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44 >
“후우, 힘드네요.”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나선 것이었기 때문에 성배의 기자회견은 일반적인 경우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진행되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확실히 기자들의 관심이 장난 아니네요.”
언론과 대중은 언제나 새로운 스타를 원했다.
박인진은 언제나 핫한 선수였다. 최고의 선수이지만, 언론에 의해 지나치게 많이 소비되고 있었다.
윤기표는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으나, 그가 보여주는 플레이처럼 팬들 역시 꾸준하지만, 조용한 편이었다.
최근 유럽진출 떡밥이 돌고 있는 ‘천재’ 백진영이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고 있었지만, 그 역시 청소년 대표 시절부터 어마어마한 관심을 받아왔다. 전혀 새롭지 않았다.
“오늘 기자회견 잘만 정리하면 자서전으로도 쓸 수 있을 것 같죠? 하하.”
“하하하,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버크만 씨한테 여쭤볼까요?”
그런 상황에서 스무 살의 나이로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해 반년 만에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한 성배가 관심을 한몸에 받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귀화와 병역으로 인한 결점이 절대로 작지 않았다.
하지만 국적만 바뀌었을 뿐, 순수 한국 혈통인 성배가 프리미어리그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활약하는 것이 한국 축구팬들에게 주는 쾌감이 더 컸다.
박인진, 윤기표와 함께 축구 변방이었던 대한민국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말실수한 건 없죠?”
“뭐, 특별히 실수는 보이지 않았는데, 기자들이 어떻게 쓸지, 그게 문제입니다. 앞뒤 자르고 적당히 욱여넣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버크만을 대신해 성배를 케어 중인 담당자는 기자들의 주 무기인 사실과 거짓을 섞은 팩션 창작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때를 대비해서 한국 언론 쪽이랑 선을 대놓았던 거니까. 버크만이 알아서 잘했겠지.’
버크만이라면 이미 깔끔하게 마무리했을 것이 분명했다.
윤기표를 통해 한국 언론과 선을 대려 노력했고, 윤기표의 입김은 언론이 무시할 수 없었다.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안티가 전혀 없는 윤기표와 척을 지는 것은 언론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울 것이었다.
“저, 주성배 선수? 버크만 씨 전화입니다.”
“알랭이요? 줘보세요.”
기자회견을 마친 직후에 전화가 걸려온 것을 보니, 잠들지 않고 계속 기다린 듯했다.
‘거긴 지금 새벽 네 시에서 다섯 시 정도일 텐데, 이 시간까지 자지 않고 기다리다니. 고맙네.’
자신에게 크게 신경 써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보세요?”
[아, 주. 기자회견은 끝났습니까?]
“예. 전화하려고 지금까지 기다린 겁니까?”
버크만은 성배를 따라온 에이전시 직원과 전화를 연결해놓고 직원의 말과 현장음을 통해 현장 상황을 주시했다.
덕분에 군말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제가 파악한 바로는 발언에 특별한 문제는 없었습니다. 자세한 건 동영상이랑 녹음파일을 받아야 알 수 있겠지만, 일단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기자들의 악의적인 짜깁기에 대비해 회사 차원에서 녹화와 녹음을 떠놓았다.
삼류 찌라시를 제외하면 짜깁기 기사가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제가 부탁드렸던 건 잘 해결되었습니까?”
[예.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대로 한국 기자들과 끈을 연결해놓았고, 그들에게 부탁해서 해결했습니다. 언제든 필요할 때 부탁하면 들어줄 겁니다.]
한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 성배가 준비한 것은 기자회견과 유소년 축구 센터 건립 이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었다.
자신이 주도적으로 판을 만들고 시기를 결정할 수 있었던 전자의 두 가지와는 다르게 다른 누군가가 판을 만들어줘야 하는 일이었다.
[대신 나중에 독점 인터뷰 몇 번 해주고 정보 몇 개 던져주기로 했습니다. 싸게 먹혔죠.]
잉글랜드보다는 쉬웠고, 벨기에보다는 어려웠다.
버크만이 한국 언론과 호의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체감한 난이도였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고생하셨습니다.”
버크만은 항상 믿음직스러웠다.
사적인 친분은 어느 정도 선 이상 나아가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믿을 수 있었다.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고 크게 성장한 현 상황에서 헤르만이 아닌 버크만과 계약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
[주성배 입국 기자회견, “가장 까다로운 선수는 박인진.”]
반년 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에 진출해 성공적으로 자리 잡은 주성배(21)가 지난 3일, 입국했다.
한국에서 중학교를 마친 뒤, 벨기에로 건너가 안더레흐트에 입단하고 그대로 귀화, 안더레흐트와 아약스를 거쳐 토트넘에 입단한 그는 벨기에 국가대표로도 활약 중이다.
벨기에에서 가장 뛰어난 유망주이자 국가대표팀의 중심으로 활약 중인 그는 가족을 만나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입국했고, 오늘 오전 11시, 제이든 호텔 컨벤션 센터에서 입국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 질의응답 정리.
...
-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한 기분은 어땠나?
: 믿을 수 없었다. 솔직히 축구를 시작할 때는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겠다는 꿈조차 없었다. 일이 잘 풀렸고, 부모님과 하늘에 감사했다.
- 지난 시즌 아약스와 토트넘에서의 활약을 더하면 9골 12어시스트다. 수비수로는 믿기 힘든 기록을 세웠는데, 소감이 어떤지 듣고 싶다.
: 믿을 수 없는 기록이다. 다시 하고 싶어도 못할 것이다. 프리킥 해트트릭도 그렇고 이번 시즌은 정말 운이 많이 따라준 시즌이었다.
...
- 박인진과의 맞대결 소감은?
: 솔직히 정말 상대하기 힘들었다. 상성 상 나는 호날두와 같은 개인 기량 위주의 선수가 더 편하다. 인진이 형처럼 헌신적으로 움직이는 선수는 상대하기 힘들다. 그래서 이적 후 만난 선수들 중 인진이 형이 가장 까다로웠다.
- 같은 팀에서 뛰고 있는 윤기표에 대해 평가한다면?
: 내가 평가할 정도의 선수가 아니다. 나보다 더 좋은 선수이고, 리그 정상급의 선수다. 굳이 말하자면 기표 형의 안정감과 영리함은 리그 최고 수준이다.
- 한국 대표팀을 평가한다면?
: 자세하게 말하기에는 좀 그렇다. 이해해달라. 하지만 한마디만 하자면 좋은 팀이다. 선수가 아닌 한 명의 축구팬으로서 봤을 때, 잠재력이 큰 팀이라고 생각한다.
...
- 어린 나이에 외국으로 나갔고, 사회로 나갔는데,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
: 쉽지는 않았다. 굉장히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가끔 인종차별을 겪을 때는 서러웠고, 다른 인종,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린 마음에 외로움을 타기도 했다.
하지만 축구와 관련된 일들은 모두 잘 풀렸기 때문에 즐겁기도 했다.
- 벨기에로 귀화하겠다고 결정한 이유를 알고 싶다.
: 음... 밝히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문제가 생기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밝히자면, 벨기에로 떠나기 전에 트러블이 좀 있었다. 안더레흐트에 입단해서도 돌아와야 할지, 아니면 계속 남아야 할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알려진 대로 레프트백으로 뛰기 시작한 것은 안더레흐트가 처음이었다. 자신이 없었고, 트러블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귀국하면 선수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그러다가 벨기에로 결정한 결정적인 이유라도 있었나?
: 안더레흐트 입단 후 2년 반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벨기에 축구협회에서 직접 찾아왔다. 청소년 대표팀 합류를 위해 귀화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한국에서의 선수생활에 확신이 없었고, 그때는 자신감이 없어서 기표 형과 진곤 선배가 버티는 대표팀에 들어갈 자신도 없었다.
당시 또 하나 결정적이었던 것은, 안더레흐트 1군에서 데뷔해 점점 입지를 넓혀가고 있었음에도 한국 축구협회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무서웠다.
당시만 해도 벨기에보다 한국의 FIFA 랭킹이 30계단 정도 높았을 때였기에, 국제무대를 경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잡았다.
- 축구협회에 서운하지는 않나?
: 서운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솔직히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안더레흐트와 1군 계약을 맺으면서 국가대표팀은 몰라도 청소년 대표팀 정도는 당연히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내게 손을 내밀어 준 곳은 벨기에였고, 지금은 그 선택이 아쉽기는 해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 인터넷상에서 떠도는 이야기들을 보면 영원중 졸업 후 영원고에서 잠시 훈련할 때, 트러블이 있었다고 들었다. 조금 전에 이야기한 트러블이 그것인가?
: 글쎄. 아까도 말했듯 민감한 일이라 그 일에 대해서는 조심스럽다.
...
- 이제 곧 올림픽이 열린다. 목표가 듣고 싶다.
: 벨기에의 이번 올림픽 세대에는 굉장한 선수들이 많다. 내심 메달까지도 노려보고 있다.
D조인 한국과는 8강 혹은 결승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이왕이면 결승에서 만났으면 좋겠다. 하하하.
- 마지막으로 다음 시즌 목표에 대해 말해준다면.
: 공격수가 아니라서 수치화된 목표는 없다.
이번 시즌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으니 이 자리를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우승 트로피나 챔피언스리그 출전권도 간절하다.
...
***
기자회견에서의 질문들은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 시장에 집착할 생각은 없었지만, 되는 데까지 노력은 해보려고 했던 성배는 예전부터 시간 날 때마다 생각을 정리해왔고, 이런 질문들은 이제 찌르면 대답이 나올 정도였다.
ㄴ 아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축구협회 이것들 또 일 안했어. 아, 짜증 나. 주성배만 있었으면 수비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건데.
ㄴ 이놈의 나라는 외국인한테는 그렇게 빌빌대면서 한국인이라고 하면 우습게 본다니까. 주성배도 한국인이니까 당연히 한국 대표팀으로 뛸 줄 알았겠지. 5공 시절 애국심 강요 클라스...
ㄴ 그래도 그거 하나로 국적을 바꿔버리는 건 너무한 거 아님? 최소한 연락이라도 한 번 해보든지.
ㄴ 축구선수는 자존심도 없냐? 게다가 자기를 간절히 원하는 나라가 바로 옆에 있는데, 굳이 관심도 안 주는 나라에 빌어 가면서까지 뛰고 싶겠어? 지금 관심 없으면 앞으로도 관심 없을 텐데 그 커리어 손해는 누가 보상함?
ㄴ 아니, 그러니까 외국인한테 이렇게 관심 두지 말라고. 알아서 잘 살라고 해. 그러면 되지.
‘좋아. 이 정도 반응이면 기대 이상이야.’
진실 90%에 거짓을 10% 섞은 성배의 기자회견에 여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동안에는 주성배라는 개인의 일이었다면, 이제는 축구협회가 개입된 축구계의 일이 된 것이었다.
축구계와 개인 간의 일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자인 개인에게 자신의 처지를 투영하기 마련이었다.
‘귀화 이후 가장 좋은 상황이야.’
성배에 대한 여론은 지금이 최고조였다.
선수생활 역사상 이것보다 더 좋은 반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벨기에에서는 박인진 급은 아니어도 윤기표보다는 높은 인지도와 인기를 얻고 있었고, 한국 반응도 슬슬 프리미어리거라는 간판에 어울리는 수준까지 올라오는 중이었다.
‘이럴 때 결정타를 날려줘야 하는데...’
이제 곧 올림픽 대표팀 소집 때문에 출국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전에 모든 일을 마무리 지어놓아야 다음에 입국했을 때 한국 활동을 바로 시작할 수 있었다.
성배의 손가락이 움직였고, 다른 창을 띄웠다.
‘이렇게까지 도와줄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그리고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 낭만필드 - 14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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