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52 >
[데이비드 벤틀리, “토트넘 부진은 조직력 부재 탓.”]
[조나단 우드게이트, “토트넘은 리즈의 길을 가고 있다.”]
[벵거 아스날 감독, “라모스 경질은 시기상조.”]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우디네세와의 UEFA컵 예선 1차전에서 패배한 이후, 토트넘 선수 몇 명이 공개적으로 팀과 라모스 감독에 대한 비판을 늘어놓은 것이었다.
이번 시즌을 앞두고 다수의 선수들을 영입하면서 팀이 갈라져 있던 것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우디네세전 패배 이후, 몇몇 선수들이 레비 구단주를 직접 찾아가 감독 교체를 건의했다는 루머까지 나돌았다.
루머가 진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루머를 들은 사람들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코몰리 단장을 경질하면서 라모스 감독에게는 조금의 시간을 더 주려 했던 레비 구단주도 어쩔 수 없었다.
[토트넘 라모스 감독, 전격 경질! 후임은 해리 레드냅.]
[라모스 대리인, “선수단에 배반당했다.” 라모스는 칩거.]
[레드냅 감독, “토트넘의 제안, 거절할 수 없었다.”]
크리스마스까지 임기를 보장해주겠다는 레비 구단주의 약속은 공염불이 되었다.
발언 후, 정확히 일주일 만에 라모스 감독 역시 짐을 싸야 했다.
선수단이 부진의 책임을 함께 져주길 원했던 라모스 감독은 일부 선수들이 구단주와 직접 면담을 통해 자신의 경질을 요구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고,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해임 결정보다는 시기와 방식에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토트넘 라모스 감독 경질, 정말 감독의 문제였나?]
[라모스 감독은 희생양. 문제는 토트넘의 시스템.]
[진짜 문제는 레비 구단주. 토트넘, 감독의 무덤이 되다.]
라모스 감독에게도 문제는 많았다.
토트넘의 감독직을 맡은 지도 어언 1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영어를 구사하지 못했고, 인터뷰 등지에서도 통역사를 대동해야만 대화가 가능했던 것이었다.
이는 팬들, 선수들과 유대감을 형성하는데 장애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자신감이 부족한 모습을 보이며 팬들을 불안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런 문제가 라모스 감독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전부터 토트넘 보드진의 현장 간섭은 문제가 되어왔다.
레비 구단주는 단장과 감독에게 권한을 나눠주면서 둘의 권력을 줄였고, 자신이 개입할 여지를 만들어놓았다.
축구인이 아닌 구단주가 과하게 개입하는 클럽이 좋은 성적을 낸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토트넘에 합류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좋은 감독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산티니 감독과 욜, 라모스까지.
감독들의 연이은 실패가 이어진 지금 이 상황에서 감독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구단주가 팀을 운영하는 방식의 실패가 이전의 웨스트햄, 뉴캐슬에 이어 또 하나 쌓였을 뿐이었다.
토트넘은 감독에게 모든 현장 권한을 위임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회귀했다.
“주! 라모스 감독 경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팬들은 주의 의견을 듣고 싶어 합니다. 이젠 한 마디만 해주시죠.”
몇 주 전부터 이어진 단장과 감독의 해임, 그리고 선수단의 내분과 항명 사태 등에서 성배는 한 발자국 물러나 있었다.
굳이 이를 언급하지 않았고, 항명도 하지 않았지만, 변호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팬들은 성배의 의견을 궁금해했다.
“제가 입을 열면 뭐가 변합니까? 이미 상황은 다 끝이 났는데 말입니다.”
이번 시즌, 토트넘에서 제 몫을 해주는 선수는 몇 명 없었다.
골키퍼 고메스와 수비수 우드게이트, 미드필더 모드리치, 레넌, 허들스톤, 마지막으로 성배.
이 정도가 끝이었다.
특히 수비와 공격 모두에서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준 성배는 지친 팬들에게 그나마 기쁨을 안겨주는 존재였다.
“그래도 한 말씀만 해주시죠.”
관심이 쏠린 만큼 팬들은 성배의 의견을 듣고 싶어했다.
어차피 다 끝난 마당이니 성배도 입을 열었다.
“뭐, 이미 늦었지만. 라모스에게는 불만도 있었습니다. 특히 언어 문제가 가장 컸죠. 1년이면 영어 배웁니다. 영어보다 복잡하다는 프랑스어도 반년 만에 배웠습니다. 생각만 있으면 간단한 대화 정도는 할 수 있죠.”
몸으로 하는 스포츠지만, 축구에서도 언어의 중요성은 굉장했다.
하지만 영어로는 간단한 인터뷰조차 못 하는 라모스 감독에게 경기 중 빠른 전술 변환, 선수와의 상담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수들이 뭘 잘한 건 아닙니다. 우리도 잘한 거 없죠. 동료들은 언론에 대고 불만을 말하기 전에 본인들의 경기력부터 끌어올려야 할 겁니다. 할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어차피 이번 시즌, 토트넘의 성적은 망했다.
지금부터 열심히 끌어 올려서 10위 정도까지만 올라가도 다행이었다.
시즌은 이미 망했으니, 팬들의 마음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음. 그럼 레드냅 감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은 감독입니다. 능력도 있고. 어떻게든 팀을 끌고 올라가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원론적인 대답이었지만, 진심이었다.
레드냅 감독은 포츠머스를 맡아 리그1부터 프리미어리그까지 승격시켰고, 지난 시즌에는 만년 하위 팀 포츠머스에게 FA컵 우승 트로피를 안겨주기도 했다.
정통 잉글랜드 스타일의 감독이었기 때문에 선수단도 휘어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제발. 이번엔 좀 오래갑시다.’
성배가 데뷔한 지도 어느새 4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안더레흐트에서 1년 반을 뛰면서 감독 두 명, 아약스에서 1년 반을 뛰면서 감독 두 명, 토트넘에서 일 년을 뛰었는데 벌써 감독 두 명이었다.
4년의 선수생활 동안 벌써 여섯 명째 감독을 맞이하게 되었다.
‘맨유나 아스날 선수들은 데뷔와 은퇴를 같은 감독과 하던데...’
성배도 이제는 같은 감독과 편하게 뛰고 싶었다.
***
“측면을 노려! 중앙으로 가지 마!”
새롭게 토트넘의 사령탑으로 부임한 레드냅 감독은 팀을 파악할 시간도 없이 첫 경기를 준비해야 했다.
결국, 볼턴과의 다음 라운드 경기는 라모스 감독이 만든 팀과 전술을 활용해 치를 수밖에 없었다.
“주, 모드리치에게 연결합니다. 절대로 볼을 빼앗기지 않는 모드리치!”
“토트넘에서 유일하게 활발한 라인이죠. 주와 모드리치로 구성된 토트넘의 왼쪽 측면, 여기만큼은 그 어느 팀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아요.”
수비가 완전히 박살 났지만, 공격만큼은 리그 최강이었던 토트넘이었다.
이번 시즌에는 그 역할을 왼쪽 측면이 해주었다.
팀은 바닥에서 헤매고 있었지만, 성배와 모드리치가 호흡을 맞춘 왼쪽 측면의 위력만큼은 엄청났다.
‘확실히 움직이기가 편해.’
모드리치에게 볼을 내준 성배는 전방으로 침투했다.
볼이 모드리치에게 들어가면 어지간해서는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 선수들은 자연스럽게 모드리치에게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긴 공간은 성배가 파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이 되었다.
‘지금쯤 패스가 오겠지.’
그리고 공간을 활용하는 능력만큼은 이미 리그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는 성배였다.
공간을 내줘놓고서 성배의 오버래핑에 얻어맞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겨놓고 생선이 무사하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은 수준이었다.
어느새 볼턴 수비진을 헤집고 뒷공간에 도달한 성배는 모드리치의 패스를 기다렸다.
“모드리치, 날카롭게 찔러주는 패스! 퍼스트 터치가 완벽합니다!”
이쯤 되면 패스가 올 것 같다고 생각하자마자 모드리치의 패스가 도착했다.
깔끔한 퍼스트 터치로 속도가 떨어지는 것을 방지한 성배는 스타인슨의 추격을 가볍게 뿌리치고 왼쪽 측면을 파고들었다.
“측면에서 크로스! 중앙으로, 파블류첸코, 헤더!!”
188cm의 장신인 파블류첸코는 제공권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비록 폼 자체가 떨어져 있었고, 언어가 통하지 않아 그라운드 위에서 고립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측면 돌파에 이은 크로스, 그리고 헤더, 이런 단순한 플레이는 그럭저럭 해주고 있었다.
“골! 골! 드디어 파블류첸코의 골이 터졌습니다! 리그 9라운드 만에, 이번 시즌 열두 경기 만에 잉글랜드 데뷔골입니다! 토트넘, 이번 시즌 처음으로 선취 골을 터뜨렸습니다!”
“토트넘이 선취 골 넣는 모습을 보기 위해 시즌 개막 후 무려 석 달을 기다렸어요. 눈물이 다 나네요.”
토트넘이 상대에게 리드를 빼앗아내는 것은 이번 시즌 프리미어리그 아홉 경기 만에 처음이었다.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잘해주고 있는 왼쪽 측면의 선수들이지만, 조금만 더 잘해주었으면 좋겠네요. 무리한 부탁을 하는 것 같아 미안하기는 한데, 지금 토트넘에서 믿을 선수들이 저 두 선수밖에 없어요.”
중계에서 해설자가 직접 이런 말까지 할 정도로 토트넘의 경기력은 최악이었고, 성배와 모드리치의 호흡은 완벽했다.
패스와 드리블 등 미드필더로서의 기본적인 능력치와 탈압박, 중거리 슈팅, 시야에 왕성한 활동량으로 수비가담까지 해주는 모드리치.
그리고 그런 모드리치에게는 없는 스피드를 앞세워 그가 만들어준 공간을 파고들며 빈약한 돌파력을 보완해주고 최후방에서 정확한 롱패스로 플레이 메이커로서의 부담감까지 덜어주는 주성배.
이 두 선수의 조합은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완벽한 조합이었다.
“감독까지 바꾸었으니 이젠 더 이상 할 것도 없습니다. 토트넘, 이제는 반격을 시작해야 합니다.”
“볼턴도 아직 리그 16위에 불과하거든요? 토트넘 입장에서는 레드냅 감독 부임 이후 첫 경기에서 첫 승을 거두면서 기분 좋게 다시 시작하고 싶을 거예요.”
라모스 감독 경질, 레드냅 감독 선임 이후 첫 경기.
토트넘 선수들은 자신들이 말한 것처럼 부진의 책임을 라모스 감독에게 돌리기 위해서라도 오늘 꼭 승리를 거두어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시즌 들어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선취 골을 넣은 이후에도 토트넘 선수들의 모습은 나쁘지 않았고, 이번 시즌 최고의 경기를 치러냈다.
“벤틀리의 돌파! 벤트가 중앙에서 파고듭니다! 중앙으로 크로스! 벤트, 슬라이딩!!”
“들어갔어요!! 대런 벤트!! 리그 4호 골!!”
“팀 내 최다 골을 기록해주고 있는 벤트가 4호 골을 터뜨리며 승부에 쐐기를 박습니다! 벤틀리도 오랜만에 자신의 역할을 다해줍니다!”
“이적료가 1,500만 유로거든요! 1,100만 유로의 주도 저 정도 활약을 펼쳐주는데, 아직 한참 부족해요! 이제부터 시작해야죠!!”
공격진에서 그나마 제 몫을 해주는 벤트도 후반전에 교체 투입되어 오랜만에 공격 포인트를 기록한 벤틀리의 어시스트를 받아 리그 4호 골을 신고했다.
파블류첸코와 벤트, 오랜만에 스트라이커들이 힘을 낸 토트넘은 2-0으로 볼턴을 잡아냈다.
9라운드 만에, 개막 이후 2개월하고도 반 만에 거둔 리그 첫 승이었다.
***
“가레스. 자네는... 풀백으로 뛰기엔 수비력이 부족해. 알고 있지?”
“예. 알고 있습니다.”
볼턴전에서 드디어 리그 첫 승을 신고하며 한숨을 돌린 레드냅 감독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팀을 만들기 시작했다.
할 일이 수두룩했다.
라모스 감독과의 불화로 모래알처럼 흩어진 선수단을 하나로 모아야 했고, 스쿼드의 지나친 변화로 삐걱거리는 전술도 재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오늘부터 자네는 윙어로 훈련에 참가한다. 수비력은 아쉽지만 스피드와 공격력만큼은 최고야. 나는 자네가 윙어로서 대성할 수 있다고 확신하네.”
가레스 베일의 포지션을 바꾸는 것이 레드냅 감독의 첫 번째 움직임이었다.
레프트백 포지션에는 성배라는 리그 정상급의 풀백이 버티고 있었다.
수비력에 문제가 많지만 스피드와 공격력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떨어지지 않는 베일을 후보로만 두기에는 아까웠고, 성배를 믿고 포지션을 변경할 수 있었다.
‘전생에서보다 빠른 변화군.’
원래 베일의 포지션 전향은 1년 정도 뒤에 이루어졌었다.
아코토가 주전 레프트백 자리에서 뛰었고, 확실한 믿음을 주지는 못했기 때문에 베일의 포지션을 섣불리 바꿀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성배가 있었고, 누구보다 잘해주고 있었다.
베일의 포지션 전향을 시험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었다.
‘베일이라면... 루카 못지않은 도움이 되겠지.’
베일은 모드리치와 다른 방식으로 성배의 움직임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었다.
베일의 스피드라면 분명 상대 수비진이 흔들릴 것이었고, 흔들리는 수비진에 쐐기를 박는 역할로는 성배만한 선수가 없었다.
‘잘해보자고. 가레스.’
이번 시즌 들어 처음으로 성배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 낭만필드 - 15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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