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28 >
성배의 생각대로 경기 초반, 아스날은 월콧이 아닌 흘렙의 플레이를 중심으로 경기를 풀어나갔다.
하지만 그나마 쓸만한 동료인 월콧이 성배에게 틀어 막혀 있고, 벤트너와 디아비는 그닥 도움이 되지 못했다.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드리블러이자 벨라루스의 축구 영웅, ‘하얀 늑대’ 흘렙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흘렙의 측면 돌파 시도! 심봉다를 제칩니다! 중앙으로 이동하지만, 킹이 볼 따냅니다! 이번에도 막히는 흘렙의 돌파!”
감독 교체와 킹의 부상 복귀, 성배의 합류 등으로 인해 토트넘 수비진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상황이었다.
건강하기만 하면 무조건 삼사자 군단의 부름을 받는 킹이었고, 그런 킹이 이끄는 수비진이 약할 리 없었다.
흘렙은 피구도, 지단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트라오레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도와줬어야죠! 약간의 위협만 줘도 충분한 상황이었는데, 너무 겁을 냈어요.”
이번 시즌, 겨우 두 경기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 전부인 트라오레였다.
안 그래도 경험이 부족한 선수가 경기 출전 기회마저도 적었으니 적절한 플레이를 기대하기 힘들었다.
“조금 전에는 너무 적극적이어서 위기를 자초했는데, 이번에는 너무 조심스러웠어요. 밸런스가 정말 아쉽네요.”
“아무래도 수비수이지만 공격에도 큰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 포지션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밸런스를 잡는다는 게 굉장히 어렵지 않습니까?”
“예. 굉장히 어렵죠. 경험이 쌓이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되겠지만, 경험만으로는 할 수 없는 거죠. 기본적으로 축구 지능이 뛰어난 영리한 선수라야 하는데, 좋은 풀백이 되려면 공격과 수비, 하나만 잘해도 상관없지만, 정말 좋은 풀백이 되려면 이 밸런스라는 걸 잘 맞출 줄 알아야죠.”
예를 들어 이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마르셀루나 에브라는 ‘돌아오지 않는 풀백’ 소리를 들으며 윙어로 전향시켜야 한다는 비판을 듣고 있었다.
둘 다 좋은 풀백이라고 평가받으며 특급 유망주로 이름이 높았지만, 수비력의 문제는 그들의 평가를 깎아내렸다.
“토트넘의 주성배가 최근 주목을 받는 것도 그런 이유거든요? 이 선수는 분명 남미 선수들이나 유럽 선수들, 흑인 선수들에 비해 탄력, 피지컬, 폭발력 등 많은 부분에서 부족해요. 그런데 밸런스가 기가 막히거든요? 공격해야 할 때와 수비해야 할 때를 기가 막히게 판단하는 능력이 있어요.”
스피드를 제외한 신체적인 능력이 비슷한 입지의 다른 선수들에게 밀리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킥을 제외한 기술적인 능력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비슷한 나잇대에서 가장 주목받는 풀백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성배의 안정감에 있었다.
“확실히 지난 두 경기에서 MOM을 수상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눈에 띄는 플레이가 많지 않은 선수이긴 합니다.”
“모든 선수가 주인공일 필요는 없어요. 주성배 선수는 조연으로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해주거든요. 눈에 띄지는 않지만, 자신이 맡은 측면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 그 역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잘해내는 선수예요.”
트라오레가 보여준 플레이의 아쉬움으로 시작한 대화는 성배를 칭찬하며 끝났다.
어쨌든 성배가 왜 빅클럽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는 것인지 알 수 있는 대화였다.
“폭발력이 아쉬웠는데, 얼마 전부터 그 부분이 보완되었거든요? 그러니 인기가 오를 수밖에 없죠.”
오늘도 성배는 딱히 눈에 확 띄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성배와 계속 맞붙고 있는 월콧도 마찬가지였다.
공격수와 수비수의 맞대결에서 같이 버로우한다면, 누가 이득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왼쪽이 비었군.’
아스날의 진영을 확인한 성배는 오랜만에 자리를 떠나 전방으로 올라갔다.
성배가 눈에 띄지 않는다고 했지만, 원래 성배는 그런 플레이를 즐기는 선수였다.
지난 두 경기에서의 플레이가 특별했던 것뿐이었다.
‘다들 오른쪽으로 몰려가 있는데, 나를 너무 무시하는 거지.’
오늘 경기에서 토트넘은 아스날의 왼쪽 측면을 중점적으로 노렸다.
트라오레가 구멍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고, 흘렙은 적극적으로 수비에 가담하는 편이었지만, 그렇게 되면 아스날의 공격이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
‘수비가 전체적으로 불안하네.’
결국, 갈라스가 커버해줘야 했는데, 센터백 파트너로 나선 호이트는 기량도 기량이거니와 본인의 포지션도 아니라서 트라오레보다 더 불안했다.
아스날의 왼쪽을 파면 왼쪽이든 중앙이든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타이니오, 왼쪽으로 패스! 오랜만에 올라온 주가 볼을 잡았습니다.”
“잘 벌려줬죠! 아스날 수비진이 우르르 움직입니다.”
호이트가 불안해서 커버해줘야 하는 것은 사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스날 부동의 라이트백 주전으로 좋은 활약을 펼쳐주고 있었지만, 아무리 사냐라도 호이트까지 신경 쓰면서 플레이하는 것은 버거웠다.
“주, 사냐와의 일대일! 주춤, 주춤!”
사냐를 앞에 두고 성배는 천천히 움직였다.
굳이 사냐를 제칠 필요도 없었다.
시간만 끌어주면 킨이 호이트를 따돌리고 침투하거나 레넌이 트라오레를 따돌리고 움직여 줄 것이었다.
‘오호, 이것도 좋은 선택이지.’
성배의 선택은 중앙도, 반대편도 아니었다.
사냐와 마주보던 성배가 오른발 인사이드로 가볍게 밀어준 볼의 주인은 말브랑크였다.
사냐가 성배에게 집중하고 있는 사이에 말브랑크에 대한 견제가 헐거워졌고, 그는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말브랑크에게! 사냐, 급히 따라가서 태클!”
말브랑크는 성배의 등 뒤를 크게 돌아서 텅 빈 왼쪽 측면을 노렸다.
성배의 패스가 그의 발밑으로 이어졌고, 당황한 사냐는 성배를 버려두고 급히 따라가 발을 뻗었다.
-삐-익!
“파울입니다! 사냐, 말브랑크의 발을 걸고 말았습니다.”
“위험지역인데요. 하지만 말브랑크의 크로스는 꽤 정확한 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기도 했어요.”
사냐의 파울로 토트넘은 코너킥보다 더 가까운 위치에서 프리킥을 얻어냈다.
“다만, 주성배 선수의 킥이 위협적이라서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네요.”
그리고 토트넘에는 킥에서만큼은 스페셜리스트인 성배가 있었다.
“잘 부탁한다.”
자리에서 일어난 말브랑크는 별말 없이 성배의 어깨를 두드려준 이후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토트넘 선수들은 이미 성배의 킥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또 믿음직하네.’
188cm의 레들리 킹, 191cm의 마이클 도슨.
이 두 선수를 보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신장에 비해 제공권이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189cm의 베르바토프는 그 신장만으로도 위압감을 주었다.
안더레흐트 시절 이후 오랜만에 느끼는 든든함이었다.
‘이런 상황이면 언제든 감사하지.’
반면, 갈라스와 호이트의 센터백 조합은 제공권이 그리 강한 편은 아니었다.
만능 수비자원이지만 모든 능력치가 준수한 만능형에 속하는 181cm의 갈라스와 라이트백이 원래 포지션인 180cm의 호이트.
191cm의 벤트너와 실바가 세트피스 수비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세트피스 수비는 키만 크다고 다가 아니야.’
두 선수 모두 제공권이 나쁘지 않은 선수들이었지만, 자기 포지션에서의 제공권과 세트피스 수비에서의 제공권은 또 다른 개념이었다.
왼발잡이가 유리한 왼쪽에서 성배는 오른발 프리킥을 준비했다.
“주심의 휘슬이 울렸습니다! 주, 도움닫기 후 크로스!”
오른발로 강하게 감긴 크로스가 아스날의 박스 안으로 날아갔다.
수비가 어설픈 벤트너를 노려 그가 수비하는 도슨을 향해 높지만 빠르게 날아가는 크로스였다.
‘거기서 뜨면 큰일 날 수도 있을 텐데.’
아쉽게도 도슨은 벤트너의 몸에 막혀 좋은 위치를 빼앗겼다.
하지만 성배는 실망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아쉬워하다가 도슨이 점프하는 위치를 보고 다시 희망을 품었다.
“벤트너, 아, 아앗!”
성배는 프리킥을 시도할 때부터 처리하기 까다롭게 차는 것이 목적이었다.
처리하기 까다로우려면 빨라야 했다.
그리고, 크게 휘어야 했다.
“뒤로 날아갑니다! 골! 골입니다! 자책골입니다!”
벤트너는 스트라이커였다.
스트라이커는 일반적으로 골대를 향해 움직이면서 하는 헤딩에 익숙했다.
골대를 등진 데다가 골대 쪽으로 흐르는 크로스를 막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리는 빼앗겼지만, 벤트너가 쉽게 움직이지 못하도록 견제한 도슨 역시 훌륭히 자신의 역할을 다해주었다.
“벤트너의 자책골이 터졌습니다! 좋지 않습니다. 이제는 결승전에 올라가기 위해 네 골이 필요해진 아스날!”
“네 골도 네 골이지만, 화이트 하트 레인이 뜨겁게 달아올랐어요. 이런 분위기에서 원정팀이, 그것도 화이트 하트 레인의 주적이나 다름없는 아스날이 네 골을 넣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죠.”
벤트너의 자책골은 결정적이었다.
아스날에게는 청천벽력, 그야말로 최악의 소식이었다.
패배를 직감한 아스날 선수들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토트넘의 쇼타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제나스, 중앙의 로비 킨에게! 로비 킨, 수비수를 등지고, 빠져나옵니다.”
두 번째 골 이후로는 거의 토트넘의 반코트 경기가 펼쳐졌다.
아스날도 흘렙과 월콧을 이용해 산발적인 공격을 시도했지만, 흘렙은 공격과 수비를 계속 오가느라 체력이 많이 떨어졌고, 월콧은 성배에게 막혀 힘을 쓰지 못했다.
드리블을 주무기로 하는 선수는 체력이 떨어지는 순간 끝이었고, 스피드를 주무기로 하는 선수는 달리지 못하는 순간 끝이었다.
“킨, 돌아서면서 오른쪽으로 공간 패스! 레넌이 달려듭니다!”
박스 안에서 수비수를 등지고 자리 잡은 킨은 제나스에게 볼을 건네받으며 바깥으로 나왔다.
박스에서 나오면서 호이트와 거리를 벌렸고, 순간적으로 빠르게 돌아서면서 페널티박스 오른쪽에 생긴 공간으로 볼을 띄워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트라오레를 따돌린 레넌이 있었다.
“레넌의 가슴 트래핑! 바로 슈팅! 골! 골입니다! 토트넘의 네 번째 골! 점수 차는 4골까지 벌어집니다!”
“아아, 토트넘과 아스날의 북런던 더비가 이렇게 될 거라고는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요? 아무리 아스날이 명분보다는 실리를 노렸고, 후보 선수들을 다수 활용했지만, 이건 충격이 좀 클 것 같습니다.”
가슴으로 볼을 받아 발리로 이어간 레넌의 슈팅은 파비안스키의 수비를 뚫고 골대를 흔들었다.
토트넘의 네 번째 득점이었다.
세 번째 득점 상황에서 레넌의 어시스트를 받아 골을 넣은 로비 킨이 이번에는 레넌의 골을 도와주었다.
“아스날 입장에서는 버려도 되는 경기, 버려도 되는 경기임은 부정하지 않습니다만, 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텐데요. 과연 벵거 감독이 어떻게 팬들을 달랠지 궁금해지네요.”
토트넘에게 패배했다는 것만으로도 분노할 아스날 팬들이었다.
그나마 시소게임으로 패배했으면 작은 불만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네 골까지 차이가 벌려진 이상 불만은 터질 수밖에 없었다.
토트넘을 증오하고 토트넘만큼은 꼭 잡고 싶어하는 선수들을 달랠 방법도 생각해야 했다.
“체력을 아끼는 것도 좋지만, 이건 체력 조금 아끼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결과입니다.”
아스날이 오늘 경기를 통해 무엇을 어떻게 잃는지는 토트넘과 전혀 상관이 없었다.
아니, 토트넘은 어떻게든 더 많은 것을 잃게 하고 싶어했다.
아직 경기는 30분 가까이 남아있었고, 토트넘은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IN - 3. 윤기표 / OUT - 13. 주성배]
성배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아스날-첼시를 연달아 만나고 선덜랜드에 이어 다시 아스날을 만나는 일정상 합류하자마자 열심히 뛰어야 했던 성배에 대한 배려였다.
“잘했어. 나머지는 나한테 맡기라고.”
“형님이라면 당연히 믿죠. 그럼 힘내세요.”
성배는 자신을 대신해 투입된 윤기표와 가볍게 포옹하며 그라운드를 나섰다.
지난 두 경기와 비교하면 마땅한 임팩트를 보이지 못했지만, FA 규정상 벤트너의 자책골 상황에 어시스트가 기록된 덕분에 세 경기 연속 공격 포인트를 기록할 수 있었다.
잉글랜드 무대 첫 어시스트였다.
“수고했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라모스 감독의 영어가 짧았기 때문에 교체되어 나온 성배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저게 전부였다.
하지만 표정만으로도 오늘의 경기가, 성배의 활약이 만족스러웠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 낭만필드 - 12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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