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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122화 (97/356)

< 낭만필드 - 122 >

레딩과의 FA컵 3라운드는 토트넘의 무난한 승리로 끝이 났다.

이 경기에서 성배는 이렇다 할 임팩트를 보여주진 못했지만, 몇 차례 안정적인 수비력과 정확한 킥 능력을 보여주면서 팬들에게 기대감을 심어주었다.

불안한 수비가 계속해서 발목을 잡아왔던 토트넘이었기에 성배를 향한 팬들의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선발 첫 출전이 북런던 더비라니. 부담스럽네.”

성배가 정식으로 토트넘에 합류한 날짜는 1월 3일.

1월 5일에 교체 출전으로 15분 정도 모습을 드러냈지만, 선발 출전을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토트넘의 일정이 성배의 선발 출전을 서두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갔다.

“어쩔 수 없잖아. 팀도 급하니까.”

성배의 토트넘 합류 이후 훈련장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하는 윤기표가 볼을 돌려주며 말했다.

토트넘은 급했다.

그들도 최대한 시간을 주고 싶었지만, 아스날과의 경기를 앞에 두고 여유를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북런던 더비가 괜히 북런던 더비는 아니죠. 뭐, 저도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아요.”

아주 오랜 옛날인 1919년.

1부리그 참가 팀이 20팀에서 22팀으로 늘어났다.

19위를 차지했던 첼시가 강등을 면했고, 1부리그 최하위 팀과 2부리그 3위에서 7위 팀까지를 모아 1부리그에 참가할 팀을 투표로 선정했다.

1부리그 최하위였던 토트넘과 2부리그 5위였던 아스날이 여기 포함되어 있었다.

상식적으로는 토트넘이 되어야 했을 마지막 합류 팀은 아스날 구단주의 로비로 인해 아스날이 되었고, 그 이후로 두 팀은 여러 사건을 통해 지금의 관계로 발전했다.

“그리고 제게 큰 기회라는 것도 알아요. 잘만 하면 데뷔전부터 팬들의 관심을 확 당겨올 기회기도 하고요.”

팀의 가장 큰 문제인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1,100만 유로를 투자해 영입한 성배는 이미 팬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첼시, 리버풀, AC 밀란 등을 거절하고 토트넘을 선택했다는 것 역시 플러스 요인이었다.

“그렇게 인기가 많은데, 여기서 더 인기를 끌겠다고? 이야, 너무하네.”

목표는 빅4와 다르지 않은데, 명성이 떨어지는 토트넘은 선수 수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토트넘의 목표를 위한 선수들은 빅4가 원하는 선수와도 같았고, 그럴 경우 토트넘이 영입에 성공할 확률이 크게 낮아졌다.

오죽하면 한국 한정으로 ‘거절햄’이라는 별명까지 있을 정도였다.

“인기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선택의 여지도 없잖아요. 아스날과의 경기는 잘하면 영웅 되는 거고 못하면 역적 되는 건데요.”

그런 상황에서 빅4는 물론이고 해외의 빅클럽들까지 달려들었음에도 토트넘을 선택한 성배에게 지지를 보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스무 살에 불과하지만, 이미 정상급 풀백으로 인정받는 선수.

앞으로 몇 년이 더 지나면 어떻게 성장할지 기대되는 어린 선수에게 토트넘 팬들은 열렬한 응원을 보내주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팬들을 완전히 네 팬으로 끌어들이겠다?”

“네.”

이미 성배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는 팬들이었다.

아스날과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선발 출전 기회를 잡은 것은 성배에게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했지만,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기회이기도 했다.

아스날과 토트넘의 대결은 칼링컵 결승전 티켓이 걸린 4강전 경기였다.

서로에게 절대 질 수 없는 양 팀이었지만, 우승 경쟁을 펼치고 있는 아스날과 당장 리그에서의 순위를 끌어올려야 하는 토트넘 모두 전력을 투입하긴 힘들었다.

“골키퍼부터 주전은 거의 없네.”

경기 시작 몇 시간 전에 발표된 선수 명단에서 아스날 핵심 선수들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름값이 높은 선수라고 해봤자 주전 못지않은 출장기회를 얻은 월콧과 반 페르시 정도.

두 선수를 제외하면 골키퍼인 알무니아는 물론이고 클리시, 갈라스, 사냐, 투레, 파브레가스, 흘렙, 아데바요르 등 주전 대부분이 빠진 것이었다.

“뭐, 주전 선수 없으면 우리야 좋지. 안 그래?”

윤기표는 이 상황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성배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담스러웠던 경기가 아주 조금이나마 편해졌다.

“형. 월콧은 어때요?”

오늘도 성배는 왼쪽 풀백으로 경기에 나섰다.

오늘 성배와 매치업된 선수는 아스날과 잉글랜드의 미래라고 불리는 시오 월콧.

성배보다도 두 살이 어린 선수로, 성배로서는 거의 처음으로 만나는 자신의 매치업 상대였다.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시오 월콧을 모를 수는 없었다.

잉글랜드를 뒤집어 놓으며 등장한 선수였다.

당연히 성배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

“무지막지하게 빠른 선수라는 거? 그 정도는 알고 있죠. 그 이상은 몰라요.”

의외겠지만, 축구 선수들은 자신이 속한 리그 바깥의 선수들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팬들이야 대부분의 유명 리그를 찾아보기 때문에 선수들에 대해 잘 알고 있겠지만, 선수들은 달랐다.

한 선수가 다른 선수들에 대해 알아야 하는 정보의 내용과 깊이는 팬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했다.

그랬기에 자신이 속한 리그의 선수들을 분석하고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다.

“무지막지하게 빠른 선수지. 그런데 그게 다야. 아직은.”

윤기표가 단호히 말했다.

잉글랜드가 주목하는 유망주에 성배보다도 두 살이나 어린 열여덟 살.

2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프로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슈퍼 탤런트에 대한 평가라기에는 지나치게 짰다.

“이게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빠르기는 한데 드리블이 단순해서 수비하는 게 어렵지는 않아. 골 결정력도 그리 좋지 않고, 크로스도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아. 축구 센스도 떨어지는 편이고.”

윤기표의 입에서 월콧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쏟아졌다.

성배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진지하게 그의 평가를 듣고 있었다.

“그렇다면 별로 부담은 없겠네요.”

윤기표의 평가를 듣고 내린 결론이었다.

저 말대로라면 그리 까다로운 선수가 아닐 터였다.

전생에서부터 자신이 알고 있던 월콧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렇다고 막 쉽지도 않아. 스피드가 워낙 엄청나서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바로 뚫려. 일단 뚫리면 거기서 끝이지.”

이게 재능이 있는 선수들의 무서운 점이었다.

분명 아직 미숙한 점이 많은 선수인데, 방심하면 바로 뚫려버리는 것이었다.

“그 정도라면 문제는 없겠네요. 아무리 방심해도 플레이가 단순하면 절대 안 뚫립니다. 제 스피드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고요.”

로번, 호아킨, 호날두 등과 비교하면 월콧은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였다.

월콧이 자신을 뚫을 수 있는 유일한 장점이 스피드였지만, 자신의 스피드 또한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대단했다.

스피드 외에 다른 것이 없다면, 월콧은 자신을 뚫을 수 없었다.

“에이, 그래도 잉글랜드가 주목하는 유망주야.”

윤기표는 성배가 자만하는 것 같아 걱정해주었다.

성배가 대단하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지만, 월콧 또한 축구 종가 잉글랜드가 주목하는 대형 유망주였다.

“형. 제 이적료가 1,100만 유로에요. 빅리그는 처음인 풀백의 이적료가요. 이 정도 이적료 받고 월콧도 못 막으면 먹튀죠.”

성배의 이적료는 이번 겨울에 이적한 선수 중 4위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이 이적료에는 지금 당장의 성적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비용이 포함된 것이지만, 어쨌든 성배가 상당히 높게 평가되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비슷한 케이스의 에브라가 700만 유로의 이적료를 받은 것과 비교해보면 성배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그래, 너 잘났다.”

윤기표의 이적료는 250만 유로였다.

***

[죽여버려!! 그냥 돌려보내지 말라고!!]

아스날의 홈구장인 에미레이트 스타디움.

6만여 명의 아스날 홈팬들이 거의 악을 쓰다시피 내지르는 소리가 토트넘 선수들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조용한 응원 분위기로 유명해 ‘에미레이트 도서관’이라는 별명까지 가진 경기장이 맞는지 의심부터 들었다.

“에휴, 또 시작이네.”

하지만 토트넘 선수들은 이런 분위기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아예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이었다.

주장인 레들리 킹은 악의에 찬 저 소리를 듣고도 귀를 후빌 뿐이었다.

“저 녀석들 닥치게 해주자고.”

로비 킨 입을 열었다.

벌써 6년째 토트넘의 핵심 스트라이커로 활약 중인 그였다.

당연히 아스날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있었다.

‘분위기 죽여주네.’

성배의 감상이었다.

안더레흐트와 브뤼헤의 브뤼셀 더비나 아약스와 페예노르트의 더비의 분위기는 애들 장난 수준이었다.

진짜로 살기가 느껴지는 경기장의 분위기는 성배조차도 긴장하도록 만들었다.

‘이 정도 분위기면... 오늘 잘하면 바로 스타다.’

성배는 적당한 긴장감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칼링컵은 그다지 주목도가 높지 않은 대회였다.

하지만 아스날와 토트넘의 북런던 더비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잉글랜드의 관심이 집중된 이 경기에서 자신은 잉글랜드 데뷔전을 가질 것이었고, 적당히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홈경기인데도 아스날의 라인업이 너무 소극적입니다. 아스날에게 칼링컵은 그리 중요한 대회가 아니겠지만, 상대가 토트넘이지 않습니까? 이런 라인업은 의외입니다.”

북런던 더비에서 아스날이 이런 라인업을 들고 나올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확고한 주전은 반 페르시 한 명, 월콧이나 센데로스 같은 주전급 로테이션 선수도 거의 포함되지 않은 라인업이었다.

“반면, 토트넘은 거의 주전 선수들로 경기에 나섰죠? 킨, 베르바토프, 킹은 물론이고 얼마 전에 영입한 대형 풀백 유망주, 주성배까지도 출전시켰어요.”

라인업의 무게감만 따지자면 토트넘이 한 수 위였다.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는 아스날과 12위의 토트넘이었지만, 2진급 라인업으로 지난 시즌 5위의 토트넘보다 우위에 서는 것은 무리였다.

“제나스에게 볼이 이어집니다. 주위를 살피는 제나스, 그 앞을 실바가 막아섭니다.”

캐릭의 이적 이후, 토트넘 미드필드의 중심은 제나스였다.

눈에 확 띄는 장점은 없어도 단점도 없는 만능형 제나스에게 어울리는 역할이었다.

‘여기로 줘!’

성배는 오늘 욕심을 부릴 생각이었다.

오늘과 같은 경기에 욕심내지 않을 수 없었다.

북런던 더비라는 상징성이 있는데, 상대는 2진급 선수들을 내보낸 상황.

이 상황을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

“제나스, 측면으로 크게 열어줍니다! 측면에서 빠르게 올라오는 주에게!”

아스날의 약점은 항상 같았다.

주전 선수들의 잦은 부상과 팀의 클래스에 어울리지 않는 얇은 스쿼드.

오늘 경기에 선발로 나온 수비형 미드필더 데니우손이나 라이트백 호이트는 아스날에 어울리지 않는 선수들이었다.

‘20년의 한을 좀 받아줘야겠어.’

그들도 나름 노력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기량으로 아스날의 유니폼을 입고 공식전에 나선다는 것이 억울했다.

자신은 이 자리에 서기 위해서 20년을 기다려야 했다.

‘배배꼬인 생각이라는 건 알아.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했지만, 누구보다 많은 좌절을 겪었다.

그 좌절의 시간이 끝나고 드디어 이 무대를 밟은 지금.

현재의 성공 덕분에 잊었다고 생각했던 분노와 울분이 다시 올라왔고, 이것을 터뜨리고 싶었다.

‘너희한테 유감은 없다.’

지능적인 플레이는 성배의 가장 큰 무기이기도 하면서 가장 좋아하는 플레이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사력을 다해 모든 것을 토해낼 생각이었다.

< 낭만필드 - 122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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