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29 >
[북런던 더비가 맞나? 토트넘, 아스날 대파!!]
[축제 분위기의 토트넘, 침묵에 빠진 아스날.]
[라모스 감독, “환상적인 밤이었다. 선수들에게 감사.”]
[“내 잘못이다.”만 반복한 벵거, 팬들은 분노.]
아스날과의 칼링컵 4강 2차전은 토트넘에게 매우 중요한 경기였다.
결과는 토트넘의 5-1 승리.
아데바요르에게 만회 골을 허용하긴 했지만, 말브랑크가 한 골을 더 추가하며 아스날을 완전히 침몰시켰다.
큰 임팩트를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성배 역시 세 경기 연속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면서 팀의 대승에 한쪽 팔을 거들었다.
토트넘의 이번 승리는 굉장히 의미가 큰 승리였다.
이번 시즌, 토트넘은 최악의 부진을 겪으면서 전반기가 끝나기도 전에 마틴 욜 감독을 경질하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해야만 했다.
라모스 감독 부임 이후 리그에서는 6승 2무 5패, 칼링컵을 포함하면 10승 2무 5패로 순항 중인 토트넘에게 아스날전 대승은 확실하게 분위기를 끌어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게다가 칼링컵 결승 진출을 이뤄내며 초반의 부진을 딛고 칼링컵 우승 트로피가 가시권에 들어온 상황이었다.
이번 시즌은 완전히 망했다고 여겼던 토트넘 팬들의 기대감도 커졌다.
토트넘이 마지막으로 우승컵을 들어 올린 것은 1999년, 칼링컵의 전신인 워싱톤컵에서였다.
9년 만의 우승 트로피가 눈앞까지 다가온 것이었다.
‘칼링컵에 집중하겠다는 건 알겠지만. 그럴 거면 최소한 나도 같이 빼주던지.’
하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었고, 성배의 표정은 어두웠다.
지금 당장, 이번 경기가 걱정된 탓이었다.
‘나를 믿어주는 건 고맙지만, 당장 내 앞가림하기도 힘든데.’
성배는 이번 경기의 선발 라인업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이미 외운 라인업이었지만, 볼 때마다 걱정거리가 한가득이었다.
[DF - 주성배 허들스톤 카불 윤기표]
오늘 경기, 토트넘의 선발 수비라인이었다.
성배를 제외하면 나머지 세 선수 모두 백업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나마 윤기표는 공격력이 부족할 뿐, 수비에서는 믿음직한 선수였는데, 허들스톤과 카불은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았다.
허들스톤은 본래 포지션이 수비형 미드필더였고, 카불은 아직 기량이 부족했다.
게다가 두 선수 모두 피지컬은 강력하지만, 발이 느렸기 때문에 뒷공간을 내줄 위험성이 너무 높았다.
‘내가 어떻게 중앙까지 커버하냐고.’
라모스 감독의 의도는 명확했다.
과감하게 승리를 포기한 경기에서 부상 빈도가 높은 킹과 우드게이트, 도슨에게 휴식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대신 유망주 센터백 조합의 수비적인 약점을 수비가 좋은 두 풀백을 투입해 메우려는 의도였다.
‘풀백으로서 수비력은 나쁘지 않다지만, 중앙에서는 아무것도 못 할 텐데.’
성배의 수비력은 어디까지나 수싸움에서의 승리와 적절한 심리전이 동반되기 때문에 강한 것이었다.
풀백에게 피지컬이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하지만 중앙에서는 심리전과 수싸움도 중요했지만, 피지컬이 매우 중요했다.
‘물론, 허들스톤이 최소한의 역할만 해줘도 이런 걱정은 필요없지만.’
피지컬과 제공권이 필요한 순간에 허들스톤이 제 역할만 해준다면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경험과 스피드의 문제로 인해 고전할 때만 자신이 도와주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1.2인분 정도는 충분히 해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성배는 허들스톤과 카불이 0.5인분은 해낼 수 있느냐는 물음에도 부정적이었다.
[FW - 호날두 테베즈 루니]
토트넘의 상대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
***
토트넘에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리그와 칼링컵이었다.
칼링컵은 클럽 역사상 9년 만의 우승 트로피가 걸려 있었으니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리그는 모든 것의 기본이기에 당연히 중요했다.
칼링컵에서 우승해서 UEFA컵 출전권을 얻어낸다고 하더라도 리그의 순위는 최대한 위로 끌어올려야만 했다.
“맨유 쪽 그라운드가 꼭 필요한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굳이 필요 없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었다.
올드 트래포드에서 펼쳐지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FA컵 4라운드 경기, 라모스 감독은 승리를 포기했고, 맨유는 토트넘을 그들의 진영에 가둬놓고 신나게 두드렸다.
“아스날을 5-1로 박살 낸 팀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기력한 토트넘입니다. 아스날을 이기기 위해 힘을 당겨서 쓰기라도 한 겁니까?”
칼링컵에서 일찌감치 탈락한 맨유는 FA컵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사실, 일반적으로 칼링컵보다 FA컵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았다.
리그와 챔피언스리그 모두 우승을 노리는 클럽들이 칼링컵을 포기하는 경우는 많아도 FA컵까지 포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긱스, 전방으로 볼 투입! 테베즈가 달립니다!”
그 결과, 맨유는 테베즈, 루니, 호날두로 대표되는 무시무시한 공격진에 캐릭, 긱스, 하그리브스, 퍼디난드, 에브라, 반 데 사르 등 주전 선수들의 대부분을 출전시켰다.
‘너무 심하네.’
테베즈가 달렸고, 허들스톤은 당연하다는 듯 테베즈를 놓쳤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놓친 게 아니라 놓아준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너무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임을 놓쳐버렸다.
“테베즈의 돌파! 카불과 주가 따라붙습니다!”
허들스톤이 뚫렸으니 성배가 커버해줄 수밖에 없었다.
오늘 맨유는 전문 윙어를 투입하지 않았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쩔 수 없다.’
성배는 몸을 날릴 준비를 마쳤다.
테베즈는 이미 위험한 지역까지 도달했는데, 막아줄 선수가 없었다.
슈팅을 하지 않고 한 번 접을 확률도 높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주의 태클! 아! 페인트!”
‘시간은 끌어줬어. 다음은 네가 알아서 해라.’
역시나 테베즈는 슈팅을 시도하지 않고 볼을 접었다.
볼을 따내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몸을 날려 시간을 버는 사이 카불이 도착했다.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나머지는 카불에게 달려있었다.
“테베즈! 카불! 아! 테베즈 치고 나오면서 슈팅!!”
‘참, 어이가 없어서...’
성배는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당연히 어이가 없어서 나온 웃음이었다.
“골! 골입니다! 긱스의 패스를 받은 테베즈의 득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앞서나가기 시작합니다!”
태클을 피하기 위해 멈춰서 방향을 전환하던 테베즈였고, 카불이 그런 테베즈를 덮치는 그림이었다.
당연히 카불이 몸싸움에서 승리했어야 했다.
하지만 카불은 테베즈에게 밀려났고, 그 작은 틈도 놓치지 않는 선수가 테베즈였다.
몸싸움의 기본은 낮은 무게중심이었는데, 이 부분에서 리그 최고 수준인 테베즈를 상대하면서 자세를 낮추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진짜 어지간하면 실력으로 뭐라 안 하는데.’
성배는 자신이 말도 안 되는 기회를 잡았음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왜 회귀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반칙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저 밑에서 구르고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절대 기량으로 다른 선수를 비난하지 않았다.
혼잣말로도,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뭐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침착했어야지.’
물론, 자신이 느낀 것을 똑같이 느꼈을 것이었다.
누구도 이 경기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이를 알게 되었을 때, 안더레흐트 시절의 성배처럼 부담을 버리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심하게 당할까봐 오히려 더 긴장하는 선수도 있었다.
카불은 후자인 듯했다.
‘침착하기만 했으면 막았어.’
카불도, 허들스톤도 로테이션 멤버로서 꽤 중용되는 선수들이었다.
시즌이 끝날 즈음에는 20경기 이상의 출전 기록을 갖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렇게 안정감이 없다면 언제까지고 주전을 노릴 수 없었다.
“이번 건 막았어야지! 덩치랑 힘이 아깝다, 아주!”
34살의 베테랑 골키퍼 체르니가 카불을 질책했다.
윤기표와 체르니를 제외하면 카불과 허들스톤, 성배까지 모두 어린 선수들이었기 때문에 두 명의 역할이 중요했다.
하지만 체르니의 질책도 이들의 얼굴에서 긴장감을 없애기에는 부족했다.
“자, 자! 정신 차리고! 정신 차려! 아직 한 골이라고!”
윤기표는 질책 대신 격려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드넓은 올드 트래포드의 환호 소리에 묻혀 전해지지 않았다.
***
“루니! 오하라와 타이니오를 달고 우직하게 전진합니다!”
테베즈의 선취 골 이후, 경기는 거의 완벽하게 반코트 경기가 되었다.
가끔 성배가 볼을 잡아 전방으로 길게 넘겨줘도 그뿐, 로비 킨과 베르바토프 모두 혼자서 그라운드의 절반을 돌파할 수 있는 선수가 아니었다.
“허들스톤의 접근!”
“톰! 어딜 가!”
성배는 진짜로 당황했다.
경기 중 이 정도로 당황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리그 내 최강이었던 안더레흐트와 아약스 시절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빌어먹을.’
루니의 돌파는 분명 위협적이었지만, 자리를 잡고 자신과 함께 막으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허들스톤은 탱크처럼 돌진하는 루니가 주는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먼저 달려들었고, 이는 당연히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성배는 급히 허들스톤이 맡아야 하는 구역까지 커버할 수 있는 자리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측면으로! 호날두가 달려갑니다!”
중앙과 측면을 모두 신경 써야 하는 성배의 위치가 애매해지자, 루니는 고민하지 않고 측면으로 볼을 투입해주었다.
호날두와 테베즈에게 득점을 맡기고 플레이 메이킹 쪽에 힘을 주고 있는 루니의 멋진 패스였다.
‘내가 진짜...’
경기 전 예상대로 성배는 굉장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아져서 실속은 별로 없었다.
“호날두, 볼 따라가서, 급제동! 중앙으로 이동합니다!”
성배는 동선이 길어지면서 호날두를 따라잡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전력 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수비수가 전력 질주로 따라붙을 때 방향을 전환하는 것은 축구 좀 한다는 초등학생들도 기본으로 구사하는 개인기였고, 호날두의 깔끔한 방향전환에 성배는 중심을 잃었다.
‘젠장.’
오늘따라 경기 중 입술을 깨무는 경우가 많았다.
경기가 잘 풀리지 않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동안에는 팀이 흔들려도 자신은 제 몫을 해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은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중앙 돌파!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
중앙으로 움직이는 호날두를 막는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이번 시즌 후반기부터 호날두의 잠재력이 대폭발했고, 득점력도 같이 폭발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토트넘 수비수 대부분이 호날두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 중앙으로 크로스!”
그리고 잠재력이 드디어 터지기 시작한 호날두에게는 자연스럽게 여유가 생겨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어떻게든 자신이 골을 넣기 위해 욕심을 부렸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호날두의 크로스가 박스 안의 테베즈에게로 향했다.
“테베즈와 카불, 어어!!”
이번에도 테베즈와 함께 경합을 펼치는 선수는 카불이었다.
선취 골을 허용했던 상황에서의 실수를 만회하겠다는 듯,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달라붙었던 카불이었고, 테베즈보다 한 발 앞서서 볼을 건드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중계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삐-익!!
< 낭만필드 - 129 > 끝
ⓒ 미에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