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141화 (109/356)

< 낭만필드 - 141 >

“우리 선수들, 지난 월드컵 챔피언 이탈리아를 맞아 굉장히 선전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줬으면 좋겠습니다.”

2008년, 벨기에의 첫 A매치 상대는 지난 2006 독일 월드컵 챔피언, 이탈리아였다.

월드컵 우승 이후 유로 2008 예선에서도 통과하며 본선진출에 성공한 이탈리아는 본선에 대비해 본선 진출에 실패한 벨기에와 A매치 평가전을 가졌다.

“지난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그때 멤버가 그대로 뛰고 있어요. 지난 월드컵에서도 주력 선수들의 노쇠화가 지적되었었는데, 2년이 더 지났으니 문제는 더 심각해졌죠.”

하지만 그런 이탈리아는 2006년의 포스를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다.

선발로 나선 열한 명의 선수 중 81년생의 바르잘리와 84년생의 아퀼라니, 심지어 79년생인 피를로가 뒤에서 세 번째일 정도로 나머지 모든 선수가 78년 이전에 태어난, 30대의 선수들이었다.

클래스가 있었기에 여전히 강력하기는 했지만, 이탈리아라는 이름값에 어울리는 정도는 아니었다.

“2006년 월드컵의 일등 공신으로, 발롱도르까지 차지했다고는 하지만 칸나바로의 나이가 벌써 서른다섯입니다. 파누치도 마찬가지고요. 이번 대회도 불안하기는 한데, 이번 대회 이후가 더 걱정이죠.”

이탈리아의 세대교체 문제는 이탈리아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 화제였다.

나이가 들수록 더 강력해지는 디 나탈레와 토니의 공격진은 나쁘지 않았지만, 나머지 포지션의 문제는 심각했다.

그나마 젊은 피로 세대교체의 중심이 되어줄 거라 기대했던 아퀼라니도 부상이 너무 잦아 성장이 정체되었고, 이탈리아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그에 반해 우리 벨기에는 젊은 팀이지 않습니까?”

“그렇죠. 비록 지금 당장은 이탈리아의 베테랑들에 비해 모자란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격차는 좁혀지기만 하겠죠. 특히 우리 수비수들은 이탈리아의 공격진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고 있어요.”

센터백에 콤파니와 베르통헨.

레프트백에 베르마엘렌, 라이트백에 주성배.

세계적인 유망주로 거듭난 이 네 선수가 이루는 수비진은 디 나탈레의 돌파력에도, 토니의 제공권에도, 두 선수의 골 결정력에도 밀리지 않았다.

칼치오폴리 스캔들 이후 세리에A에 복귀한 유벤투스의 에이스, 라이트윙 카모라네시와 본인의 포지션이 아닌 곳에서 뛰고 있는 레프트윙 아퀼라니 역시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저 노인들을 상대로 아무것도 못 하다니.’

하지만 성배는 경기 흐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비진에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콤파니, 베르통헨, 베르마엘렌에게 자신이 뭐라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공격진에는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칸나바로, 잠브로타, 파누치가 도대체 언제적 선수들인데.’

물론 이탈리아의 모든 수비수들은 월드클래스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바르잘리를 제외한 나머지 네 선수는 이미 전성기가 지난 것도 모자라 황혼기에 접어든 선수들이었다.

잠브로타는 그나마 낫다고 하지만, 파누치와 칸나바로는 거의 끝을 향해 가는 중이었다.

‘확실히 아직은 공격력이 형편없어.’

중앙 미드필더 전향 이후에 포텐이 터지는 뎀벨레.

이탈리아 수비진의 느린 발을 공략할 수 없는 데푸르, 펠라이니, 비첼의 3인 중앙 미드필더 전술.

‘내가 공격에 참여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게다가 자신의 상대는 노인정에서 그나마 제 몫을 다해주는, 노쇠화도 크게 진행되지 않은 잠브로타였다.

어느 정도 역할은 해줄 수 있겠지만, 포르투갈전에서처럼 경기를 이끌어가기는 힘들었다.

‘생각을 좀 더 해봐야겠어.’

분명 이탈리아의 허술한 수비진을 공략할 방법은 있었다.

생각이 조금 필요할 뿐이었다.

***

“마루앙! 너는 후반전에 가투소와 맞짱을 떠. 뭐든 허락한다. 퇴장만 당하지 마.”

“네, 네. 한 번 제 맘대로 뛰어놀아보죠.”

전반전은 0-0으로 종료되었다.

양 팀의 공격진은 서로 상대 수비진의 역량만 증명해주면서 전혀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리고 후반전이 시작되기 전, 15분의 하프 타임.

반더레이켄 감독은 이 경기를 잡기 위해 몇 가지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스티븐! 너는 마루앙이 가투소를 잡아주는 동안 피를로를 밀착 마크한다. 공격 작업은 악셀에게 조금 넘겨주고 피를로에게 집중해.”

“그 정도는 별것 아니죠.”

반더레이켄 감독의 지시는 간단했다.

이탈리아의 양쪽 날개는 이쪽의 수비수들이 이미 접어버렸고, 파누치는 노쇠화로 인해, 잠브로타는 성배와의 치열한 접전 때문에 공격에 집중하기 힘든 상황.

피를로의 패스만 견제한다면 이탈리아의 투톱은 완벽히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피를로의 약점은 단 한 가지.

한 선수가 전담으로 달라붙어 견제하면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건 된다. 무조건 통해.’

성배는 이 전술이 통할 것을 확신했다.

피를로가 활개를 치기 위해서는 가투소의 보호가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활동량을 기본으로 하는 가투소의 기량은 이번 시즌부터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고, 펠라이니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충분히 견제해줄 수 있을 것이었다.

‘스티븐도 공격 능력 덕분에 주목받고 있지만, 활동량과 체력이 만만치 않아.’

깔끔하고 창의적인 패싱 능력으로 주목받는 데푸르지만, 이는 활동량과 체력, 적극적이고 과감한 플레이가 패스에 비해 눈에 띄지 않아서 그런 것일 뿐이었다

데푸르의 터프함도 만만치 않았다.

가투소가 보호해주지 못한다면 피를로는 데푸르의 압박을 견디지 못할 것이었다.

‘수비는 이걸로 됐어.’

반더레이켄 감독은 그리 뛰어난 감독이 아니었지만, 적어도 수비 전술을 짜는 능력만큼은 뛰어난 편이었다.

자신도 그걸 아는지 지나치게 수비적으로 경기를 운영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것은 선수들이 보완해주면 되는 것이었다.

수비 전술 하나로도 벨기에를 FIFA 랭킹 30위권 까지는 끌어올릴 수 있는 감독이었다.

다만 네덜란드계인 그는 벨기에 선수단을 하나로 묶는 것을 해내지 못했고, 역량에 비해 좋은 성적을 낼 수 없었다.

“마루앙! 이리 와봐.”

지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했다.

감독의 지시가 내려진 후, 성배는 펠라이니를 따로 불러냈다.

“왜? 무슨 일인데.”

“내가 좀 부탁할 게 있어서.”

감독의 부족한 공격 전술은 선수들이 알아서 채워야 한다는 것이 성배의 판단이었다.

감독의 지시에 불응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보완하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별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었다.

“뭔데?”

“수비할 때는 르네의 지시대로 해. 공격할 때는 내 말대로 해줬으면 좋겠어.”

“도대체 뭔데 그래? 일단 들어나 보자.”

“공격할 때. 파비오한테 붙어. 내가 올려줄 테니까.”

파비오 칸나바로.

성배는 그를 타겟으로 삼았다.

이탈리아 수비의 구멍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파비오? 괜찮겠어?”

“언제적 파비오라고 겁을 먹어. 파비오는 이미 갔어.”

이탈리아를 월드컵 우승으로 이끌고 발롱도르까지 차지한 칸나바로였지만, 이미 그의 시대는 끝났다.

176cm의 심각하게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의 센터백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뛰어난 위치 선정 능력과 압도적인 점프력, 단단한 피지컬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피지컬은 하락했고, 센터백 중에서는 난쟁이나 마찬가지인 그에게 이것은 치명적이었다.

“이번 시즌 프리메라리가에서 돌파하기 가장 쉬운 수비수 1위로 뽑힌 선수가 파비오야. 네 피지컬에 제공권이면 가지고 놀 수 있어.”

“그런가? 뭐,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니 한 번 해보지, 뭐.”

동년배에서 가장 잘 나가고 있었고, 벨기에 전체에서도 반 바이텐을 제외하면 가장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나가고 있는 성배의 말이었다.

설득력은 충분했다.

“공격할 때는 무조건 칸나바로한테 붙어. 세트피스 때도 마찬가지고. 그럼 내가 네 머리만 보고 올려줄게.”

제공권에서 앞서는 매치업만 있다면 정확하게 올려줄 자신이 있었다.

오늘 성배는 펠라이니를 경기의 핵심으로 보았다.

“이거, 잘만 되면 네가 오늘 영웅이다. 월드컵 챔피언을 침몰시킨 영웅, 마루앙 펠라이니. 무슨 말인지 알지?”

“그럼. 그 영웅, 내가 해주지.”

성배와 펠라이니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

“바르잘리가 가투소에게, 가투소, 피를로 쪽을 보는데! 펠라이니의 태클! 휘슬 울립니다!”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벨기에 선수들은 반더레이켄 감독의 지시에 충실히 따랐고, 조금씩 중원의 지배력을 가져오는 중이었다.

노쇠한 가투소는 떠오르는 피지컬 괴물, 펠라이니와의 맞대결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피를로에게 연결됩니다. 데푸르의 강력한 압박! 비첼도 가세하고, 볼 뒤로 돌립니다.”

펠라이니와의 일대일에서 밀리지는 않았지만, 가투소는 최소한 두 선수 정도는 상대해주어야 했다.

가투소가 한 명을 커버하는 데 그치면서 피를로의 활동 반경은 점점 좁아져 갔다.

“펠라이니와 데푸르가 가투소, 피를로를 전담 마크하기 시작했네요. 후반전에는 측면 플레이어를 빼고 중앙을 강화한 이득을 톡톡히 보고 있어요.”

측면 플레이어를 뺐지만, 이탈리아 측면의 위력도 크지 않았다.

베르마엘렌과 성배가 수비형 미드필더인 시몬스와 무딩가이의 도움을 받으면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반면, 다섯 명의 미드필더 자원이 중앙에 몰려 있는 벨기에의 장악력을 이탈리아는 따라갈 수 없었다.

“데푸르, 다시 한 번 피를로에게! 피를로, 급하게 왼쪽 측면으로!”

데푸르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피를로는 압박이 들어오기 전에 서둘러 볼을 처리했다.

왼쪽, 아퀼라니를 향한 롱패스였다.

‘그렇지!’

실수였다.

아무리 피를로라고 하더라도 가투소의 보호가 없는 상황에서 쫓기듯 처리한 패스까지 정확할 수는 없었다.

상황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패스였지만, 이런 패스를 놓칠 성배가 아니었다.

“주! 중간 차단! 빠르게 올라갑니다!”

‘마루앙, 빨리 올라가.’

아퀼라니의 스피드로는 성배를 따라올 수 없었다.

게다가 성배가 먼저 출발했고, 아퀼라니는 역동작에 걸려 늦게 출발했으니 절대로 따라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펠라이니가 앞으로 달려나가면서 자유롭게 된 가투소는 성배를 향해 무섭게 달려왔지만,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없었다.

‘열심히 뛰라고.’

“전방으로 길게 찔러줍니다!”

가투소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성배의 패스가 이루어졌다.

뒷공간을 노리기보다는 공중볼 경합을 시키려는 패스였다.

게다가 포백라인을 보호해줘야 할 가투소가 자신을 향해 달려왔고, 다른 중앙 미드필더는 수비력이 좋다고 하기 힘든 피를로.

조금 높고 느리더라도 펠라이니가 경합할 수 있는 상황만 만들어주면 되는 쉬운 패스였다.

“펠라이니, 옆으로 떨궈줍니다!”

성배가 장담했던 대로 성배의 패스는 칸나바로가 처리해야 하는 위치로 정확히 떨어졌다.

펠라이니는 성배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고, 칸나바로와의 공중볼 경합을 시도할 수 있었다.

승자는 펠라이니였다.

“2선에서 쇄도! 데푸르, 슈팅!!”

펠라이니가 떨궈준 볼은 2선에서 달려들던 데푸르의 앞에 정확히 떨어졌다.

피를로를 떨쳐낸 데푸르는 이탈리아 골대를 향해 강력한 중거리 슈팅을 날렸다.

“펀칭! 엄청난 슈퍼 세이브!! 지안루이지!! 부폰!! 엄청납니다!!”

하지만 데푸르의 슈팅은 이탈리아 철벽 수비의 마지막 수문장을 뚫어내지 못했다.

지안루이지 부폰.

그가 지키는 골문은 틈이 없었다.

“대단한 선방이네요! 역시 부폰이죠! 자신이 왜 세계 최고의 골키퍼인지를 증명하는 선방이었어요!”

벨기에 중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상황과 국적을 잊은 듯 부폰을 향해 찬사를 보내는 중계진이었다.

부폰은 중계진이 자신들의 처지를 잊을 정도로 엄청난 선방을 보여준 것이었다.

‘역시. 쉽지는 않구나.’

이 모습을 지켜보던 성배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그에 못지않게 부폰에 대한 존경심도 들었다.

세계 최고의 선수에 대한 존경과 감탄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분명히 통한다.’

하지만 이번 플레이로 인해서 자신의 작전이 통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폰은 분명 엄청난 선수지만, 실점이 전혀 없는 골키퍼는 있을 수 없었다.

‘이기고 FIFA 랭킹 30위권 가자.’

유로 예선 막판에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벨기에의 FIFA 랭킹은 어느새 41위까지 올라왔다.

3위의 이탈리아를 잡아낸다면 30위권 진입도 충분히 가능했다.

< 낭만필드 - 141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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