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23 >
“빠르게 돌파합니다! 호이트와 일대일!”
성배는 망설이지 않고 호이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평소였다면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는 말브랑크를 이용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거침없이 파고듭니다! 밀리지 않습니다!”
호이트도 태클이나 몸싸움 등 단순 수비력은 나쁘지 않았다.
호이트의 가장 큰 문제는 경험 부족과 그로 인한 위치 선정에서의 실수였고, 성배의 눈에는 빈틈이 훤히 보였다.
‘그 정도면 아약스에서도 못 뛰어.’
아스날 유스 출신에 잉글랜드 국적.
분명 나쁘지는 않은 선수였지만, 둘 중 하나라도 없었으면 절대 여기서 뛸 수 없는 선수였다.
에레디비지에를 정복하고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한 성배의 상대는 아니었다.
“어깨! 어깨 들어갔어요!”
호이트의 피지컬은 나쁘지 않은 수준.
성배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몸싸움은 피지컬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고, 자리싸움에서부터 승리한 성배가 먼저 어깨를 집어넣었다.
‘비켜!’
어깨를 먼저 집어넣었으면 돌파에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른쪽 어깨가 호이트의 가슴까지 들어갔을 때, 성배는 오른팔로 호이트를 밀어냈다.
“대각선으로 치고 올라갑니다! 중앙으로!”
오른팔을 휘둘렀을 때, 잠깐이지만 공간이 생겼고, 그 잠깐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성배는 안쪽으로 잘라 들어갔고, 자신의 앞으로 지나가는 성배와 충돌을 피하기 위해 호이트는 급히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진짜 안 들어오네.’
다음 플레이의 각을 재기 위해 중앙을 살핀 성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토트넘의 투톱은 로비 킨과 베르바토프.
중앙에서 어떻게든 비벼주고 있는 킨은 단신이었고, 장신인 베르바토프는 몸싸움을 극히 꺼리는 선수였다.
‘오늘은 뛰기 싫은가.’
베르바토프는 ‘백작’이라는 별명답게 진짜 귀족처럼 스타일의 기복이 심했다.
어느 날은 평소답지 않게 적극적으로 몸싸움을 펼치면서 10km가 넘는 활동량을 보이기도 하지만, 또 어느 날은 절대 상대 선수와 부딪히지 않으면서 고작 2km 정도를 딸릴 때도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오늘은 별로 뛰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좋은 찬스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다시 바깥쪽으로 빠져나갑니다! 센데로스, 넘어집니다!”
성배는 페널티박스 경계 부근에서 다시 바깥쪽으로 치고 나갔다.
호이트가 뚫리면서 커버를 위해 달려오던 센데로스는 급격한 방향 전환에 균형을 잃고 넘어져 바닥에 손을 짚었다.
뒤이어 따라오던 호이트는 또 한 번 자신의 앞으로 지나간 성배 때문에 한 번 더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나이스!’
그리고 성배의 눈에 들어온 선수가 있었다.
반대편에서 빠르게 침투하는 레넌을 보면서 성배의 오른발이 움직였다.
“반대편으로 크로스! 레넌!!”
스피드 하나만큼은 알아주는 레넌이었다.
레넌은 아스날 선수들의 시선이 성배에게 몰리며 생긴 틈을 놓치지 않고 2선에서부터 빠르게 침투했다.
“발리 슈팅! 아! 아깝습니다! 크로스바 위로 솟구치는 레넌의 슈팅!”
안타깝게도 레넌의 골 결정력은 좋지 못했다.
성배의 돌파와 레넌의 침투, 그리고 크로스까지.
일련의 과정은 완벽했지만, 마지막 슈팅이 떠버리면서 득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대단한 돌파였습니다. 이 선수가 이렇게 돌파력이 뛰어난 선수였는지 몰랐는데요. 굉장한 돌파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완전히 벼르고 나온 것 같은데요? 토트넘 데뷔전 첫 플레이부터 놀라운 모습이에요.”
성배를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플레이는 역시 정확한 킥을 이용한 크로스와 롱패스였다.
그다음은 안정적이고 지능적인 수비력.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에 공간을 이용하는 돌파.
시원하고 거침없는 돌파력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확실히 이 선수가 최근 물이 오르긴 올랐어요. 지금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본인의 기량으로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토트넘은 1,100만 유로가 전혀 아깝지 않겠는데요?”
득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성배의 플레이는 완벽했다.
레넌이 골을 넣지 못한 것은 레넌의 문제였고, 레넌에게 넘겨준 크로스까지의 플레이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만나서 반갑다, 프리미어리그.’
리그 경기도 아니었고, 가장 중요도가 떨어지는 칼링컵 경기였지만, 어쨌든 만족스러운 첫 플레이였다.
‘이 정도가 다는 아니겠지?’
간절히 바라왔던 프리미어리그 입성.
자신이 그렇게 원하고 바랐던 프리미어리그가 이 정도 수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
‘리그로 넘어가야 진짜를 느낄 수 있는 건가?’
경기가 계속될수록 칼링컵의 의미가 피부로 느껴졌다.
아스날과 토트넘이 느끼는 칼링컵의 무게가 확연히 달랐다.
우승해봤자 70만 유로 정도의 상금과 UEFA컵 출전권이 전부인데, 아스날에게는 둘 다 욕심나지 않는 보상이었다.
우승컵과 UEFA컵 출전을 노리는 토트넘이 대부분의 주전 선수를 출전시킨 것과 반대로 아스날은 2진을 내보냈다는 것만으로도 온도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디아비, 오른쪽의 월콧에게! 월콧, 돌파를 준비합니다!”
물론 그라운드 위에 나선 선수들은 최선을 다했다.
칼링컵뿐 아니라 리그에서도 출전 기회를 잡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하는 선수들이었다.
벵거 감독의 눈에 들기 위해서는 여기서 뭔가를 보여주어야만 했다.
‘네가 날 정면에서 뚫겠다고?’
돌파하겠다는 의도가 여실히 느껴지는 월콧의 움직임에 성배도 자세를 잡았다.
두세 번 정도 마주치면서 확실히 느낀 것이 있었다.
몇 년 뒤, 월콧이 성장한 이후라면 모를까, 지금의 월콧은 자신의 상대가 아니었다.
“월콧, 조심스럽게 움직입니다. 주가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몇 번 성배에게 막히면서 월콧도 조심스러워진 모습이었다.
‘드리블 스타일부터 고치고 와.’
아무리 조심스럽게 움직인다고 해도 월콧에게는 분명 한계가 존재했다.
스피드가 아무리 뛰어나도 지나치게 단조로운 패턴은 역습 상황이 아니면 위력이 반감되었다.
“빠른 돌파 시도! 주, 따라붙었습니다!”
결국, 월콧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스피드였다.
믿을 것도 스피드밖에 없었다.
아무리 타이밍을 재려고 해도 빈틈을 내보이지 않는 성배의 모습에 월콧은 다시 한 번 스피드로 승부를 걸어왔다.
‘네가 아무리 빨라도.’
하지만 성배는 빠르게 달리는 월콧을 놓치지 않았다.
어차피 월콧의 패턴은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다.
월콧만큼은 아니지만, 만만치 않은 스피드를 가진 성배가 지금과 같은 지공 상황에서 놓칠 리 없었다.
‘나도 만만치 않아.’
다섯 발자국을 뛰기도 전에 볼은 성배의 발밑에 있었다.
“가볍게 발을 뻗어 월콧의 볼을 빼냅니다! 완벽한 태클!”
단순히 오른발을 뻗은 것만으로 월콧의 볼은 성배의 것이 되었다.
월콧은 사이드라인 바깥으로 쓰러졌고, 성배를 압박하는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프리미어리그는 이런 거 좋아하지?’
성배는 아스날 진영 중앙쯤에 자리 잡은 베르바토프를 발견했다.
수비수 중 이런 상황에서 가장 위협적인 선수는 성배였다.
“아, 망설이지 않고 전방으로 길게! 있습니다! 베르바토프!”
베르바토프라면 성배의 롱패스를 가장 위협적으로 이용해줄 수 있는 선수였다.
단점도 있는 선수지만, ‘백작’처럼 우아한 볼 터치와 적절한 패스로 위협적인 역습 장면을 만들어낼 거라 기대했다.
“완벽한 볼 트래핑! 로비 킨, 레넌! 뛰어들어갑니다!”
뒤에서 연결된 볼을 베르바토프가 잡아주고, 그 사이 킨과 레넌, 제나스가 전방으로 침투하는 플레이.
토트넘이 자랑하는 위력적인 공격 패턴이었다.
“지체하지 않고 측면으로! 역시 레넌! 빠릅니다!”
실바가 서둘러 베르바토프에게 붙으려 했지만, 베르바토프가 그런 시간을 줄 리 없었다.
베르바토프는 빠르게 오른쪽으로 파고드는 레넌에게 볼을 넘겼고, 이미 스피드가 붙은 레넌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아스날 수비진을 가볍게 뚫어버렸다.
‘역시. 공격은 걱정할 필요가 없겠어.’
전방으로 멋진 패스를 투입해주었다고 해서 성배의 역할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볼을 내주자마자 조금이라도 공격에 도움이 되기 위해, 상대 수비수을 긴장시키기 위해 앞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공격수들의 움직임을 보니, 자신이 더 할 일은 없어 보였다.
“레넌, 크로스! 중앙에서 로비 킨!! 골! 골입니다!”
측면에서 올라온 레넌의 크로스를 받은 로비 킨이 몸을 앞으로 숙이며 시도한 헤더가 골로 연결되었다.
에미레이트 스타디움 원정에서 선취 골을 기록한 토트넘은 귀중한 원정 골을 기록하며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역시! 멋진 킥이었어. 몇 번 보기는 했지만, 대단한데?”
주장 완장을 차고 있는 킹이 성배의 패스를 칭찬했다.
‘이 사람만 좀 건강하면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을 텐데.’
킹은 정말 좋은 수비수였다.
피지컬, 수비 지능, 수비 조율 등 모든 면에서 부족한 부분이 없었고, 건강하기만 하다면 퍼디난드-테리의 국대 조합을 위협할 수 있을 것이라 평가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가장 큰 문제는 부상.
그가 출전하기만 하면 토트넘의 수비라인은 리그 정상급으로 탈바꿈했지만, 그가 없으면 하위권으로 떨어졌다.
‘공격진은 이렇게 잘해주는데.’
21라운드까지 토트넘의 리그 득점은 42득점으로 리그 1위를 달리는 아스날과 공동 1위였다.
하지만 실점이 무려 38골.
최하위 더비 카운티와 강등권인 18위 선덜랜드, 효율 그 자체의 축구를 보여주는 레딩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실점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할 수도 없고.’
수비라인을 조율할 자신은 있었지만, 토트넘의 수비 전술에 익숙하지도 않았고, 동료들과 호흡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지금은 킹이 건강하거나 다른 선수가 각성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라도 우승해야 할 텐데.’
아약스에서 챔피언스리그와 UEFA컵을 모두 출전해 이번 시즌은 더 이상 유럽 대항전에 나설 수 없었다.
‘적어도 유럽 대항전은 나가자고.’
챔피언스리그는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미 유럽 대항전의 맛을 본 상황에서 유럽 대항전을 포기할 수 없었다.
***
“다시 한 번 드리블 돌파 시도! 호이트, 정신을 못 차립니다!”
거침없는 성배의 플레이에 그를 막아야 할 아스날 선수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성배는 꽤 유명했고, 평소 플레이 스타일 역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완전히 다른 오늘의 플레이는 경험이 많지 않은 아스날의 젊은 선수들을 당황케 했다.
‘놔, 이 자식아!’
평소와 다른 적극적인 플레이에 성배 자신도 흥분한 상태였다.
당황해서 손을 뻗은 호이트 때문에 유니폼이 늘어나 목이 졸렸지만, 그것은 방해가 되지 않았다.
“떨쳐냅니다! 그리고 크로스, 아니, 페이크! 안쪽으로 접었습니다!”
오른팔을 휘둘러 간단히 떨쳐낸 성배는 크로스 페인트로 호이트를 따돌렸다.
그리고 박스 바깥에서 대기하던 제나스에게 볼을 넘겨주었다.
“제나스, 그대로 슈... 아! 파울! 파울이 선언됩니다! 데니우손, 백태클입니다! 거친 태클!”
성배의 패스 덕분에 제나스에게 완벽한 슈팅 찬스가 만들어졌다.
마음만 급해진 데니우손은 제나스의 뒤에서 거친 태클을 시도했고, 그 태클에 제나스가 걸려 넘어지며 반칙이 선언되었다.
“아! 옐로우 카드! 경고입니다!”
“솔직히 이 정도 태클이면 옐로우 카드가 아니라 레드 카드를 줘야죠! 충분히 레드 카드를 받을 만한 거친 태클이었어요!”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이기 때문인지 주심은 퇴장이 아닌 경고를 꺼내 들었다.
아스날 선수들과 토트넘 선수들이 주심에게 몰려들어 자신들의 입장을 어필했지만, 성배의 신경은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프리킥...’
직접 슈팅을 시도할 수 있는 위치에서의 프리킥 기회였다.
< 낭만필드 - 12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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