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49 >
중국의 정즈는 뇌진탕 이후에도 경기 출전을 강행했다.
하지만 본인 기량의 반도 보여주지 못했다.
중원의 핵심이자 팀의 정신적 지주인 정즈가 흔들리니 중국 대표팀도 함께 흔들렸다.
결과는 3-0, 벨기에의 승리.
중국은 동팡저우가 오랜만에 득점포를 가동했던 지난 뉴질랜드전에서도 무승부에 그치고 벨기에전에서도 참패를 당하면서 홈팬들의 야유를 받았다.
“아...”
벨기에는 1차전과 2차전을 치렀던 선양이 아닌 상하이로 옮겨서 뉴질랜드와의 경기를 준비했다.
그리고 당일, 성배는 반갑지 않은 인물과 마주했다.
“너 이 새끼...”
“지금 누구한테 이 새끼, 저 새끼 하시는 겁니까? 아니, 거예요?”
진현필이었다.
각 조의 마지막 경기는 승부조작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두 개의 경기장에서 같은 시간에 펼쳐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D조에 속해있는 한국 대표팀 역시 상하이에서 온두라스와 마지막 경기를 치르게 되어 있었다.
“너 때문에 내가...”
“말은 제대로 하셔야죠. 제 탓이 아니니까요. 어디까지나 선배가 잘못한 게 돌아온 거 아닌가요?”
최근 진현필의 상황은 이보다 더 나쁠 수 없을 정도였다.
기자회견부터 시작해서 한바탕 화제가 되었던 성배의 학창시절 이야기는 여전히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석영균이 날아갔지만, 그것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영원중-영원고 동기들의 증언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진현필이 주도한 축구부의 가혹행위들도 낱낱이 까발려졌다.
“이, 이...”
물론, 운동부의 똥군기는 이전부터 이어져 왔고, 일선 지도자들의 암묵적인 동의 속해 자행되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고, 일반인들은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한국 내 최정상급의 수비수 유망주였던 진현필도 그들의 질타를 피해갈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렇게 속으로 삭히지 말고 해보세요. 들어는 드릴 테니까.”
진현필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자신도 선배들에게 당해왔고, 선배들도 그 선배들에게 당했다.
자신만 욕을 먹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 때문에 폼이 떨어져서 마지막까지 경쟁을 펼쳤던 김명수, 고정규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어야 했고, 센터백의 특성상 교체로도 출전하지 못했다.
마지막 경기인 오늘에서야 출전이 예정되었으니 화를 내는 것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할 말 없으시면 제가 한마디 하죠.”
성배는 진현필을 향해 한 발자국 크게 다가갔다.
5년 전과는 상황이 달랐다.
성배의 키는 진현필과도 거의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훌쩍 커 있었고, 유럽 무대에서 버틸 수 있는 피지컬을 만들기 위해 키운 몸은 진현필보다 더 컸다.
그리고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활약하는 성배의 포스는 진현필이 감당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 당장 한국에도 너보다 대단한 선배들이 많은데, 어디서 나한테 기어오르려고 그래? 지금이 2003년인 줄 알아?”
후배로서의 스탠스를 걷어치우고 나지막이 속삭이는 성배의 말에 진현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성배의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할 정도였다.
“아는 척하지 마. 솔직히 난 우리가 아는 사이라고 생각 안 해. 한 달 얼굴 본 게 전부잖아? 그리고 네 이야기도 내가 안 했어. 네 후배들이 한 거지. 화나는 건 다른 데 가서 풀어. 누울 자리 봐 가면서 다리를 뻗어야지, 안 그래?”
말을 마친 성배는 진현필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였다.
성배의 기에 완전히 짓눌린 진현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앞으로는 자신의 위치를 좀 더 제대로 파악하셨으면 좋겠네요, 선배님. 그럼 전 바빠서 이만.”
성배는 진현필의 옆을 지나쳐 그라운드로 향했다.
성배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진현필은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
뉴질랜드에게도 2-0의 완승을 거둔 벨기에는 브라질에 이어 조 2위로 8강에 진출했다.
“아오, 뉴질랜드 애들은 왜 그렇게 처절하게 발려가지고! 우리가 1위 할 수 있었는데.”
골 득실에서 두 골 차이로 밀리는 바람에 2위로 밀려나기는 했지만, 오히려 성배는 2위를 차지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1위 했으면 4강에서 아르헨티나를 만나는 건데. 결승 가려면 2위 해야지.’
성배는 내심 결승 진출까지 노리고 있었다.
언론과 축구협회는 이번 올림픽 목표 성적을 8강 진출로 잡았지만, 성배는 달랐다.
올림픽 대표팀 멤버들의 미래를 아는 성배로서는 고작 8강 따위로 만족할 수 없었다.
성배는 주변의 동료들을 한 번 싸악 훑어보았다.
‘이 멤버라면 최소한 결승은 가야지. 다른 때라면 우승까지도 노리겠지만.’
아무리 성배라도, 아무리 지금 이 멤버라도 우승은 무리였다.
사실 올림픽 대표 명단이 발표되었을 때부터 이미 이번 올림픽 금메달의 주인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아르헨티나 미친 것들. 올림픽에 월드컵 대표를 내보내면 어쩌자는 거야.’
리오넬 메시, 세르히오 아게로, 앙헬 디 마리아, 디에고 부오나노테, 에제키엘 라베찌, 에베르 바네가, 페르난도 가고, 파블로 사발레타, 페데리코 파지오, 에제키엘 라베찌, 오스카 우스타리까지.
연령 제한에 걸리지 않는 선수들만 이 정도였다.
여기에 하비에르 마스체라노, 후안 로만 리켈메까지 와일드카드로 합류시킨 아르헨티나 대표팀은 이대로 월드컵에 나가도 4강을 노려볼 수 있는 스쿼드를 완성했다.
‘그런 걸 보면 아르헨티나를 피할 생각도 한 것 같은데...’
뉴질랜드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벨기에는 주력 선수들의 절반 가량에게 휴식을 주었다.
조 1위를 노렸다면 할 수 없는 선수 운용이었다.
뉴질랜드 정도는 벨기에가 전력으로 달려들었을 때 네 골 이상 뽑아낼 수 있는 팀이었다.
“자, 자. 이미 끝난 조별리그 생각은 그만하고, 다음 경기 준비부터 하자고!”
‘하긴. 이탈리아도 만만하게 볼 수는 없지.’
성배는 조별리그가 아닌 결승전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다음 경기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었다.
이탈리아.
유럽은 전통적으로 올림픽에 그렇게 큰 가치를 두지 않았지만, 이탈리아는 그래도 올림픽을 꽤 진지하게 대하는 나라였다.
“우선 이탈리아에서 가장 위협적인 선수는 세리에A 올해의 신인을 수상한 이 친구. 히카르도 몬톨리보다.”
이탈리아는 와일드카드로 단 한 명만을 포함시켰다.
클럽들이 차출을 반기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23세 이하 선수 중에도 인재가 많다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히카르도 몬톨리보는 물론이고 쥐세페 로시, 로베르토 아쿠아프레스카, 세바스티앙 지오빈코, 클라우디오 마르키시오, 도메니코 크리시토, 안토니오 노체리노, 마르코 모따, 로렌조 데 실베스트리, 안토니오 칸드레바 등.
이탈리아 올림픽 대표팀은 23세 이하의 선수들을 뽑기에도 자리가 부족했다.
“이탈리아는 분명 강하지. 그래도, 나는 우리가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여기 있는 너희들 중 대부분은 A대표팀에서도 주전 혹은 후보로 활약하고 있잖아. 이탈리아 A대표팀도 압도했는데, 올림픽 대표팀한테 질 수는 없지. 안 그래?”
“당연하죠!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봤자 A대표팀에도 못 뽑히는 친구들 아닙니까?”
“A대표팀 선배들도 우리한테 고전했는데, 우리가 쟤네한테 질 리가 없죠!”
올림픽에 참가한 대표팀 선수들 대부분은 지난 5월 이탈리아에게 승리를 거둘 때 A매치에 참가했던 선수들이었다.
이탈리아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
“1-1의 균형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제 막 80분을 넘어섰고, 경기 종료까지는 10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탈리아는 분명 강했지만, 벨기에도 마찬가지였다.
두 팀의 대결은 80분이 지나도록 1-1에서 변화가 없었다.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공격진도 벨기에의 미래인 수비진을 뚫어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벨기에의 공격 역시 이탈리아의 수비를 뚫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팀 컬러와 이번 올림픽 대표팀의 팀 컬러가 완전히 다른 이탈리아였다.
카테나치오로 대변되는 수비를 앞세워 세계에 군림했던 이탈리아지만, 이번 대표팀은 지오빈코, 몬톨리보, 로시 등을 앞세운 공격에 장점이 있었다.
그래서 뛰어난 수비진을 앞세운 벨기에와 만난 것이 불운이었다.
“콤파니의 깔끔한 태클! 아쿠아프레스카의 볼을 빼냅니다!”
아쿠아프레스카와 로시의 투톱은 이 세대 최고의 투톱 중 하나였지만, 콤파니와 베르통헨의 수비에 막혀 있었다.
벨기에의 공격진도 이탈리아의 수비진을 상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이탈리아 공격진과 벨기에 수비진에 비해 이들의 기량은 분명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래서 벨기에가 유리했다.
“콤파니, 전방으로 전개합니다. 오래 끌지 않고 시몬스가 측면으로 연결합니다! 데 뮬!”
공격진의 능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벨기에는 미드필더들과 수비수들의 공격 지원이 활발한 편이었다.
자연스럽게 공격 옵션이 많아졌다.
반면, 수비가 약하다고 해서 지원을 받는 건 한계가 있었다.
“데 뮬, 크리시토와 마주합니다.”
데 뮬이 크리시토의 시선을 끌어주는 동안 성배는 뒤에서부터 빠르게 달려 전방으로 침투했다.
데 뮬이 사이드라인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대각선 방향으로 페널티박스를 향해 뛰어들었다.
“중앙으로 패스! 주, 흘려주고 미랄라스에게!”
연령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이미 프리미어리그에서 자리를 잡은 성배는 모든 팀들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성배가 달려들자 이탈리아 수비진의 시선이 성배에게 쏠렸고, 성배는 이를 이용해 공간을 만들어냈다.
데 뮬의 패스가 왔을 때, 가랑이 사이로 이를 흘려내면서 내려와 있던 미랄라스에게 볼을 넘겨주었다.
‘바로 올려달라고.’
볼을 지나치면서 스피드를 줄이지 않을 수 있었다.
성배는 그대로 박스 안으로 침투했고, 미랄라스의 리턴 패스를 기다렸다.
“미랄라스, 논스톱으로 띄워줍니다!”
성배의 바람대로 미랄라스는 시간을 끌지 않았다.
논스톱으로 볼을 띄워 박스 안으로 투입해주었다.
‘잡지 마라.’
뒤늦게 성배의 침투를 파악한 이탈리아의 수비수들은 유니폼을 잡아당기며 어떻게든 막아내려했다.
지금 넘어져도 페널티킥을 얻어낼 확률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플레이를 계속하는 것이 페널티킥을 얻어내는 것보다 나았다.
‘좋아!’
미랄라스의 패스는 성배의 발에 정확히 안착했다.
패스도, 볼 트래핑도 완벽했다.
‘어딜!’
그리고 성배는 오른발로 트래핑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왼발로 볼을 띄웠다.
뛰쳐나와 몸을 날린 골키퍼 비비아노의 슬라이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아악!!”
자신의 예상보다 한 박자 이상 빠른 성배의 볼 터치에 놀란 비비아노는 손을 뻗어 성배의 발목을 잡아버리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비비아노의 플레이에 성배도 어쩔 수 없었다.
성배는 그대로 쓰러졌고, 골대 쪽으로 미리 띄워놓았던 볼을 바라보았다.
“주, 쓰러지고, 보체티가 볼 걷어냈습니다! 주심, 휘슬! 페널티킥!! 페널티킥입니다!!”
보체티가 빠르게 달려가 볼을 걷어냈지만, 그걸로 끝은 아니었다.
당연히 페널티킥이 선언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레드 카드!! 레드 카드입니다!! 에밀리아노 비비아노, 퇴장!! 이탈리아, 골키퍼없이 경기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노골적인 파울에 주심은 비비아노에게 퇴장을 선언했다.
이미 세 장의 교체 카드를 모두 사용한 상황.
필드 플레이어인 칸드레바가 골키퍼 장갑을 껴야만 했다.
< 낭만필드 - 14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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