! 골입니다! 토트넘, 기어이 역전을 해냅니다! 엄청난 경기! 대단합니다, 진짜로!”
“베일! 베일! 모드리치, 주성배, 베일로 이어지는 연결이 환상적이었어요! 그리고 본인의 최대 장점인 스피드를 활용해 골키퍼까지 제치고 가볍게 차 넣은 베일의 득점, 완벽한 작품! 이런 게 바로 작품이죠!!”
베일 역시 자신의 가장 큰 무기가 치고 달리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은 자신의 돌파 테크닉이 부족하다는 것 역시.
본능적으로 볼을 먼저 차 놓은 뒤 달린 베일의 돌파에 알무니아는 허무하게 벗겨져 버렸다.
“이 자식! 좋았어!”
이 넓은 에미레이트 스타디움 한구석에 초라하게 마련된 토트넘 원정 응원석으로 달려간 베일을 따라 모든 토트넘 선수들이 달려갔다.
성배가 1등이었다.
“좋았어! 멋있었다, 정말로.”
“하하, 패스가 좋았지, 뭐.”
성배와 베일은 어깨동무한 채 토트넘 원정 응원단을 향해 포효했다.
토트넘 팬들은 그런 두 선수에게 열광했다.
저러다가 얼굴에 피가 쏠려 터지면 어떡하나, 걱정될 정도였다.
“미친놈들! 거기서 역습이라니! 너희가 수비 안 해서 골 먹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됐어, 자식아! 골 넣었는데 뭔 핀잔이야!”
그리고 뒤이어 나머지 선수들도 도착했다.
몇 명은 밀려 넘어지고 몇 명은 휘청거리는 등 난리도 아니었지만, 아무도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런 것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토트넘!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것이 토트넘이 맞는 겁니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누가 이 팀을 보고 아홉 경기에서 겨우 1승, 그것도 지난 경기에서 첫 승을 거둔 팀이라 생각하겠습니까!”
“레드냅 감독 부임 이후 완벽히 다른 팀이 되었어요! 토트넘의 사라졌던 팀 컬러가 살아나네요! 토트넘 극장, 이게 토트넘의 매력이거든요? 영화를 상영하지 않는 토트넘은 토트넘이 아니죠!”
토트넘 극장.
말도 안 되는 경기를 자주 보여준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크게 앞서다가 동점이나 역전을 허용하는 경우나 반대의 경우, 혹은 엄청난 골이 오가는 난타전을 특히 자주 보여주는 것이 토트넘의 특징이었는데, 라모스 감독 재임 시절에는 무난하게 이기고 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레드냅 감독은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부임 두 번째 경기 만에 토트넘 극장을 재개장했다.
“4-1에서 4-5로 경기를 뒤집었습니다! 후반전 추가시간 4분도 이제 다 지나갔습니다! 아스날, 갈 길은 급한데 시간은 없습니다!”
“이 경기는 사실상 토트넘이 잡았어요! 아스날에게는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답이 없죠!”
아스날 선수들은 잠시 좌절하다가 바로 일어나 볼을 들고 하프라인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세리머니 중인 토트넘 선수들을 가리키며 주심에게 항의했다.
하지만 토트넘의 세리머니가 그렇게 긴 것도 아니었고, 추가시간 4분이 다 되어서 득점에 성공한 것이었기 때문에 남은 시간도 없었다.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에 자리한 관중들 중 토트넘 팬 2천여 명을 제외한 모두는 침묵에 빠져 들었다.
< 낭만필드 - 15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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