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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140화 (108/356)

< 낭만필드 - 140 >

‘진짜 정신없네.’

2007/08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최종 라운드.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카윗과 상대하게 된 성배는 경기 내내 고전 중이었다.

“제라드의 공간 패스! 토레스에게로!”

카윗의 움직임 자체가 위협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카윗은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고 경기장 전체를 무대로 뛰어다녔고, 그렇게 생긴 공간은 다른 리버풀 선수들의 무대가 되었다.

‘아차!’

성배 역시 카윗의 움직임에 애를 먹고 있었다.

비교적 잘 막아내고 있었지만, 공간을 아예 내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지금도 카윗의 움직임에 끌려 들어가다가 제라드의 패스 루트를 열어주고 말았다.

“카윗의 움직임이 정말 좋습니다. 헌신적인 움직임으로 동료 선수들을 살리고 있습니다.”

[카윗만 있으면 어떤 전술이든 활용할 수 있다.]

요한 크루이프의 말이었다.

그 정도로 카윗의 움직임과 전술 이해도는 대단했다.

“사실 리버풀이 카윗을 영입하면서 기대했던 건 이런 모습이 아니었거든요? 결과적으로 더 좋은 결과를 받아들었어요. 카윗에게 기대했던 역할은 토레스를 영입하면서 업그레이드시켰지만, 카윗과 같은 움직임은 아무나 보여줄 수 없으니까요.”

리버풀이 카윗을 영입했을 때, 그에게 기대했던 것은 골게터로서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에레디비지에에서 4시즌 연속 20골에 득점왕까지 차지했던 카윗의 득점력은 프리미어리그 이적 후 급락했다.

고민하던 베니테즈 감독은 그를 측면으로 돌렸고, 거기서 카윗은 활동량과 수비 가담 등 자신의 장점을 보여주며 가치를 증명했다.

‘역시. 인진이 형이랑 비슷하네.’

카윗은 박인진과 같은 디펜시브 윙어로 분류되었다.

솔직히 카윗과의 정면 대결에서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월콧과 라이트-필립스, 두 선수와의 대결에서도 밀리지 않았던 성배였다.

그들보다 좋은 선수이지만, 그들에 비해 개인의 위력은 조금 부족한 카윗이었다.

‘상성이 좋지 않아.’

하지만 그런 카윗의 장점은 뭘 해도 팀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성배가 상성 상 고전할 때는 노련하고 무기가 많은 선수와 상대할 때였고, 카윗이 바로 그랬다.

“카윗, 주를 앞에 두고 중앙으로 조금씩 이동!”

카윗은 없을 때 더 위협적이었지만, 볼이 있을 때도 상당히 까다로웠다.

뭐 하나가 엄청나게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뭘 해도 중간 이상은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성배의 눈에 중앙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는 제라드의 모습이 보였다.

‘무조건 끊어야 한다.’

카윗에게 바짝 달라붙어서 볼을 뺄 수 없게 만들어야 했다.

제라드는 조코라를 떨쳐내고 오른쪽 측면으로 이동했고, 그에게 패스가 연결되면 노마크 크로스 찬스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성배가 카윗을 버리고 달려갈 수도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끊어내는 수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끊는다!’

카윗은 제라드 쪽으로 패스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다른 선수도 아니고 제라드에게 편안한 크로스 기회를 줄 수는 없었다.

성배는 균형을 이동하며 카윗의 패스 코스를 막아섰다.

“속임수! 주, 속수무책!”

‘아뿔싸!’

제라드를 이용한 페인트에 속아버린 성배였다.

카윗은 성배가 옆으로 움직이면서 생겨난 틈으로 돌파를 시도했고, 역동작에 걸린 성배는 이에 대응할 수 없었다.

“그대로 강하게 슈팅!!”

‘나가거나 막아라, 좀.’

카윗의 슈팅을 보면서 속으로 주문을 걸었다.

이번 시즌 마지막 경기이자 마지막 홈 경기였다.

어지간하면 좋은 성적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골! 골입니다! 디르크 카윗의 선제골! 리버풀이 1-0으로 앞서나갑니다!”

“굉장히 멋진 플레이였어요. 최근 조금씩 떠오르고 있는 주성배 선수를 완벽하게 제쳐내면서 득점까지 성공하는 모습, 멋지네요.”

카윗은 제라드에게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성배는 조코라에게 도움을 받지 못했다.

이런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번 대결이 일대일 대결이었고, 성배가 일대일 대결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건 좀 아프네.’

프리미어리그 입성 이후, 성배는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왔다.

몇몇 선수들과의 대결에서 고전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특별히 기량에서 밀린 적은 없었다.

스피드를 앞세우는 선수들과 상대했을 때는 대부분 우세한 경기를 펼쳤고, 테베즈와 붙었을 때는 크게 밀렸지만, 경기 전체를 따지면 오히려 토트넘에게 유리한 대결이었다.

‘일대일에서 이렇게 발리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박인진과 비슷한 스타일이지만, 박인진보다는 개인 득점력이 더 뛰어났다.

크로스와 슈팅을 배제하고 상대할 수 있었던 박인진에 비해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많았고, 자신의 장점인 수싸움에서 우위를 잡기가 힘들었다.

‘오늘 경기 때문에 앞으로 힘들어질 수도 있겠는데.’

아직 자신에 대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인상적인 활약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박인진과 카윗, 이 두 선수에게 고전하면서 다른 팀들에게 자신의 공략법을 노출하고 말았다.

선택지가 많은 다재다능하고 헌신적인 선수 혹은 개인 기량에서 완전히 압도적인 선수.

이 두 가지 유형의 선수는 성배도 상대하기 힘들었다.

‘다음 시즌 준비하려면 바쁘겠네.’

결국, 답은 한 가지였다.

다른 클럽들이 자신의 공략하는 것보다 먼저 기량을 끌어올리는 것.

이번 휴식 기간도 쉴 시간은 없었다.

***

리버풀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나쁘지 않은 경기를 펼치고도 0-2 패배를 기록한 토트넘은 그렇게 리그 일정을 마무리했다.

14승 12무 12패. 승점 54점으로 리그 10위였다.

[주성배, 토트넘 후반기 반격의 열쇠. 겨울 이적시장 최고의 영입 1위 선정!]

성배의 영입 전까지 21경기에서 6승 6무 9패, 승점 24점에 머물렀던 토트넘은 이후 17경기에서 8승 6무 3패, 승점 30점의 반전을 이뤄냈다.

21경기 35실점의 수비진은 17경기 16실점으로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선보였다.

우드게이트도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지만, 어떤 경기에서도 안정적인 수비력을 보여주고 위력적인 공격력으로 상대를 움츠러들게 한 성배의 역할도 만만치 않았다.

킹과 우드게이트가 부상으로 빠지면 수비라인 조율의 임무까지 맡아 수행했으니 높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고작 1,000만 유로의 이적료로 대박을 터뜨린 것이었다.

‘이번 시즌은 이상할 정도로 오른쪽에 사람이 없었어.’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성배는 자신의 활약에 대한 평가에 엄격했다.

아약스에서 5골 8어시스트, 토트넘에서 4골 4어시스트로 총 9골 12어시스트를 기록했음에도 만족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약스 시절과 비교해 토트넘 이적 후, 공격 포인트의 개수를 비롯해 경기에 미치는 영향까지도 떨어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리그 수준을 감안하면 굉장히 훌륭한 활약이었음에도 여전히 만족할 수 없었다.

‘좋은 윙어들은 거의 다 왼쪽에 있어.’

성배가 이번 시즌 활약에 대해 불만을 갖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프리미어리그에는 이상하게 좋은 윙어들이 왼쪽에 몰려 있었던 것이었다.

‘반 페르시, 아넬카, 긱스, 페트로프, 애쉴리 영, 다우닝, 페데르센에 라이언까지 다 왼쪽, 호날두, 흘렙도 우리와 경기할 땐 왼쪽에서 나왔지.’

오른쪽과 왼쪽에서 번갈아 나오는 선수들도 토트넘과 경기할 때는 이상하게 대부분 왼쪽으로 출전했다.

그러니 진짜 A+급 이상 되는 선수들과는 붙어본 적이 없었다.

아직 검증이 덜 된 것이었다.

‘라이트-필립스, 칼루, 월콧, 카윗, 인진이 형. 이 정도가 최고 레벨인가.’

성배가 상대해본 오른쪽 윙어들은 물론 모두 좋은 선수들이었고, 성배를 고생시킨 선수들이었지만, 왼쪽 윙어들의 면면과 비교하면 살짝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최전성기에 다다른 선수들이 대부분인 왼쪽 윙어들에 비해서 오른쪽 윙어들은 칼루, 월콧, 밀너, 벤틀리에 같은 팀의 레넌까지.

아직 기량이 올라오지 않은 유망주가 많았다.

‘점점 버티기는 힘들어지겠어.’

아직 세계 축구계는 중앙 라인을 중심으로 돌아갔고, 측면은 중앙이 고전할 때 활로를 열어주는 역할에 그치고 있었다.

하지만 늦어도 3년 안에 세계 축구계의 흐름은 중앙에서 측면으로 흘러갈 것이었고, 점점 측면을 맡은 선수들의 능력치는 상상을 초월해갈 것이었다.

‘여기까지만 올라오면 걱정할 건 없을 줄 알았는데.’

지금 성배는 모든 레프트백을 대상으로 순위를 매겼을 때 최소한 스무 번째 안에 든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전생에서는 이 자리까지만 올라오면 아무 걱정도 없이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어느 위치이든, 그 자리에 올라가면 어울리는 고민거리가 또 생겼다.

‘적어도 아자르나 네이마르 같은 친구들한테 밀리지 않을 정도는 되어야지.’

자신의 욕심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성배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더 이상 서른여섯의 노장이 아니다. 스물한 살의 유망주라고.’

스물한 살의 어린 선수가 더 높은 곳에 대한 열망이 없다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전생의 꿈은 모두 다 이룬 것이긴 했다.

하지만 전생부터 해서 축구에 모든 것을 다 바쳐온 인생이었고, 아직은 조금 더 축구에 미치고 싶었다.

***

“여기! 주최자가 제일 늦으면 어떡하냐!”

“미안. 중간에 전화 좀 받느라고.”

시즌을 끝낸 성배는 바로 벨기에로 날아와 국가대표 친선 경기를 위해 대표팀에 합류했다.

그리고 경기를 위해 출국하기 전에 선수들을 또 한 번 불러모았다.

성배가 도착했을 때, 약속 장소에는 베르통헨과 데 뮬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프랑스계인 콤파니는 이들과 조금 떨어져서 어색하게 앉아있었다.

“이젠 떴다, 이거지? 우리는 이제 너를 기다리는 게 당연하다, 이거 아냐?”

베르통헨의 장난기 어린 말에 주변 선수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이 세대의 벨기에 선수들 중 가장 성공한 선수는 누가 뭐래도 성배였다.

어느새 콤파니까지도 밀어내고 벨기에 최고의 유망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었다.

벨기에 축구팬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프리미어리그로 이적해 성공적으로 자리 잡은 성배와 함부르크에서 크고 작은 부상과 그로 인한 적응 실패로 2년을 흘려보낸 콤파니.

상황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는 다시 내 위로 올라가겠지만.’

콤파니의 성공과 잠재력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역전되더라도 잠깐이나마 콤파니를 넘어섰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뱅상.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 그만 좀 다치라고.”

성배는 혼자 어색하게 앉아있던 콤파니 옆에 앉았다.

계속된 부상으로 국가대표팀 합류가 뜸해졌던 콤파니였다.

얼굴을 보지 못한지 반년이 넘었지만, 그래도 선수생활을 시작했을 때부터 함께 한 두 사람은 여전히 친분이 깊었다.

“미안하다. 그런데 내가 다치고 싶어서 다치는 건 아니니까.”

콤파니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사실 덩치에 비해서 부상 빈도가 잦은 콤파니였다.

이는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이었고, 콤파니의 유일한 약점이 될 것이었다.

“내가 너 같은 몸을 가지고 있었으면 진짜 어마어마했을 텐데. 그 몸 그따위로 쓸 거면 나한테 넘겨라.”

나중에 분명 크게 성공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안타까웠다.

조금 친분이 쌓였다고, 그리고 자신이 지금은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고 건방을 떠는 것이었다.

‘내가 콤파니 걱정을 다 하고. 많이 컸구나.’

물론, 콤파니의 신체가 부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자신에게 저런 몸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머리 아프게 고민해가면서 뛰지 않았을 것이었다.

처음부터 신체 능력과 경험을 믿고 자신 있게 뛰었을 것이었고, 그렇게 되었으면 이미 세계 최고의 수비수가 되었을 거라 자신할 수 있었다.

“뭐, 미안하게 됐다. 그런데 이것도 마찬가지로 내가 갖고 싶어서 가지게 된 건 아니니까.”

“이, 얄미운...”

“뭐야? 시간 다 되었는데 이것밖에 안 왔어?”

“와, 늦은 줄 알고 뛰어왔는데.”

약속 시간까지 5분 정도가 남은 시점부터 우르르 선수들이 몰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특징이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선수이 프랑스계는 프랑스계끼리, 네덜란드계는 네덜란드계끼리 함께 왔다는 것이었다.

‘흠. 이것들을 어떻게 붙여놓나.’

성배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 낭만필드 - 140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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