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38 >
[위클리 플레이어]에서의 발언은 잉글랜드 내에서 어느 정도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특히 맨체스터 시티 팬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그들은 반은 장난삼아, 반은 성배의 말이 현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성배에게 ‘Prophet’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선지자, 혹은 예언자라는 뜻이었는데, 기독교나 이슬람교의 정신적 지도자를 가리키는 단어로 많이 쓰이는 단어였다.
그 정도로 맨체스터 시티 팬들은 간절했다.
“첼시전 이후의 토트넘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오늘도 뉴캐슬을 맞이해 주도권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성배의 인터뷰에 대한 반응이 어떻든 프리미어리그 일정은 계속되었다.
첼시전 이후 정신을 차린 토트넘은 포츠머스를 가볍게 꺾었고, 13위의 뉴캐슬을 홈으로 불러들였다.
인지도와 규모에 비해 성적이 좋지 않은 두 팀이었기에 순위와 관계없이 물러설 수 없는 대결이기도 했다.
“토트넘은 라모스 감독 부임 이후에 칼링컵 우승 트로피까지 차지하면서 궤도에 오른 모습이죠. 이와는 반대로 뉴캐슬은 앨러다이스 감독을 경질하고 키건을 데려왔지만, 여전히 헤매고 있어요.”
불과 4년 전, 그러니까 90년대 말부터 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뉴캐슬은 프리미어리그를 대표하는 강팀 중 하나였다.
승격 시즌에 바로 3위를 차지했고, 이후 몇 시즌 동안 챔피언스리그 존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구단주의 무리한 투자와 방만한 경영으로 한때 구단 부채가 1억 파운드까지 치솟았고, 그대로 몰락했다.
리즈 유나이티드의 전철을 밟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버트, 비두카를 향해 스루 패스!”
하지만 여전히 경쟁력 있는 선수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부상으로 폼이 많이 떨어졌지만, 여전히 ‘원더 보이’인 마이클 오웬과 호주의 레전드, 마크 비두카, 나이지라아산 ‘스피드 스타’, 오바페미 마틴스가 버티는 공격진이 특히 그랬다.
‘비두카에게 스루 패스는 안 어울려.’
하지만 그들도 전성기에서 살짝 꺾인 시점에서 뉴캐슬에 합류한 선수들이었다.
여전히 경쟁력은 있었지만, 정상을 노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먼저 길목을 차지하면서 막아냅니다! 주의 영리한 수비!”
“상대 수비진에 빠른 선수가 있을 때 비두카를 향해 들어가는 스루 패스는 자살 행위죠. 비두카는 힘이 좋은 선수이기 때문에 경합을 시켜주는 것이 좋아요.”
비두카는 전성기에서 내려오면서 스피드가 확 떨어졌고, 오웬 역시 잦은 부상으로 원더 보이 시절의 스피드를 거의 다 잃어버렸다.
비두카는 타겟형 스트라이커가 되었고, 오웬은 인자기와 같은 유형의 스트라이커가 되었다.
돌파는 다른 선수들의 몫이었다.
“주가 아무 부담도 없이 비두카를 수비하러 왔다는 것도 문제 아닙니까?”
“맞아요. 사실, 오늘 경기에서 뉴캐슬의 문제점을 꼬집는 것보다 문제점이 아닌 것을 언급하는 게 더 빠르겠네요.”
성배는 오늘 수비에서 전혀 부담감을 느끼지 못했다.
오른쪽 측면 미드필더로 나선 은지탑의 원래 포지션은 라이트백이었다.
라이트백 베예는 좋은 선수였지만, 뛰어난 수비력에 비해 공격력이 밋밋한 선수였다.
“돌파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요. 그나마 돌파를 시도할 만한 선수는 마틴스인데, 마틴스 선수도 원래 중앙에서 활동하는 선수인 만큼 오웬과 계속 동선이 겹치고 있어요.”
더프의 부상 이후 뉴캐슬 공격의 위력은 반감되었다.
킹이 또다시 부상으로 빠졌지만, 우드게이트가 돌아온 토트넘의 수비를 뚫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파울입니다. 먼저 자리 잡은 주의 수비를 떨쳐내지 못하고 결국 손을 쓰고 말았습니다.”
비두카의 지금 모습이 오늘 뉴캐슬 공격진의 모습과 같았다.
미리 자리를 선점하고 진로를 막아낸 성배를 밀어내지 못해 답답한 나머지 손으로 밀어버린 비두카.
그의 플레이가 뉴캐슬 모든 선수들의 심정을 대변했다.
“주에게 연결되는 볼! 은지탑이 달려와 막아섭니다.”
공격적으로는 형편없는 뉴캐슬의 오른쪽 측면이었지만, 이들에게도 장점은 있었다.
말했던 것처럼 두 선수 모두 라이트백이 원래 포지션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단단한 수비력을 보여주었다.
또한, 두 선수 모두 강력한 피지컬을 갖추고 있었다.
‘혼자 돌파하기는 힘들어.’
성배에게는 상극인 선수들이었다.
은지탑은 몰라도 베예는 발까지 빨랐기 때문에 단독 돌파를 시도하다가는 끈 떨어진 연처럼 날아가 처박힐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지.’
다행히도 성배는 직접 돌파 외에도 몇 개의 공격 옵션을 더 가지고 있었다.
사실 직접 돌파는 성배가 가장 선호하지 않는 공격 옵션이었다.
체력 소모도 심하고 효율도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방으로 길게 넘어갑니다!”
“주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롱패스죠!”
은지탑은 피지컬이 좋지만, 스피드는 빠르지 않았다.
옆으로 방향을 틀어서 은지탑의 압박을 벗어난 성배는 이젠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롱패스로 뉴캐슬 수비진을 공략했다.
“베르바토프, 가슴으로 받아내서 오른쪽의 오하라에게 연결합니다.”
중원 장악력이 약한 토트넘의 공격 전개에 숨통을 트이게 해준 것이 바로 성배의 롱패스였다.
이제는 공격진의 개인 기량 못지않게 중요한 공격 루트가 되었고, 여기서 파생되는 공격 전술도 상당 부분 만들어진 상황이었다.
“오하라, 끌지 않고 얼리 크로스! 로비 킨!!”
최후방에서 한 번에 볼이 넘어오기 때문에 상대 수비진의 전열이 채 갖춰지기 전에 공격수들에게 볼이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면 위협적인 장면을 만들어낼 확률도 높았다.
“헤더!! 들어갑니다! 로비 킨의 골! 토트넘, 먼저 한 골을 넣으며 앞서 나갑니다!”
토트넘의 빠른 공격에 뉴캐슬의 느린 중앙 수비수들의 반응이 늦었다.
성배의 킥 이후 베르바토프가 투 터치, 오하라가 투 터치, 겨우 네 번의 터치로 문전 앞까지 이어진 빠른 전개를 따라가지 못한 것이었다.
수비수들의 느린 반응은 로비 킨의 득점으로 이어졌다.
“뉴캐슬은 주의 저 롱패스를 어떻게 해야 할 거예요. 평균 신장이 하위권에 속하는 뉴캐슬로서는 저 패스를 막지 못하면 고전할 수밖에 없거든요?”
“사실 뉴캐슬의 전 감독인 샘 앨러다이스 감독의 ‘빅샘 스타일’이 저런 전술이지 않습니까? 그가 원했던 모습이 이런 모습일까요?”
“글쎄요. 큰 틀로 보자면 비슷하지만, 흔히 말하는 ‘킥 앤 러쉬’가 ‘빅샘 스타일’이라면, 주의 롱패스는 그것과는 좀 다르죠. 타겟형 스트라이커에게만 향하지 않고 공간이 있는 선수 모두에게 향하거든요.”
돌파는 많이 보여주고 있지 못했지만, 성배는 잊을만하면 롱패스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발이 느린 은지탑의 압박에는 한계가 있었고, 성배의 롱패스를 막지 못하는 한, 뉴캐슬의 고전은 계속될 것으로 보였다.
“오른쪽으로 전개, 은지탑에게 연결됩니다.”
볼을 건네받은 은지탑은 자세를 낮추면서 성배를 등졌다.
뭔가 옛날이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자자...’
안더레흐트 시절, 지금과 똑같은 장면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버둥거렸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피지컬이 뛰어났고 다른 장점이 부족했던 자자, 그런 자자를 상대로 피지컬 하나를 극복하지 못해서 밀려났던 기억이었다.
‘그게 언제적 이야기인데.’
3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지난 3년 동안 죽어라 훈련해왔고, 그 정도 약점은 이미 옛날에 극복했다.
“은지탑! 돌아서지 못합니다!”
뒤에서 굳건히 버티고 선 성배는 은지탑의 힘에 밀리지 않으며 잘 버텨주고 있었다.
은지탑의 등과 자신의 배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서 오히려 밀어내는 중이었다.
수비수를 등진 채로 공격수가 할 수 있는 것은 백패스와 횡패스 외에는 없었다.
테크니션이라면 멋지게 돌아서면서 드리블 돌파로 이어갈 수도 있겠지만, 은지탑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지금!’
은지탑이 자신에게 조금씩 밀리면서 버텨내기 위해 더 큰 힘을 가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성배는 힘을 빼면서 옆쪽으로 몸을 빼냈다.
“뒤로 넘어집니다! 파울 아닙니다! 주, 빠르게 치고 나가면서 역습 시도!”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은 은지탑은 보이지 않게 유니폼을 잡아당긴 성배로 인해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심판들이 보기에는 자신의 힘에 못 이겨 혼자 넘어진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휘슬은 울리지 않았고, 성배는 이미 저 멀리까지 치고 나가 있었다.
‘돌파는 이럴 때 해야지.’
정교한 롱패스와 빠른 스피드, 뛰어난 축구 지능까지.
적지 않은 장점들과 이를 적절히 이용할 수 있는 영리함이 더해져 아무리 망해도 1인분은 할 수 있는 안정적인 선수로 성장한 성배였다.
어떤 선수든지 상황에 맞는 플레이만 할 수 있다면 1인분은 간단했다.
“측면 비었습니다! 돌아나가는 말브랑크, 바로 패스 연결됩니다!”
은지탑이 아웃되면서 뉴캐슬의 오른쪽 측면을 베예 혼자 담당하고 있었다.
성배의 돌파를 무시할 수 없었던 베예가 살짝 전진했고, 말브랑크는 그 뒷공간을 놓치지 않았다.
바튼을 뒤에 달고 공간으로 움직이는 말브랑크에게 성배의 공간 패스가 이어졌다.
“논스톱 크로스, 가 아닙니다! 한 번 접고 바깥으로! 허들스톤!!”
토트넘의 공격이 눈 깜짝할 사이 뉴캐슬의 골문을 위협했다.
당황한 뉴캐슬 선수들은 간격을 신경 쓸 정신도 없이 허겁지겁 아래로 내려왔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페널티 박스 바깥에 대한 견제가 헐거워진 상황이었다.
말브랑크는 그런 상황을 놓치지 않았다.
“강한 슈팅이 그물을 찢어버립니다! 허들스톤의 괴력! 엄청난 슈팅이 나왔습니다!”
그물이 찢어질까 걱정되는 슈팅 파워로 유명한 허들스톤의 중거리 슈팅이 폭발했다.
파워에 비해 정확도가 아쉬운 면은 있었지만, 정확하게 날아가기만 한다면 막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지금 것을 막기 위해서는 하퍼 골키퍼가 손목을 걸었어야 했을 것이었다. 그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토트넘의 빠른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뉴캐슬, 분위기 전환이 필요해 보입니다.”
앨러다이스 감독의 ‘빅샘 스타일’은 뉴캐슬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새롭게 감독이 된 키건도 뉴캐슬 특유의 이름값에 의존한 영입과 앨러다이스 감독의 입맛에 맞는 영입이 섞인 현재의 뉴캐슬 선수단으로는 자신의 축구를 보여줄 수 없었다.
“어쨌든 오늘 토트넘의 경기력은 굉장히 좋네요.”
“전반기에 이런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지금쯤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을 놓고 경쟁했을 텐데, 아쉽습니다.”
사실 지금도 경기력이 들쭉날쭉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립서비스도 아닌 것이 오늘의 경기력은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이런 경기력을 전반기부터 유지할 수만 있다면 챔피언스리그 진출도 꿈은 아니었다.
2-0으로 간단하게 뉴캐슬을 꺾은 토트넘은 웨스트햄과 승점 44점으로 동률을 이뤘다.
승점은 같아졌지만, 여전히 리그 내 팀 득점 순위 2위에 올라있는 공격진을 보유한 토트넘은 골 득실에서 웨스트햄을 크게 앞섰고, 웨스트햄을 11위로 밀어내며 10위로 올라섰다.
10위 안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이번 시즌이 시작한 이후 처음이었다.
10위도 만족할만한 성적은 아니었지만, 토트넘 팬들은 그래도 리그를 두 그룹으로 나눴을 때 상위권에 들어가는 순위라며 서로를 위로했다.
< 낭만필드 - 13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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