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130화 (270/356)

< 낭만필드 - 130 >

“페널티킥! 페널티킥이 선언됩니다!”

“아니, 카불 선수!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요! 이거 굉장히 당황스러운 상황인데요?”

중계진이 당황하는 동안 주심은 거침없이 페널티 스팟을 찍었다.

주심이 페널티킥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토트넘 선수들은 누구 한 명도 주심에게 항의하지 않았다.

항의할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잠시 자신이 골키퍼인 줄 착각했던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대놓고 손을 쓸 수는 없습니다.”

중계진이 당황한 이유, 토트넘 동료들이 카불을 감싸줄 수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테베즈를 놓쳐 또 한 번 득점을 허용할 상황이 되자, 당황한 카불이 손을 뻗어 볼을 쳐낸 것이었다.

대놓고 손을 사용한 카불 때문에 경기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가지가지 하는구나.’

성배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도대체 저게 뭐하는 짓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가만히 두었으면 실점 하나로 끝났을 상황이 카불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해...

“레드 카드! 레드 카드입니다! 토트넘, 악재가 겹칩니다!”

수적인 열세로 이어졌다.

“하하, 이건 좀 고마운데?”

주심이 레드 카드를 꺼내 드는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숙인 성배의 귓가에 호날두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고마울 것까지야.”

경기 중 심리전은 자신의 장점이었는데, 지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크로스를 내줬으면 안 되는 건데.’

카불의 행동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은 행동이었지만, 카불이 그렇게까지 하도록 내몰았던 것은 호날두의 위협적인 크로스였다.

그리고 그 크로스는 성배를 제치고 올린 것이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기는 했지만, 조금 더 침착하게 움직였다면..’

자신이 맡은 측면에서 크로스가 올라갔다고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정도로 감성적인 사람도 아니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어쩔 수 없었던 것은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게 완전한 최선이었나.’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 정도가 아니라 그 순간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효과적인 플레이 중 한 가지였다.

하지만 더 나은 선택지가 분명 있었을 것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돌아가면 한 번 생각해봐야겠어.’

정말 세계 최고의 자리를 노린다면, 이런 경험 하나하나를 그냥 놓치지 말고 그 속에서 무언가를 배워내야 했다.

세계 최고를 노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해야 했고, 상황에 맞는 플레이를 그때그때 떠올려 수행할 수 있어야 했다.

“이거 분위기가 묘하네. 저번에 그러지 않았나? 어디 가서 주성배를 꺾었다고 자랑해도 된다고, 다신 그런 일 없을 거라고.”

‘젠장.’

포르투갈이 벨기에를 4-0으로 꺾은 뒤, 두 선수는 서로 자신을 막았다는 것을, 혹은 자신을 뚫어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해도 좋다며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거라 자신했었다.

그리고 근 1년 만에 다시 만난 오늘, 호날두의 맨유는 성배의 토트넘을 마음껏 유린하고 있었다.

“세상이 내가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면 얼마나 좋을까.”

변명하고 싶은 말들은 많았다.

어떤 팀에 속해있느냐, 속한 팀의 전력이 어떤가, 하는 것도 개인의 능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토트넘은 안 그래도 전력에서 밀리는데 1.5진 이하의 라인업을 들고 나왔고, 프리미어리그 최강 중 하나인 맨유는 거의 베스트 라인업을 가동했다.

‘그래 봤자 변명이지.’

중앙 커버까지 평소 이상으로 신경 써야 했기 때문에 호날두에게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온 신경을 모두 호날두에게 집중해도 토할 때까지 쫓아다녀야 하는 선수가 호날두였다.

당연히 막는 것은 힘들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자신이 아닌 누가 와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그렇게 구구절절 말해봤자 나만 우습지.’

굳이 무언가 말로 변명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자신도 이제 프리미어리그로 건너온 이상, 앞으로 자주 맞부딪힐 것이 분명했다.

이번에 안 되면 다음에, 다음에도 안 되면 그다음에.

호날두를 상대로 승리할 기회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럼 난 이만. 한 골 넣고 오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키커는 호날두였다.

볼을 향해 걸어간 호날두는 여유롭게 볼을 내려놓았고, 특유의 페널티킥 준비 자세를 갖춘 이후 가볍게 득점을 성공시켰다.

‘다음번에는 절대 마음대로 못 할 거다. 다음번이 아니라면 그다음에, 그다음도 아니라면 또 그다음에. 언젠가는 완벽히 좌절하게 해주지.’

첫 맞대결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묶어버린 경험이 있기 때문일까.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선수임을 알고 있고, 더 뛰어난 선수로 성장할 것도 알고 있었지만, 쉽게 호승심을 다스릴 수 없었다.

‘나도 참. 낭만주의자로 다시 돌아가는 거냐.’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은 성배는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호날두와 자신은 사는 세계 자체가 다른, 사는 높이와 마시는 공기 자체가 다른 선수였다.

이기기 위해 호승심을 불태우기보다는 그를 통해 세계의 인정을 받기 위해 연구하는 쪽이 더 효율적이었다.

‘그래도... 다시 한 번만 더 이겨보고 싶다.’

자신만 알고 있는 미래지만, 미래에 세계 최고가 될 선수를 자신의 힘으로 꽁꽁 묶어낸다는 것은 마치 마약과도 같은 쾌감을 성배에게 전해주었었다.

전생에서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그 감정은 프로 무대에서 활약하면서 무엇인지도 모른 채 쫓아왔던 목표와 가까운 느낌이었다.

이대로 또 한 번 물러선다면, 활동하는 무대의 차이가 아무리 크더라도 전생에서의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언제까지고 달라붙어 준다. 대가리가 깨질 때까지 들이 받아주지.’

아직 메시는 만나보지 못해서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성배가 이 정도로 투지를 불태운 선수는 호날두가 유일했다.

차라리 상대하기 편한 적당한 A급 이상의 선수들을 상대로는 한 수 물려주었던 자신이 진짜배기 S급 선수인 호날두에게만 투지를 불태우는 상황은 기가 막히기도 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진지했다.

***

0-2로 뒤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토트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라모스 감독은 구멍 난 중앙 수비를 메우기 위해 스트라이커인 베르바토프를 빼고 도슨을 투입했다.

안 그래도 밀리던 경기가 더 일방적인 흐름으로 흘러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캐릭, 전방으로 길게 볼 투입합니다! 테베즈 쪽으로!”

그리고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첫 번째 문제가 성배의 탓이 아닌, 팀의 전력 차이로 인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두 번째 문제는 성배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었다.

‘이 빌어먹을 놈...’

성배는 분명 피지컬이 부족했고, 그로 인해 몸싸움 능력이 좋다고는 할 수 없는 편이었다.

기본적으로 180cm가 넘는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에 걸맞은 최소한의 파워는 있었으나, 그 이상은 없었다.

그리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그 틈을 노릴 수 있었다.

“테베즈, 달려갑니다! 주와 경합! 테베즈가 볼 따내고 루니에게 이어집니다!”

성배의 피지컬이 약하다고는 해도 지금까지 그 약점을 공략당한 적은 별로 없었다.

윙어 중 피지컬이 뛰어나면서 성배의 영리한 수비를 뚫어낼 정도의 기량을 가진 선수를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공격수 세 명이 포진해 있었다.

‘괴물 같은 자식.’

그중 테베즈는 170cm대 초반의 작은 신장으로 190cm가 넘는 센터백들과 공중볼 경합이 가능한 괴물이었다.

퍼거슨 감독은 성배의 약점을 공략하기 위해 테베즈를 살짝 측면으로 뺐고, 맨유의 미드필더들은 그런 테베즈를 향해 볼을 투입해주었다.

10cm나 작은 테베즈가 대놓고 몸을 들이밀며 달려드는 모습은 성배에게 악몽과도 같았다..

“테베즈는 정말 괴물입니다. 작은 신장에도 불구하고 탄력과 피지컬로 측면을 장악하는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성배가 테베즈를 피할 수도 없었다.

수비수들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공격하는 쪽에서 뭔가 액션을 취했을 때, 그에 반응해야 하는 포지션이기 때문이었다.

선택은 공격 측이 하는 것이었고, 수비는 그 선택지의 개수를 제한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즉, 성배가 테베즈를 피하거나 테베즈가 중앙으로 이동하면 다른 식으로 공격을 풀어갈 것이 분명했다.

“맨유가 테베즈를 측면으로 돌릴 수 있었던 건 역시 루니와 호날두의 존재 덕분이죠? 테베즈가 측면으로 빠져도 루니와 호날두는 그 빈자리를 충분히 메워줄 수 있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성배가 아닌 다른 풀백이라도 이런 전술에 대응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성배의 피지컬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풀백만으로 비교 대상을 제한하면 그렇게까지 나쁜 편은 아니었다.

키가 작아서 기본적인 제공권은 좋지 않았지만, 낮은 무게중심에서 나오는 테베즈의 단단함은 괴물 센터백들과도 경합이 가능한 수준이었고, 풀백들이 이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냉정하자. 이건 어쩔 수 없어.’

성배는 냉정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상대 팀이 자신을 노리는 상황은 회귀 이후 처음 맞닥뜨리는 것이었다.

자신의 피지컬은 상당히 많은 발전을 이루었지만, 테베즈를 상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아직 성장이 끝나지도 않았고, 성장이 끝나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제길, 방법이 없어.’

그렇다고 마땅한 방법도 없었다.

피지컬이 왜 중요한 것인지 몸으로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영리하게 플레이를 해도, 경험이 많아도 압도적인 피지컬을 앞세워 밀고 들어오는 선수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더 밀고 오지 말라고.’

다시 한 번 테베즈에게 볼이 투입되었고, 성배는 사력을 다해 유리한 자리를 잡기 위한 경합을 시도했다.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집어넣어 유니폼을 끌어내렸고, 살짝 꼬집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민감한 부위도 긁고 꼬집었다.

하지만...

“테베즈! 무섭습니다! 이번에도 볼을 따냈습니다! 볼은 중원의 캐릭에게!”

도저히 방법이 안 보였다.

테베즈가 계속 측면에만 머물러 있을 리는 없을 것이었고, 곧 중앙으로 다시 돌아가겠지만, 그전에는 도저히 이 패턴을 막을 수가 없었다.

‘흔들리지 말자, 흔들리지 말자...’

퍼거슨 감독이 굳이 테베즈를 측면으로 뺀 이유는 성배를 흔들기 위함이었다.

현재 토트넘 수비진에서 성배만 제 몫을 해주고 있었고, 허들스톤은 아직 어린 데다가 자신의 포지션이 아니었고, 도슨은 너무 갑작스럽게 투입되었다.

윤기표는 나름 선방해주고 있었지만, 그의 자리는 호날두와 계속해서 부딪혀야 하는 위치였고, 호날두에게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성배만 흔들어 놓을 수 있다면 이 경기는 맨유의 완벽한 승리로 끝날 것이 분명했다.

‘오셔까지 날아다녔으면 큰일 날 뻔했어.’

상대 라이트백 오셔가 공격에는 재능이 없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오셔마저도 활발한 오버래핑으로 공격에 가담했다면 정말 방법이 없을 뻔했다.

‘오늘 이기는 건 어차피 글렀어. 많이 깨지고 박살나면서 한 번 배워보자고.’

회귀한 이후에는 자신의 수비를 집중적으로 노리는 팀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안더레흐트 시절에도, 아약스 시절에도, 심지어 벨기에 국가대표팀에서도 수비의 구멍은 다른 선수들이었다.

오랜만에 자신이 직접적으로 공략당하는 이 상황은 앞으로 더 큰 무대에 나설수록 자주 있을 것이었고, 이에 적응할 필요가 있었다.

‘FA컵에서 이런 걸 보여줬다는 것을 후회하게 해주지. 내가 몸은 약해도 똑같은 것에 두 번까지는 몰라도 세 번은 안 당해.’

거친 프리미어리그에서 최정상급 풀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지금보다도 피지컬이 조금 더 좋아져야 할 것이었다.

그 부분에 약점이 있다는 것은 성배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장점은 축구 지능과 영리한 플레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한 번은 당했지만, 이를 극복하는 데 오랜 시간을 들일 생각은 없었다.

< 낭만필드 - 130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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