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135화 (275/356)

< 낭만필드 - 135 >

‘아직 체력은 여유가 있어.’

성배는 아직 체력에 여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공격이 잘 풀렸기 때문에 오버래핑을 자제하고 수비에 집중하다가 후반전 중반이 되어서야 공격적으로 나섰기 때문이었다.

‘연장전인데... 승부차기를 생각하고 수비적으로 가느냐, 아니면 연장전이 끝나기 전에 승부를 보느냐, 인데...’

토트넘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첼시의 분위기가 나쁜 것도 아니었다.

양 팀 모두 경기력이 괜찮은 상황이었고, 어떤 선택을 하든 감독의 성향 차이일 뿐이었다.

‘첼시는 분명히 공격적으로 나올 텐데. 우리는 어떻게 가려나.’

무리뉴 감독이 수비적인 전술을 구사하다가 아브라모비치 구단주에게 찍혀서 해임된 상황에서 그보다 커리어에서 한참 밀리는 그랜트 감독이 수비적인 전술을 선택할 리 없었다.

라모스 감독으로서는 고려해야 할 것이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뭘 어떻게 하든 시키는 대로.’

어차피 전술상의 책임은 감독에게 있는 것이었다.

자신은 감독이 주문하는 전술 하에서 최선의 모습을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연장전이 시작됩니다! 이제 30분만 더 지나면 2007/08시즌 칼링컵 우승 트로피의 주인공이 가려집니다!”

“글쎄요, 하하. 30분이 지나서 가려질지, 아니면 30분에 30분이 더 지나야 가려질지는 아무도 모르죠.”

짧은 휴식이 끝나고 다시 경기가 시작되었다.

9만여 석의 관중석은 경기가 길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득 차 있었다.

‘체력은 남아돈다, 이건가.’

연장전에는 남은 체력을 모두 쏟아부어 공격적인 플레이를 보이려 했던 성배지만, 일단은 수비에 신경 쓰는 중이었다.

라이트-필립스와 교체되어 들어온 칼루가 자신은 아직 체력에 여유가 있다는 것을 자랑하듯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짜 정신없게 뛰네.’

칼루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역시 왕성한 활동량과 날카로운 측면 움직임에 있었다.

라이트-필립스 만큼은 아니지만, 스피드와 돌파력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마냥 공격적으로 나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칼루가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카메라에 얼굴이 잡히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칼루 선수는 후반전 종반 즈음에 교체로 투입된 선수죠. 정규 시간이 지나고 연장전에 돌입한 만큼, 체력이 떨어진 다른 선수들의 몫까지 뛰어주는 저런 모습은 좋아요.”

교체 투입된 칼루와 발락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연장전의 첼시였다.

예상대로 그랜트 감독의 첼시는 공격적인 움직임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칼루에게, 미켈에게 돌려주고, 다시 칼루에게.”

칼루는 밑으로 내려가 볼을 받아주고 미켈에게 돌려준 뒤, 다시 앞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칼루의 그런 움직임을 예상하지 못한 미켈은 원터치로 칼루에게 볼을 돌려줬고, 역동작에 걸린 칼루는 빠르게 반응할 수 없었다.

‘지금이다!’

성배에게는 절호의 찬스였다.

칼루가 반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순간적으로 포착한 성배는 볼을 커트해내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주! 커트해냅니다!”

“역습 기회죠!!”

볼을 끊어낸 성배를 칼루가 열심히 따라왔다.

하지만 성배는 그런 칼루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차피 늦었어.’

거리가 많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 거리면 따라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성배는 칼루를 피해 중앙으로 움직이면서 전방의 패스 루트를 빠르게 탐색했다.

‘뛰어!’

성배가 볼을 커트함과 동시에 토트넘의 모든 선수들은 전방으로 달려나갔다.

중앙에서 살짝 왼쪽으로 이동해 달리는 로비 킨의 모습이 성배의 눈에 들어왔고, 지체하지 않고 왼발 아웃 프런트 패스로 왼쪽 측면을 향해 볼을 밀어주었다.

“로비 킨에게! 로비 킨, 왼쪽 측면에서 볼 잡았습니다!”

로비 킨은 테리와 벨레티 사이에서 치고 나와 왼쪽 측면으로 빠지며 볼을 잡았다.

‘저기가 비었다.’

성배도 멈추지 않았다.

로비 킨에게 볼을 내준 성배는 그가 왼쪽으로 빠지면서 비어버린 중앙 쪽으로 빠르게 달렸다.

“벨레티가 킨을 마크합니다!”

벨레티는 계속 로비 킨을 따라갔고, 테리는 중앙으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첼시 수비진에게 시간만 줄 것이었기 때문에 빠르게 처리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중앙으로 크로스! 막지 못합니다!”

노련한 로비 킨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드리블을 전혀 하지 않고 논스톱으로 중앙을 향해 올려준 로비 킨의 크로스가 베르바토프를 겨냥했다.

크로스의 속도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고, 뒷걸음질치며 중앙으로 움직이던 테리가 발을 뻗었지만, 걸리지 않았다.

뒤로 무게중심이 쏠린 상태에서 억지로 발을 뻗었던 테리는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여기!!”

그리고 넘어진 테리를 스쳐가는 선수가 있었다.

성배였다.

뒤에서부터 빠르게 달려온 성배는 테리가 넘어지며 비어버린 공간으로 침투하며 손을 들었다.

“논스톱 패스! 주!!”

로비 킨의 크로스를 받은 베르바토프의 터치와 연계력은 의심할 필요조차 없었다.

미켈이 열심히 달려왔지만, 베르바토프는 그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성배를 향해 볼을 투입했다.

‘됐다.’

이건 골이었다.

플레이가 끝날 때까지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건 골이었다.

“슈팅! 골! 골입니다! 주성배!! 주성배의 슈팅이 첼시의 골망을 가릅니다!!”

성배가 아무리 골 결정력이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골대 바로 앞에서 때린 슈팅을 놓칠 정도는 아니었다.

베르바토프가 띄워준 볼을 논스톱 발리 슈팅으로 연결한 성배의 슈팅은 그대로 첼시의 골문을 흔들었고, 토트넘은 연장 전반 초반에 리드를 잡았다.

“이 득점은 커요! 팽팽한 경기 분위기에서 토트넘이 리드를 잡아나가는 득점입니다! 첼시는 다급해질 수밖에 없어요!”

연장전 시작 이후 5분 만에 터진 성배의 득점에 웸블리 스타디움의 절반을 채운 토트넘 서포터들은 사자후를 내뱉었다.

웸블리 스타디움과 첼시, 토트넘의 홈구장은 모두 런던에 있었기 때문에 거리가 멀지 않아 관중석은 두 팀의 서포터가 정확히 반씩 차지하고 있었다.

“관중석의 절반은 축제, 절반은 침묵에 빠져 있습니다!”

관중석 분위기와는 반대로 첼시 선수들은 굉장히 바쁘게 움직였다.

발락은 골대 안에서 구르던 볼을 잡아 빠르게 하프라인으로 달려갔고, 나머지 선수들 역시 빠르게 자리를 잡아나갔다.

“이 자식이!! 완전 미쳤어!! 수비수 맞아?”

“수비수가 여덟 경기에 세 골이라니! 그 기운, 나한테 나눠줘!!”

하지만 토트넘 선수들은 급할 것이 없었다.

골의 기쁨을 한껏 누리고 있었고, 시간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으로 누릴 생각이었다.

“하하, 내가 주고 싶다고 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리그 네 경기, 칼링컵 세 경기, FA컵 한 경기에 출전한 성배는 세 골과 한 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경기당 0.5개의 공격 포인트를 올려주고 있었다.

특히 첼시와의 두 경기에서 두 골, 아스날과의 두 경기에서 한 골과 한 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중요한 더비에서 맹활약했다.

“더! 더 환호하라고! 더!!”

성배는 어울리지 않게 관중석을 따라 달리면서 환호를 유도했다.

성격에 맞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세레모니의 시간을 최대한으로 끌기 위한 것이었다.

“봤어!? 봤냐고! 방금 내가 넣은 거 봤어? 죽이지?”

‘이 정도면 아직 괜찮은가?’

관중들을 향해 소리치면서도 성배의 눈은 주심을 보고 있었다.

주심이 직접 휘슬을 불기 전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했다.

‘여기까지만 해야겠어.’

주심의 눈치를 보던 성배는 적당한 선에서 세리머니를 끊고 돌아왔다.

조금만 더 길어지면 카드를 주려고 했던 주심은 카드를 주기에는 살짝 애매하다고 판단한 것인지 구두경고로 끝냈다.

“자, 자!! 20분만 막아!!”

“20분! 20분! 조금만 더 힘내!!”

벤치의 라모스 감독과 주장 레들리 킹이 큰 소리로 선수들을 독려했다.

20여 분. 길지 않은 이 시간만 버텨낸다면 토트넘에게 9년 만의 우승 트로피가 주어질 것이었다.

“막아! 막으라고!”

이후에는 정말 치열한 경기가 펼쳐졌다.

어떻게든 한 골 차이를 지켜서 우승컵을 들어 올리려는 토트넘.

어떻게든 골을 넣어서 승부를 이어가려는 첼시.

두 팀의 경기는 총칼 없는 전쟁이란 말이 어울렸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첼시, 급해집니다!”

첼시는 포백 라인의 선수들까지 전부 하프라인을 넘어올 정도로 공격에 모든 것을 집중했다.

“길게 띄워줍니다! 주, 걷어냅니다!”

맨유가 토트넘을 상대하며 재미를 봤던 것처럼 첼시도 성배에게 칼루를 붙여서 피지컬 승부를 시도했다.

하지만 테베즈였으니 성배가 그렇게 밀렸던 것일 뿐, 칼루를 상대로는 쉽게 밀리지 않았다.

피지컬에서 조금 밀리더라도 파울이 선언되지 않는 아슬아슬한 한도 내에서 온몸을 활용하며 어떻게든 볼을 걷어냈다.

“조코라, 다시 주. 전방으로 길게 때리고 레넌이 따라갑니다!”

어디까지나 시간을 끌기 위한 롱패스였다.

볼을 빼앗았을 때, 전방으로 달리는 선수는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해서, 이젠 로비 킨과 레넌만이 첼시 진영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카르발류, 바로 문전으로 붙여줍니다!”

첼시도 이젠 만들어갈 시간이 없었다.

첼시의 최전방에는 드록바가 버티고 있었고, 드록바의 피지컬과 제공권을 믿고 계속 볼을 올려주었다.

“드록바가 떨궈주고, 발락!!”

드록바의 머리에 맞추고 그 볼을 2선 선수들이 처리하는 것.

지금의 첼시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공격 루트였다.

“로빈슨! 로빈슨의 멋진 선방! 우드게이트, 걷어냅니다!”

경기의 끝이 보일수록 로빈슨이 진가를 발휘하고 있었다.

잉글랜드 대표팀 넘버원 골키퍼였던 로빈슨은 유로 예선 탈락을 기점으로 자리를 내줬지만, 충분한 기량을 갖춘 선수였다.

체르니에게 잠시 자리를 빼앗겼지만, 다시 돌아와서 멋진 선방을 보여주고 있었다.

“조 콜! 조 콜의 슈팅!! 로빈슨이 또 한 번 막아냅니다! 엄청난 선방!! 다시 한 번! 이번에도 또 막아냅니다!!”

“로빈슨이 미쳤어요! 이 정도라면 다시 삼사자 군단 가야죠!!”

알아주는 중거리 슈터인 발락과 콜의 슈팅이 연달아 로빈슨의 선방에 막히고 있었다.

첼시 입장에서는 제대로 때린 슈팅들을 막아내는 로빈슨이 얄미울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튀어나온 볼, 킹이 한발 앞서 걷어냅니다! 주심, 시계를 쳐다봅니다!!”

성배가 골 세리머니로 잡아먹은 시간을 감안해서 추가 시간을 계산해도 이제는 거의 끝을 보이고 있었다.

주심도 시계를 보며 시간을 계산했고, 휘슬을 입가로 가져갔다.

“벨레티의 긴 패스! 드록바 쪽으로!”

사실상 첼시에게는 마지막 기회였다.

정확도는 떨어지지만, 압도적인 킥 파워를 가진 벨레티가 마지막 롱패스를 담당했다.

“드록바, 아넬카에게 떨굽니다!”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성배가 볼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발을 길게 뻗었고, 그 덕에 아넬카보다 한발 앞서서 멀리 차낼 수 있었다.

-삑! 삐-익!

“경기 끝났습니다!! 토트넘, 토트넘이 연장 혈투 끝에 주의 결승골을 앞세워 첼시를 2-1로 꺾고 칼링컵 우승을 차지합니다!!”

“9년 만의 우승이에요! 토트넘 선수들, 미친 사람들처럼 그라운드로 뛰쳐나옵니다!!”

성배의 킥을 마지막으로 주심의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다.

혈투 끝에 2-1 승리.

2007/08시즌 칼링컵의 주인은 토트넘이었다.

“형! 내가 뭐랬어요! 일 년에 트로피 하나는 든다고 했어요? 안 했어요?”

“그래, 이 자식아! 잘했다, 잘했어! 네 덕분이다!”

토트넘 이적 이후 한 개의 우승컵도 따내지 못했던 윤기표는 성배를 끌어안으며 오랜만에 차지한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다.

라모스 감독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스페인어로 소리쳐대며 기쁨을 표시했고, 영어를 할 줄 아는 다른 선수들이 하는 말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뜻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킹이 우승컵을 높이 들어 올립니다! 9년 만에 보는 토트넘의 우승 세리머니입니다!”

준비된 단상 위에 올라간 토트넘 선수단을 대표해 킹이 우승 트로피를 건네받았다.

킹이 우승 트로피를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리자, 여전히 경기장을 빠져나가지 않은 토트넘 서포터즈는 엄청난 함성으로 반응해주었다.

2007/08시즌의 칼링컵.

그 마지막은 토트넘이 9년 만에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장면이었다.

< 낭만필드 - 135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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