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42 >
“피를로, 급하게 볼 처리합니다. 디 나탈레가 내려와서 받아줍니다.”
펠라이니와 데푸르를 앞세운 벨기에의 중원 장악 시도에 고전하는 이탈리아였다.
가투소와 피를로, 두 선수가 고전을 면치 못하니 이탈리아의 공격이 풀릴 리 없었다.
결국, 투톱으로 경기에 나섰던 디 나탈레가 볼을 받기 위해 하프라인 근처까지 점점 더 자주 내려왔다.
“디 나탈레, 왼쪽으로 연결합니다. 카모라네시, 주를 상대합니다.”
중앙을 통한 공격이 막혀버린 상황.
이탈리아는 되든 안 되든 측면을 공략할 수밖에 없었다.
성배와 베르마엘렌을 앞세운 수비에 고전하고 있었지만, 크로스만 제대로 올라간다면 토니의 제공권을 앞세워 한 번 비벼볼 수 있었다.
‘수비하기 쉽지는 않지만.’
눈앞의 선수는 아퀼라니와 잠시 자리를 바꾼, 전성기의 끝물을 달리고 있는 카모라네시였다.
네드베드가 떠난 이후 유벤투스 공격진의 유일한 월드클래스 선수로 활약하며 에이스 역할을 해주었던 카모라네시는 수비하기 쉽지 않은 상대였다.
‘마땅히 공략할 약점이 있는 건 아닌데.’
전성기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스피드도 빠른 편이고, 피지컬도 나쁘지 않았다.
스피드, 돌파력, 개인기, 드리블, 테크닉 등은 물론이고 정확한 크로스와 연계능력, 득점력에 심지어는 제공권까지.
딱히 약점이 없는 선수였다.
‘그렇다고 막을 수 없는 건 아니지.’
하지만 전성기의 기량은 분명 아니었다.
아직은 월드클래스 플레이어로 남아있지만, 막아낼 수는 있을 정도였다.
“카모라네시, 천천히 전진하다가 치고 들어갑니다! 주, 따라붙습니다!”
‘이제 이런 건 좀 포기하지.’
사이드라인으로 바짝 붙어서 돌파를 시도하는 카모라네시와 그런 그에게 바짝 붙어서 쫓아가는 성배가 나란히 달렸다.
카모라네시도 여전히 빠르지만, 성배는 월콧, 라이트-필립스, 로번과도 스피드 경쟁을 펼치는 선수였다.
곧 카모라네시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태클?’
성배는 태클 타이밍을 잡아보려 했지만, 카모라네시 정도라면 어설프게 태클을 시도했다가는 동료와의 연계를 통해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완벽한 태클을 위해 잠시 기다렸다.
“급제동, 디 나탈레에게!”
태클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빠르게 돌파를 시도하던 카모라네시는 갑작스럽게 속도를 줄였고, 중앙의 디 나탈레에게 볼을 빼주었다.
쫓아가던 성배도 따라서 속도를 줄였다.
‘이 정도로는 날 못 속이지!’
성배가 멈추는 것을 보고 카모라네시는 다시 전방으로 튀어 나갔다.
디 나탈레에게 패스하는 것을 보고 성배가 멈추거나 멈칫하면 다시 패스를 받아 돌파를 이어나가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성배는 속지 않았다.
‘아직 예상범위 안이야.’
디 나탈레에게 패스가 들어가는 순간, 성배는 다음 플레이를 예상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해야할 것은 카모라네시를 따라가는 것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태클! 콤파니, 볼을 빼냅니다! 무딩가이에게 빠르게 연결!”
디 나탈레에게 볼이 투입된 이상, 그쪽은 콤파니와 베르통헨에게 맡겨야 했다.
성배의 시선이 흔들리지 않았고, 카모라네시에게 패스하려던 디 나탈레는 패스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디 나탈레가 머뭇거린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콤파니에게는 그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빨리 내놔!’
“콤파니, 오른쪽으로! 주, 벌써 달리고 있습니다!”
콤파니가 빼준 볼은 어느새 공격 모드로 변환해 앞으로 뛰쳐나가던 성배에게 연결되었다.
서로 다른 팀에서 활약하게 된 지도 2년이 넘었지만, 두 선수의 호흡은 여전했다.
‘어딜 따라오려고.’
콤파니의 패스는 성배의 스피드에 맞춰 연결되었다.
성배의 옆에서 아퀼라니가 함께 달렸지만, 발이 느린 아퀼라니는 성배의 스피드를 따라올 수 없었다.
“주, 빠른 역습 시도! 오른쪽 측면을 거침없이 질주합니다! 어느새 하프라인 돌파!”
카모라네시의 공격 작업이 끊긴 것까지는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모든 선수가 모든 플레이를 성공시킬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상대 수비수에게 다음 플레이에서 볼을 빼앗을 수 있다는 확신을 준 것은 문제였다.
볼이 벨기에 쪽으로 넘어옴을 확신하고 미리부터 달려나갔던 성배로 인해 벨기에의 역습이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 성배의 스피드는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가투소가 달려듭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중원에는 피를로와 가투소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피를로는 패스 줄기를 차단하는데 있어서는 뛰어난 선수였지만, 지금과 같은 역습 상황에서 상대 선수들에게 압박감을 줄 수 있는 선수는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수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선수는 가투소 뿐.
‘혼자서 뭘 어째.’
성배는 패스 한 번으로 가투소를 돌려보냈다.
“악셀 비첼! 다시 데푸르에게!”
성배의 패스에 가투소는 다시 비첼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비첼은 늦지 않게 데푸르에게 볼을 연결하며 가투소의 압박을 피해냈다.
“원터치 패스! 측면으로 향합니다! 주!”
그리고 데푸르는 볼을 잡지 않고 논스톱으로 살짝 띄워서 오른쪽 측면을 통해 올라온 성배에게 이어주었다.
‘잠브로타...’
성배의 앞을 한 선수가 가로막았다.
이탈리아의 레전드, 잔루카 잠브로타였다.
“주, 그리고 잠브로타!”
팀 상황에 따라 오른쪽과 왼쪽을 가리지 않는 풀백.
두 선수 모두 그랬다.
잠브로타는 본래 라이트백이 자신의 포지션이었고, 성배는 레프트백이 자신의 포지션이었다.
‘포지션이 어색할 일은 없다고 봐야겠고.’
짧은 시간이지만, 성배의 머리는 엄청난 속도로 회전했다.
수비가 어색할 일은 없다고 봐야 했다.
‘그렇다면.’
어차피 자신의 돌파력으로 잠브로타를 뚫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크로스 정도는 충분히 올려줄 수 있었다.
“반대로 접고, 왼발 크로스!”
성배는 먼저 뒤에서 달려오는 비첼에게 패스할 것처럼 오른발로 작은 페인트를 던졌다.
잠브로타는 작은 페인트에도 반응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수비수였고,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독으로 작용했다.
잠브로타가 먼저 몸을 움직인 순간, 성배는 볼을 왼발 앞으로 옮겨놓고 크로스를 시도했다.
“날카로운 크로스, 펠라이니!”
비첼과 데푸르가 가투소, 피를로와 적극적으로 경합을 펼쳐주는 동안 펠라이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벨기에 중원에서 가장 강력한 장악력을 갖추고 있다는 펠라이니가 이 경합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더 중요한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더! 골! 골입니다! 마루앙! 펠라이니! 머리 두 개는 더 높은 곳에서 멋진 헤더로 득점을 기록합니다!”
펠라이니의 역할은 단순했다.
성배가 요구한 대로 벨기에가 볼을 잡으면 전방으로 달려가 칸나바로와 경합을 펼치는 것이었다.
성배는 자신이 약속했던 대로 정확한 패스를 연결해주었고, 펠라이니는 오늘 경기 후반전에 제공권을 장악했다.
“펠라이니, 대단하네요! 엄청난 제공권을 보여주었고, 결과적으로 득점까지 기록, 굉장한 활약이죠!”
“주와의 호흡이 완벽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어떻습니까?”
“정확한 패스를 장착하고 있는 선수들은 오늘의 펠라이니처럼 제공권을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는 선수를 좋아할 수밖에 없죠. 주성배 선수와 펠라이니 선수의 호흡은 좋지 않을 수가 없어요!”
성배의 패스와 펠라이니의 제공권을 활용해 경기 주도권을 가져오자, 경기 자체가 벨기에 쪽으로 기울었다.
양 팀 모두 공격에서 힘을 쓰지 못했는데, 펠라이니와 성배의 활약으로 벨기에 공격이 살아났으니, 경기 주도권이 넘어올 수밖에 없었다.
***
이탈리아를 상대로 주도권을 잡고 선취 득점까지 기록한 순간, 반더레이켄 감독은 만족감을 표시했다.
어차피 친선 경기였기 때문에 승리에 목을 맬 필요는 없었다.
당장 FIFA 랭킹을 30위권으로 올린다고 해서 특별한 이득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벨기에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국가대표팀의 세대교체와 새로운 얼굴들의 발굴이었고, 반더레이켄 감독은 평가전의 목적에 충실했다.
“경기 끝났습니다. 우리 선수들, 지난 월드컵 챔피언, 이탈리아와의 원정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거두며 기분 좋게 경기를 마무리합니다.”
후반전에는 여섯 명의 선수를 교체하며 새로운 선수들을 시험해보았다.
이미 벨기에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스타 플레이어로 성장한 성배 역시 교체되었다.
더 이상의 증명은 불필요했다.
“주성배와 베르마엘렌이 빠지면서 수비 불안을 노출해 경기 주도권을 내주긴 했지만, 나쁘지 않은 경기였어요. 특히, 월드컵 챔피언의 홈에서 무승부를 거두었다는 건 나쁘지 않은 결과죠.”
반더레이켄 감독은 호프킨스에게 뭔가 약점이라도 잡혔는지 그를 포기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성배와 바꿔주며 그라운드를 밟게 했다.
호프킨스는 A매치 데뷔전을 치른 포코뇰리보다도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결과도 결과지만, 오늘 경기의 가장 큰 수확은 붉은 악마의 밝은 미래를 확인했다는 거죠.”
스물두 살의 베르마엘렌, 콤파니와 스물한 살의 베르통헨과 성배.
이들로 이루어진 벨기에의 수비진은 이탈리아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냈다.
이름값에 비해 이탈리아 공격진의 파괴력이 약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빅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백전노장들이었다.
이들을 막아낸다는 것이 쉬울 리 없었다.
“포백 라인은 말하면 입 아프고, 펠라이니, 비첼, 데푸르, 뎀벨레, 미랄라스, 포코뇰리 등 미래가 기대되는 선수들이 너무 많아요. 늦어도 5년 안에 유럽 축구의 중심으로 붉은 악마를 이끌 수 있는 재능들입니다!”
슬슬 성배가 노렸던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의 출현으로 약점이 사라지고 장점은 더 강력해진 벨기에 수비진은 어디 내놓아도 밀리지는 않을 수준까지 성장했다.
탄탄한 수비는 안정적인 경기를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다른 포지션 선수들에게도 긍정적인 효과를 전파했다.
“정말, 두 달 후에 있을 올림픽이 기대되어서 잠이 안 올 것 같습니다, 여러분. 올림픽에도 큰 성원 보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들은 모두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는 선수들이었다.
올림픽에는 큰 관심이 없는 다른 유럽 팀들과 달리 벨기에는 올림픽에서라도 좋은 성적을 내야만 했다.
게다가 최근 들어서 85년 이후 출생한 선수들의 성장이 눈에 띄는 상황.
이들의 성장과 인지도 상승을 위해서 올림픽은 중요했다.
***
“주성배 선수! 벨기에 귀화 이후 첫 귀국이신데, 소감이 어떠십니까?”
‘처음 아니야. 두 번은 왔었다고.’
“박인진 선수와 맞상대해본 느낌은 어떠셨습니까?”
‘그런 건 다른 외국 선수들에게도 매일 물어보잖아. 나는 좀 빼줄 수 없나.’
“귀화로 인한 군대 문제로 말이 많은데, 본인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뭘 어때. 당신이면 어떨 것 같은데.’
이탈리아와의 평가전을 끝낸 성배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날아왔다.
올림픽 대표팀 소집이 있기는 하지만,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있었고, 2주 정도는 한국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공항에서부터 몰려든 기자들로 인해 가족들을 만나는 건 잠시 뒤로 미뤄야 했다.
“자자, 며칠 뒤에 정식으로 기자회견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질문은 그때 받겠습니다.”
버크만은 독립 준비 때문에 바빴기 때문에 이번 일정에 동참하지 않았다.
대신 한국 쪽 대행사를 섭외했고, 경호업체는 벨기에에서 성배와 함께 날아왔다.
흔히 볼 수 없는 덩치의 경호원들이 상대였기에 악착같기로 유명한 기자들도 점점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극성맞기로 유명한 잉글랜드 언론들도 상대하는 사람들인데. 이 정도야 뭐.’
덕분에 걱정했던 것보다는 수월하게 공항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다만 생각보다 큰 관심이 걱정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이거 말 한마디 잘못하면 큰일 나겠는데?’
이런저런 일들로 바빠서 한국에 들어오지 못한 지 3년이 지났다.
그 3년 사이에 프리미어리그 이적과 박인진, 윤기표와의 친분으로 인해 성배의 인지도는 굉장히 높아졌다.
인지도가 높아졌고, 여론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부정적인 반응 역시 커진 상황이었기에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일단 입부터 조심해야지. 특히 귀화, 병역 문제는.’
가족과 함께 쉬기 위해 입국했지만, 오히려 시즌을 치르는 것보다 더 피곤할 것임을 직감한 성배였다.
< 낭만필드 - 14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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