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32 >
FA컵에서의 맞대결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밀려버린 토트넘이었지만, 리그에서는 달랐다.
양 팀 모두 활용할 수 있는 최고의 선수들을 투입했고, 치열한 경기가 펼쳐졌다.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베스트 일레븐을 가동한 토트넘은 FA컵에서와 전혀 다른 팀이었고, 맨유를 상대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역시나 부상으로 빠진 킹에게서 바통을 넘겨받아 복귀한 우드게이트는 훌륭히 수비진을 조율했고, 무시무시한 맨유 공격진을 1실점으로 막아냈다.
[국적은 중요하지 않다! 조국의 피를 품고 달리는 주성배.]
[프리미어리그에 부는 한국 돌풍! 한 경기 세 명 출전!]
그리고 한국에서도 난리가 났다.
비록 성배가 한국 국적의 선수는 아니었지만, 세 명의 한국인이 프리미어리그 한 경기에, 그것도 선발로 출전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성배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던 한국 팬들은 박인진과 친분이 포착되었을 때부터 관심을 보였다.
이후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하고 축구 영웅들의 절친 임이 알려지는 등의 효과로 인해 성배의 인지도는 굉장히 높아졌다.
높아진 것뿐만 아니라 이미지 역시 좋아진 상황이었다.
외국으로 귀화한 한국 선수 중 가장 인기가 많아진 건 당연했고, 미셸 위나 하인즈 워드 등 역대 한국계 외국인 중에도 가장 많은 관심을 끌고 있었다.
[윙어 박인진, 풀백 윤기표, 주성배. 한국 선수끼리 계속된 맞대결. 결과는?]
[박인진과 주성배의 그라운드 위 우정. "국적은 기록일 뿐, 역사의 끌림 막지 못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지켜보는 성배가 경기를 일으킬 만큼 오그라드는 기사들이 계속 작성되었다.
저런 기사들로 인해 자신에 대한 인식이 좋아진다면 충분히 참아줄 수 있었지만, 그래도 그런 기사들을 지켜보는 건 너무 힘들었다.
“푸하하하! 너 이거 봤냐? 피, 혈통, 역사 뭐 안 나오는 게 없어! 진짜 대단하다. 크크크...”
“아, 형. 너무 그렇게 웃지 마세요. 민망하니까.”
잉글랜드에서 성배가 기사를 접한 것처럼 윤기표도 그 기사들을 모두 읽어볼 수 있었다.
한국발 기사를 접한 윤기표는 자신의 기사라서 차마 대놓고 반응하지 못한 성배를 대신해 두 배로 반응해주었다.
“크, 크큭... 푸하하하! 이 사진 좀 봐봐. 이 각도! 키야, 영화다, 영화야!”
기사에 실린 사진들의 의도는 명확했다.
팬들의 감성을 자극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라운드에서 일어나는 성배에게 손을 뻗은 박인진의 모습은 마치 박인진이 성배에게 자상함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이 사진은 제가 태클로 인진이 형이 돌파하는 거 막은 장면인데, 왜 제가 패자처럼 나온 걸까요?”
“당연한 거 아냐? 주인공은 무조건 인진이지. 그걸 아직도 몰라?”
실제로 경기에서 오른쪽 측면 윙어로 나선 박인진은 왼쪽 풀백으로 나선 성배와의 대결에서 경기 내내 미묘하게 밀렸다.
굳이 따지자면 기사는 성배가 승자임을 드러냈어야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사들은 경기 내적으로 어떤 상황이 연출되었는지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박인진이 성배를 챙겨준다는 식의 뉘앙스를 전달했다.
“게다가 그렇게 해줬으니까 지금 댓글 반응이 이런 거지. 그렇지 않았으면 너 군대 안 간다고 난리 났을걸?”
“뭐, 그렇기는 하지만...”
사실 성배가 기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해도 모자란 상황이었다.
성배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실제로도 이런 식으로 기사를 작성한 기자들에게 고마워하는 중이었다.
다만, 사진의 구도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자, 어쩔 수 없어. 벨기에 신문에서는 널 띄워주고 있을 거잖아? 당연한 거지.”
실제로 벨기에 쪽에 난 기사는 달랐다.
콤파니가 살짝 주춤한 현재, 벨기에에서 가장 핫한 선수는 바이에른 뮌헨 소속의 반 바이텐과 토트넘의 성배였다.
가장 잘 나가는 선수이기도 했다.
당연히 성배의 기사는 벨기에에서 가장 많이 작성되는 축구 관련 기사였고, 성배의 활약을 살짝 과장하는 면도 있었다.
“뭐, 그렇긴 하죠. 그래도 한국 반응을 아예 신경 쓰지 않을 순 없잖아요.”
“야, 인마! 그런 놈이 귀화했어?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하고 가서 밥이나 먹자.”
성배가 아쉬움을 표현하든 말든 한국팬들도 점점 성배에게 마음을 열고 있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한국에서의 활동도 꿈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처럼 보였다.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25라운드 경기에서 무승부를 기록한 토트넘은 이어진 26라운드에서 프리미어리그 최하위, 더비 카운티와의 원정 경기를 가졌다.
더비의 홈구장인 프라이드 파크 스타디움에서 펼쳐진 경기에서 킨, 카불, 스텁스의 골을 묶어 토트넘이 3-0 승리를 거두었다.
이번 승리로 승점 3점을 추가한 토트넘은 10위 웨스트햄에 3점 차이로 따라붙으며 상위권 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시즌 초반의 부진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컨디션은 어때? 너무 오래 쉰 건 아니겠지?”
“문제없습니다. 당장이라도 뛰고 싶어서 참기 힘들 정돕니다.”
2주 뒤, 토트넘에게 이번 시즌의 그 어떤 경기보다도 중요한 경기가 눈앞에 놓였다.
첼시와의 칼링컵 결승전 경기였다.
“믿어도 되겠지? 물론, 훈련에서의 모습은 나쁘지 않았네. 하지만 오늘 경기는 정말로 중요하니까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할 수밖에 없어.”
라모스 감독의 말은 통역을 거쳐서야 성배에게 이어졌다.
감독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영어를 배우길 바랄 뿐이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고작 2주 정도로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지난 2주 동안 성배는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
부상이나 주전 경쟁 등의 이유가 아니라 규정의 문제였다.
2주 동안 토트넘이 치른 경기는 UEFA컵이 전부였고, 아약스 소속으로 이번 시즌 유럽 대항전에 출전했던 성배는 경기에 나설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오늘 잘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걱정하시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여담으로 토트넘의 UEFA컵 32강 상대는 슬라비아 프라하였다.
아약스를 챔피언스리그에서 쫓아낸 슬라비아 프라하에게 토트넘은 총합 3-2의 승리를 거두었다.
성배에게는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그리고 칼링컵.
결승까지 올라온 이상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형. 그거 알아요?”
“뭔데? 뭔지 말을 해줘야 대답하지.”
경기 직전.
성배는 오늘 벤치 명단에 포함된 윤기표에게 말을 걸었다.
“저는 데뷔한 뒤로 1년에 한 개의 트로피는 무조건 들어왔다는 거요.”
2004/05시즌은 데뷔 시즌이었고, 후반기도 중반으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데뷔했기 때문에 논외로 쳤다.
그렇게 보면 2005/06시즌에 안더레흐트 소속으로 주필러 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었고, 2006/07시즌에는 아약스 소속으로 KNVB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매 시즌 한 개의 우승컵을 획득한 성배였다.
“그래서? 오늘도 우승할 거라고?”
“사실 리그 우승 트로피는 이미 옛날에 멀어졌잖아요. UEFA컵은 모르겠지만.”
리그와 FA컵의 우승 트로피는 노릴 수조차 없게 된 상황이었다.
지금 토트넘이 노려볼 수 있는 우승 트로피는 두 개.
칼링컵과 UEFA컵이었다.
“네가 한 시즌에 한 개의 우승 트로피를 따내는 게 확실하다면, 나는 칼링컵보다는 UEFA컵 우승 트로피가 가지고 싶은데.”
윤기표의 반격에 할 말이 없어진 성배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칼링컵보다는 UEFA컵이 더 욕심나는 건 당연했다.
“됐어, 농담이야. 뭐라도 가지고 싶으니까 가서 우승 트로피 가져와.”
PSV 시절에는 신나게 우승 트로피를 수집했지만, 토트넘이적 이후로는 한 개의 우승 트로피도 따내지 못한 윤기표였다.
잉글랜드 진출 이후 첫 우승 트로피.
9년 만의 우승컵을 갈망하는 토트넘 팬들 못지않게 윤기표도 트로피가 간절했다.
“오케이. 접수했습니다.”
윤기표도 이제 서른이 넘었다.
한국 나이로는 벌써 서른 둘, 만으로도 두 달 뒤면 서른한 살이었다.
토트넘 생활도 거의 끝을 보이는 이 상황에서 우승컵이 누구보다 간절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내가 형을 위해서 힘 한 번 쓰죠, 뭐.”
“그래, 제발 좀 그렇게 해다오.”
성배는 윤기표를 향해 씩 웃어보였다.
그리고 잠시 뒤, 윤기표는 벤치로 향했고, 성배는 다른 선수들과 함께 그라운드로 나갈 준비를 마쳤다.
“지난번에는 내가 신세를 좀 졌지.”
출전 직전, 옆에서 또 한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웬 까만 정수리가 보일 뿐이었다.
다시 고개의 각도를 조절한 성배의 눈에는 자그마한 흑인 선수 한 명이 보였다.
“아, 숀? 미안. 안 보였어.”
숀 라이트-필립스.
지난 리그 경기에서 성배에게 고전했던 그가 옆에 서 있었다.
성배는 진심과 도발을 적당히 섞은 멘트를 날려주었다.
“이... 아니, 뭐 괜찮아.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많이 들어본 말이라며 애써 괜찮은 척하는 라이트-필립스였지만, 표정은 굳어 있었다.
‘성공인가?’
자신의 데뷔전이나 마찬가지였던 지난 경기 맞대결에서 밀렸고, 득점까지 허용했던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래서 그라운드 입장을 위해 도열한 사이 다가와 말을 건 것 같았지만, 심리전 하면 자신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상큼한 미소도 한 번 날려주며 쐐기를 박았다.
“오늘도 한 번 열심히 뛰어보자고. 좋은 경기 했으면 좋겠네.”
“아, 아. 나도. 오늘은 지난번과 좀 다를 거야.”
마지막에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강렬한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입을 연 라이트-필립스였지만, 성배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모습에 실패임을 깨달은 그는 혀를 차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걸로 일단 서전에서는 이긴 건가.’
이미 경기는 시작된 것이었다.
볼이 오가지만 않을 뿐, 경기를 준비하며 생기는 모든 일들이 경기의 연장선에 있었다.
“뭐라고 하고 간 거야?”
라이트-필립스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이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말브랑크가 성배에게 말을 걸었다.
프랑스 국적의 그는 프랑스어가 통하는 성배와 어느 정도 친해져 있었다.
특히, 프랑스 국적이지만, 벨기에에서 태어나 자란 그였기에 성배를 더욱 친근하게 느끼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 오늘은 지난 경기처럼 당하지 않겠다고 하던데? 뭐, 그게 자기 마음대로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하, 그럴 리가 없지. 내가 볼 때, 저 친구는 아마 끝까지 너한테 이길 수 없을걸.”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맙네. 좋아, 그 기대에 부응해주도록 하지.”
라이트-필립스와의 대결이 쉬울 리 없었다.
지난번에는 성배가 맞대결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번에도 이긴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는 말은 성배가 다시 승리를 거두는 일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오늘은 우리 수비라인도 만만치 않다고.’
오늘 토트넘의 포백 라인은 성배와 함께 킹, 우드게이트, 심봉다로 구성되어 있었다.
현재 토트넘이 꾸릴 수 있는 최고의 라인이었다.
결성된 지 꽤 되었지만, 실제로 경기에 나서는 것은 처음인 라인이었다.
이 수비라인의 위력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고, 토트넘의 수비는 지난 경기들과 많이 다를 것이었다.
< 낭만필드 - 13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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