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39 >
‘확실히 까다롭긴 하네.’
뉴캐슬과의 경기 이후에도 토트넘의 롤러코스터 경기력은 계속되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선 이하로는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아서 7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달렸다.
하지만 좋을 때는 빅4도 부럽지 않은 경기력을 보이다가 좋지 않을 때는 팬들의 인내심을 시험하기도 하는 등 그 폭이 작아졌을 뿐, 롤러코스터 운행을 중단한 것은 아니었다.
“볼턴이 볼을 차지합니다. 캄포에게 연결, 네, 그렇죠. 당연히 전방으로 때려 넣습니다.”
리그 36라운드, 토트넘은 볼턴을 홈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전반전을 끝내고 후반전이 시작되는 현재 시점까지 0-0의 균형을 깨지 못하고 있었다.
“아! 밀려 넘어집니다! 그리고 주심의 휘슬, 프리킥입니다.”
볼턴을 상대로 토트넘이 고전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샘 앨러다이스 감독 부임 이후부터 시작되어 이제는 그가 떠났음에도 볼턴을 상징하는 전술이 된 ‘킥 앤 러쉬’.
그 전술 때문이었다.
“가난한 구단인 볼턴에게 다른 방법이 많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원망스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네요. 왜 하필이면 제가 이 경기를 중계하게 되었을까요? 개리! 이안! 보고 싶어요!”
팬들이 가장 싫어하는 프리미어리그 구단 1위.
늦은 밤, 잠이 오지 않을 때 보기 좋은 경기 1위.
볼턴의 팀 컬러를 대변하는 설문 조사 결과였다.
볼턴은 오늘도 자신들의 전술로 토트넘을 늪에 빠뜨리고 있었다.
‘둘 다 아무것도 못 하는구나.’
볼턴의 축구 철학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우직한 열 명과 천재적인 한 명’이었다.
피지컬과 높이를 앞세운 선수들로 열 명을 채우고, 한 명의 테크니션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시즌의 ‘한 명’이었던 아넬카가 첼시로 이적하면서 우직한 선수들로만 팀이 꾸려졌다.
“볼턴으로서는 절대 놓칠 수 없는 프리킥 찬스입니다. 물론, 무승부만 거두어도 강등권 싸움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지만, 토트넘이 언제까지고 이렇게 조용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볼턴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가 바로 이 세트피스죠. 피지컬이 뛰어난 선수들을 모아놓은 만큼, 기회를 잘 살려야 할 거예요.”
볼턴이 자랑하는 장신 군단, 스타인슨과 케이힐, 오브라이언, 캄포 등이 토트넘 박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타켓맨 중 한 명인 케빈 데이비스 역시 자리를 잡았다.
‘지면 안 되는데...’
볼턴의 세트피스 공격력은 이미 유명했다.
아넬카가 빠진 이후 이렇다 할 공격수 없이도 강등권으로 떨어지지 않은 것은 이 세트피스 덕분이었다.
프리미어리그 20팀 가운데 득점 순위는 18위였지만, 세트피스 득점 순위는 7위에 올라있는 볼턴의 세트피스는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성배는 마땅한 역할이 없었기에 골 포스트 옆에 서서 동료들을 응원할 뿐이었다.
“놀란의 프리킥!”
볼턴 수비수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성배도 볼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혹시나 볼이 날아왔을 때를 대비했다.
“스타인슨, 헤더!!”
성배가 걱정했던 대로 놀란의 프리킥은 토트넘 선수들의 머리를 넘어 스타인슨에게 연결되었다.
190cm에 육박하는 선수들이 넷이나 되는 볼턴이었다.
토트넘도 신장이 작은 팀은 아니었지만, 수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막았다.’
스타인슨의 헤더는 토트넘 골문을 향해 위협적으로 날아왔다.
골키퍼 체르니는 반대편 측면 쪽에 있었다.
성배가 대신 볼을 막기 위해 다리를 들어 올렸고, 종아리로 막아내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주! 다시 케이힐! 골! 들어갔습니다! 볼턴의 선취 골! 케이힐의 이번 시즌 첫 번째 득점입니다!”
‘젠장. 운도 지지리도 없지.’
가까스로 한 골을 막아냈다고 생각했지만, 하필이면 세컨 볼이 케이힐의 앞에 떨어졌다.
수비수라고는 하지만, 그냥 밀어 넣기만 되는 것을 놓칠 리 없었다.
‘저 밀집수비를 어떻게 뚫어내느냐가 관건인데.’
아쉬운 실점이었지만, 아쉬움을 곱씹기보다는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선택했다.
밀집수비의 대처 방안은 몇 가지가 있었다.
압도적인 크랙이 존재하고, 그의 활약에 맡기는 방법,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세트 피스 상황을 통해 공략하는 방법도 일반적이었다.
‘크랙? 없고, 세트 피스는... 우리가 불리해.’
하지만 이 두 가지 방안은 현재 상황에 맞지 않았다.
킨이나 베르바토프, 레넌, 말브랑크 등은 좋은 선수였지만,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는 선수일 뿐, 혼자서 경기 분위기를 바꿀 정도의 선수는 아니었다.
세트 피스에서는 장신 군단 볼턴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결국 오버래핑이 답인데.’
밀집수비라고 해도 중앙에 비하면 공간이 생길 수밖에 없는 측면을 공략하는 방법도 있었다.
밀집수비의 공략은 틈을 만들어내고 공략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 만큼, 성배의 역할이 중요했다.
파트너인 심봉다 역시 공격력이 좋은 선수였기 때문에 현 상황에서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방법이었다.
‘빨리 오버래핑을 주문하라고.’
성배의 예상은 쓸만했지만, 결정은 어디까지나 감독의 몫이었다.
“토트넘이 더욱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서는 모습입니다. 아무래도 한 골을 먼저 내줬기 때문에 만회 골이 시급한 상황입니다.”
“볼턴의 밀집 수비를 극복할 필요가 있어요. 벌써 60분 가까이 고전하고 있는데, 이제는 깰 때도 됐죠.”
한 골 차이의 리드를 잡은 것은 볼턴의 경기 운영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
여전히 볼턴 선수들은 라인을 바짝 내렸고, 한 명의 선수만을 토트넘 진영에 올려놓았다.
“레넌이 심봉다에게 밀어줍니다! 심봉다의 빠른 돌파!”
공격력이 아주 뛰어난 건 아니었지만, 심봉다의 공격력도 만만치는 않았다.
상대를 괴롭힐 정도의 역량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심봉다, 측면에서 크로스!”
볼턴의 밀집 수비를 뚫고 심봉다가 측면에서 크로스를 올려주었다.
‘길어!’
하지만 심봉다의 크로스는 평범한 수준으로, 그리 정확하지 못했다.
지금처럼 프레셔가 가해질 경우에는 더욱 심했다.
‘지금쯤 만회해야 해.’
더 이상 만회 골이 늦어지면 이 경기를 승리로 이끌기가 힘들다고 판단한 성배는 볼이 떨어질 만한 위치로 빠르게 움직였다.
“케이힐이 머리로 걷어내지만, 멀리 가지 않습니다!”
머리로 걷어낸 볼은 멀리 날아가지 않았다.
페널티박스 바로 바깥에서 대기하던 캄포가 볼을 걷어내기 위해 발을 들어 올렸다.
‘좋아, 한 번 해보자.’
캄포는 자신의 명치보다 조금 더 높은 위치에서 볼을 걷어내기 위해 발을 들었다.
성배는 캄포의 발이 높은 것을 확인하고 어금니를 꽉 물었다.
“캄포가 걷어, 아앗! 주의 머리와 충돌합니다!”
성배의 의도대로 캄포는 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 발에 머리를 가져다 댄 성배는 발에 차이기 직전에 고개를 돌리면서 들어 올렸다.
물론, 뒤로 쓰러지며 얼굴을 감싸 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주심, 프리킥을 선언합니다.”
“정말 위험한 플레이였어요. 캄포의 발이 너무 높았죠?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요.”
성배가 의도적으로 머리를 가져다 댄 것이기는 하지만, 위험한 플레이였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충분히 파울이 선언될 만한 플레이였다.
“어우! 보기만 해도 아찔합니다.”
“다행히 주의 반응이 빨랐네요. 피하는 것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큰 부상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느린 화면으로 다시 돌려보면서 중계진은 본인이 당사자가 된 것처럼 가슴을 쓸어내렸다.
“열정적으로 뛰는 것은 좋고,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래도 위험한 플레이는 삼가야죠. 그러다 부상이라도 당하면 토트넘에도, 벨기에 대표팀에도, 무엇보다도 주성배 선수 본인에게도 큰 손해입니다.”
잠시 누워서 휴식을 취하며 주변 정황을 살피던 성배는 주심이 들것을 부르기 직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을 부여잡으며 고개를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찰 수 있겠어?”
아직도 충격이 남아있는 것처럼 연기하는 성배에게 속은 동료들은 성배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캄포의 발에 얻어맞기는 했지만, 충격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프리킥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동료들은 이를 알 수 없었다.
“아아, 괜찮아. 조금 있으면 아프지도 않을 텐데, 뭐.”
괜찮다고 말해도 믿지 못하겠는지 동료들은 연거푸 성배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렇게까지 중요한 존재였나, 내가?’
사실 친분이 있는 선수는 그리 많지 않았는데, 대부분의 선수들이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었다.
같은 팀 선수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팀에 중요한 존재여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
“다행히 일어나서 프리킥을 준비합니다. 큰 부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부상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죠.”
멀쩡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모습에 토트넘 홈팬들과 중계진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음... 기분이 묘하네.’
어쨌든 프리킥은 성배의 몫이었다.
손안에서 볼을 휘휘 돌리다가 마음에 드는 무늬를 발견한 성배는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이야.’
수비적인 경기 운영은 많이 뛰어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얼핏 보면 체력 소모가 적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수비는 기본적으로 수동적인 행위였고, 상대방의 움직임에 따라다니는 것은 비교적 체력 소모가 큰 편이었다.
토트넘보다 볼턴 선수들이 먼저 체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들어가면 이후부터는 우리 페이스가 된다.’
그래서 지금이 좋은 시간대였다.
점점 체력에 부담을 느낄 시간이었고, 지금 동점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순식간에 무게추가 쏠릴 가능성이 높았다.
리드가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정신적인 압박감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알 합시 골키퍼, 수비진에게 계속 소리칩니다.”
“긴장될 수밖에 없죠. 주성배 선수의 프리킥 실력은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졌거든요? 비록 잉글랜드 무대에서는 선발 데뷔전에 골을 기록한 이후 소식이 없지만, 그렇다고 위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죠.”
성배의 프리킥 득점은 5에서 넉 달 가까이 멈춰 있었다.
전반기에만 네 골을 넣으면서 노려보았던 시즌 최다 프리킥 득점도 멀어졌다.
‘하나 성공할 때도 됐어.’
아무리 전담 키커로 인정받고 있고, 팀 내에서 밀어주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성공하지 못하면 압박이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잘 들리지도 않는 수준이었지만, 벌써 프리키커 교체의 필요성을 말하는 팬들도 있긴 있었다.
“주심이 휘슬을 불었고, 주도 슬슬 움직입니다.”
중요한 프리킥이었다.
오늘 경기에서도, 성배 자신에게도.
성배는 침착하게 숨을 고르면서 머릿속을 비웠다.
어차피 시도할 수 있는 프리킥의 종류는 정해져 있었다.
정확도만이 살 길이었다.
‘간다.’
머릿속을 비운 성배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옆으로 조금씩 움직여 각도를 만들었고, 마음에 드는 각도를 발견한 뒤, 볼을 향해 달려들었다.
“주, 달려들면서 슈팅!”
먼 포스트를 향해 인프런트로 감은 평범한 프리킥이었다.
“알 합시, 몸을 날립니다!”
하지만 아시아 최고의 골키퍼라고 평가되는 알 합시도 만만치 않았다.
뛰어난 신체 조건과 반사신경을 이용, 곧바로 볼을 따라잡았다.
“골! 골이에요!! 드디어 주의 프리킥이 터졌어요! 시즌 여섯 번째 프리킥 골!”
알 합시는 분명 볼을 잘 따라갔지만, 성배의 킥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평범한 프리킥처럼 골대 상단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낮게 감았기 때문이었다.
볼턴 선수들이 세운 벽의 옆으로 크게 감아서 때린 성배의 슈팅은 그 덕분에 낮은 궤도를 가질 수 있었고, 골라인 바로 앞에서 바운드되었다.
골키퍼가 가장 막기 어려워한다는 원바운드 슈팅이었다.
“멋진 프리킥입니다! 알 합시 골키퍼가 힘껏 손을 뻗어봤지만, 닿지 않았습니다!”
“절묘한 바운드가 알 합시를 농락하네요! 좋은 킥이에요.”
아무래도 벽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낮은 프리킥은 생각보다 어려운 테크닉이었다.
킥에 자신이 있는 성배도 수비벽 사이에 자리를 잡고 파고들어서 공간을 만들어준 동료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시도하기 어려웠을 것이었다.
“자, 자!! 이제 동점이야! 조금 더 집중하라고!”
동점을 만들어내면서 경기를 원점으로 돌렸지만, 이 정도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홈팬들 앞에서 강등권의 볼튼을 상대로 고전하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무조건 승리가 필요했다.
< 낭만필드 - 13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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