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31 >
안 그래도 전력이 약했던 토트넘이 시작하기 전부터 패배를 예상한 경기, 승리에 욕심을 내지 않았던 경기였다.
당연히 맨유가 승리를 거두고 FA컵 5라운드, 16강에 진출했다.
킨이 만회 골을 터뜨리며 겨우 자존심을 세운 가운데, 맨유는 호날두의 두 골과 테베즈의 한 골을 묶어 3-1 대승을 거두었다.
토트넘 입장에서는 카불의 퇴장으로 도슨이 투입된 것이 오히려 복이 되어 세 골로 막아낼 수 있었다.
“이야, 형! 오랜만이야.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이야?”
박인진이 윤기표를 보며 활짝 웃었다.
현재 잉글랜드에는 대한민국 선수들이 적지 않게 진출해 있었다.
성배와 함께 안더레흐트에서 활약했던 성규한이 풀럼에, 대한민국 대표 스트라이커 중 한 명인 이영배가 미들즈브러에서 활약 중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대표하는 선수는 역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인진과 토트넘의 윤기표였고, 대한민국의 4강 신화를 함께 쓰고 PSV에서 함께 활약했던 이들은 당연히 친분도 깊었다.
“뭘 오랜만이야. 한 달 전에도 봤으면서.”
FA컵 경기가 끝난 이후, 언제나처럼 박인진과 윤기표는 함께 만나 식사 자리를 가졌다.
이번에는 둘이 아니라 셋이었다.
성배도 이들과 함께 자리한 것이었다.
“크크, 너 오늘 엄청 고생하더라. 괜찮냐?”
“아오, 말도 마세요, 형. 테베즈가 측면으로 나오는 건 너무 반칙이잖아요.”
오늘 경기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박인진도 당연히 맨유와 토트넘의 경기를 관전했다.
테베즈의 압박에 고생하는 성배의 모습도 전부 다 본 것이었다.
박인진의 놀림에 성배는 쓴웃음을 지었다.
“뭐 그래도 오랫동안 있지는 않았잖아. 금방 중앙으로 돌아가던데, 뭐.”
테베즈를 측면에 두는 것은 맨유 입장에서도 손해였다.
그는 중앙에서 가장 강력한 선수였고, 어느 정도 성배를 괴롭혔다는 판단이 서자, 바로 중앙으로 돌아갔다.
성배 입장에서는 다행이었고, 토트넘에게 좋은 일은 아니었다.
“금방 돌아간 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잘 알잖아요. 이십 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이면 탈탈 털리고도 남았죠.”
성배의 표정이 재미있었는지 박인진과 윤기표는 신나게 웃었다.
평소 이미지가 어떻든 두 사람도 역시 남자였다.
두 사람이 표현하는 친근함의 표시 역시 신나게 놀리는 것이었다.
“전화로는 했지만, 어쨌든 프리미어리그에 온 걸 환영한다. 여기가 세계 최고의 리그라고.”
“고맙네요, 참. 제가 지난번에 전화로도 얘기했지만, 말로만 말고 뭐 하나 쥐여 주시라니까요?”
챔피언스리그 경기 때문에 두 번 만난 것이 고작이었지만, 박인진과 성배는 어느새 꽤 친해져 있었다.
직접 만난 것은 그 두 번을 더해도 세 번밖에 되지 않았지만, 꾸준히 전화와 문자 등으로 연락을 이어온 덕분이었다.
“어떻게 나랑 같은 팀인데 나보다 박인진이랑 더 친한 것 같다?”
윤기표가 두 사람 사이를 질투할 정도였다.
“하하, 저희야 앞으로 친해질 시간이 많잖아요. 인진이 형 불쌍하니까 친한 척해주는 거죠.”
처음 회귀했을 때 사람들을 대했던 성배의 태도와 벨기에로 무대를 옮겼을 때의 태도, 그리고 점점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성배가 보여주는 태도는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아, 아아... 다시 하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처음에는 바뀐 현실에 적응하지 못해 사람들을 배척했고,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상한 현실과 갑작스럽게 찾아온 기회에 대해 생각하느라 주변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다른 학교로 가지는 않지만, 중요한 건 제가 이곳에 더는 오지 않는다는 거 아닙니까?]
[그동안에도 계속 개기고 있었는데요.]
그러다가 과거의 악연들을 만나 공격성을 드러냈고, 그 과정에서 조금 더 현실에 발을 붙일 수 있었다.
이때까지는 아직 전생에서 확실히 벗어나지 못했다.
[누가 뭐래. 그냥 너 퍼졌다고. 그건 그냥 보면 아는 거다.]
[하하, 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빨리 꺼져버리라고.]
안더레흐트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하고,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고 높이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성배도 관리를 시작했다.
친해져도 괜찮을 만한 선수들에게 이미지를 관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전생에서 흔치 않은 호인, 호인을 넘어선 호구로 살았던 성배였고, 20년에 가까운 사회생활 경험까지 있었기에 그들의 호의를 얻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에이... 이렇게 귀여운데? 이렇게 귀여운 여자가 어디 있어. 보통 다 큰 여자라고 하면 키도 크고, 그리고 그...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가서 몸매에 굴곡이...]
그런 성배가 진심을 내비치면서 전생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여줄 때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순간이었다.
그때만큼은 굳이 자신을 꾸미지 않았고, 자신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며 행동할 수 있었다.
[유니폼 저한테 주세요. 제 거랑 바꾸죠.]
[하하, 저희야 앞으로 친해질 시간이 많잖아요. 인진이 형 불쌍하니까 친한 척해주는 거죠.]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이번 생에서 만들어낸 성격과 전생에서의 성격이 섞이는 순간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박인진, 윤기표와 함께 할 때였다.
처음에는 그들의 인기와 인지도를 이용해서 한국에서의 이미지를 개선하려 했던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에게도 조금씩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한테까지 숨기지 마시고 알려줄 거 있으면 좀 알려주시죠? 하하, 영업 비밀 좀 꺼내주세요. 예?”
전생에서 자신의 우상이었던 두 선수였다.
성배가 쌓아올린 벽에 그들을 위한 문이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이번 생에서 계산적으로 만들어낸 성격과 전생의 바보같이 착했던 성격이 적절히 섞이는 중이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착하다고 인정을 받으면서도 절대 자신에게 이득이 될 것은 놓치지 않는, 손해가 될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 성격의 형성도 가능할 것이었다.
“영업 비밀인지는 모르겠고, 네가 알아야 할 건 있지. 프리미어리그에는 윙어 중에서도 꽤 단단한 선수들이 많아. 너 오늘 하는 거 보니까 꼭 알아야 할 것 같던데.”
한참 어린 후배가 넉살 좋게 들이대니 이들도 아는 것들은 전부 다 가르쳐 줄 수밖에 없었다.
성배가 굳이 부탁하지 않더라도 가르쳐주고 싶어했고, 실제로 평소에도 윤기표는 성배에게 이런 저런 조언들을 많이 해주는 편이었다.
“너도 잘 아는 바벨이나 반 페르시 같은 선수들은 물론이고 그렇게 유명하지 않은 선수 중에서도 포츠머스의 우타카나 문타리, 맨체스터 시티의 페트로프, 선덜랜드의 화이트헤드, 블랙번의 워녹 같은 선수들은 진짜 상상을 초월해.”
박인진도 성배와 전화할 때마다 어떻게든 뭐라도 도와주려고 했다.
먼저 유럽 무대를 개척한 선배로서 뭐라도 해주고 싶은 것이었다.
“겉으로 봤을 때는 호리호리해 보이는 호날두나 보지노프, 융베리, 발렌시아, 뎀프시, 말루다 이런 선수들도 실제로 붙어보면 장난 아니야. 너는 나보다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러려면 운동 좀 빡세게 해야 할 거다.”
실제로 성배와 같은 포지션에서 활약하면서 오른쪽, 왼쪽을 가리지 않고 뛰었던 윤기표는 프리미어리그 대부분의 윙어들과 만난 경험이 있었다.
그 경험은 성배에게 큰 도움이 되어줄 것이었다.
“자자,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은 건 알겠는데, 일단 밥부터 먹고 합시다.”
아직 음식을 시키지도 않았는데, 대화는 점점 더 본격적으로 흘러갈 분위기였다.
배가 고팠던 것인지 박인진이 손뼉을 쳐가면서 나머지 두 사람의 이목을 끌어왔다.
식사를 하면서도 세 사람은 신나게 입을 움직였다.
윤기표는 그런 처지에서 벗어났지만, 박인진은 여전히 누군가와 한국말로 수다를 떨 기회가 많이 없었다.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스타였기 때문에 인터뷰는 많이 하지만, 인터뷰와 수다는 전혀 달랐다.
‘역시. 아시안의 몸으로 프리미어리그에서 인정받았던 건 운이 아니야.’
두 사람이 경쟁적으로 들려주는 경험담들은 성배에게 굉장히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성배와 똑같이 피지컬에서 약점이 있었고, 이로 인해 어려움을 겪다가 극복하고 지금의 자리를 차지한 두 선수였기 때문에 이들의 경험은 큰 도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성배는 앞으로의 계획을 다시 점검했다.
시즌 중반에 합류한 이번 시즌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다음 시즌만큼은 제대로 준비해볼 생각이었다.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FA컵 4라운드 경기 이후, 토트넘은 구디슨 파크로 날아가 에버튼과의 리그 24라운드 경기를 치렀다.
리그 5위를 달리고 있는 에버튼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지만, 토트넘도 분위기가 좋았고, 원정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하며 나쁘지 않은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이 경기는 차기 잉글랜드 국가대표 레프트백으로 불리는 레이튼 베인스와 성배를 비교해보는 것도 관전 포인트였다.
안정적인 수비력과 다채로운 공격 옵션, 정확한 크로스와 위력적인 프리킥 등 두 선수는 공통점이 많았다.
스몰 마켓인 위건에서 이번 시즌 이적한 베인스의 이적료가 거상 중 하나인 아약스 소속이었던 성배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이적료의 차이와 별개로 이 두 선수가 다른 몇몇 선수들과 함께 애슐리 콜 이후 EPL 최고의 레프트백 자리를 놓고 경쟁할 것이라 예상했다.
“음... 저희 너무 자주 만나는 것 같지 않아요?”
그리고 그다음 경기.
토트넘은 다시 한 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만나게 되었다.
아스날-첼시-선덜랜드-아스날-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버튼-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리그 5위 안에 드는 강팀을 7경기 중 6경기에서 만나고 네 경기 연속으로 만나는 토트넘 지옥의 일정 중 마지막 경기였다.
“그러게. 얼마 전에 오랜만에 봤다고 또 오랫동안 못 볼 것처럼 신나게 놀았었는데 민망하게.”
그리고 당연히 박인진과 윤기표, 그리고 성배는 다시 얼굴을 보게 되었다.
“오늘 보니까 형도 나오던데요?”
“그럼! FA컵 경기 때는 잠깐 쉬었지만, 오늘은 나가야지.”
이번 시즌, 모두가 로테이션으로 돌아가는 맨유 미드필더 중 주전에 가까운 선수를 뽑으라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선수가 박인진이었다.
오늘도 왼쪽 윙어로서 경기에 나섰다.
“오늘은 우리 셋 다 나가네. 좀 뿌듯한데?”
유럽 무대에서 한국 선수 세 명이 만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당장 성배를 제외한 두 선수는 에레디비지에 시절 페예노르트의 성진곤과 함께 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프리미어리그를 위시한 4대 빅리그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뿌듯하네. 형도 그렇지 않아? 우리가 처음 네덜란드에 갈 때만 하더라도 이런 건 상상도 못했는데.”
“무슨. 바로 그 시즌에 진곤이랑 같이 뛰었거든?”
윤기표는 감상에 빠진 박인진을 향해 적절하게 태클을 걸었다.
그라운드 위에서 뿐만이 아니라 바깥에서도 그의 태클 실력은 여전했다.
“아니, 지금 그 이야기가 아니잖아! 여긴 프리미어리그라고!”
“그래서! 에레디비지에 무시하냐, 지금? 내가 당장 감독님한테 전화해? 앙?”
평소에는 이런 형들이 아닌데, 참...
성배는 둘이 만나기만 하면 유치해지는 두 형들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 낭만필드 - 13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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