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118화 (93/356)

< 낭만필드 - 118 >

선수들의 성장 유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데뷔 시즌부터 꾸준하게 조금씩 성장하는 경우가 첫 번째.

두 번째는 어느 시점까지는 아쉬운 수준이었는데 갑작스럽게 몇 단계를 건너뛰는 경우였다.

후자의 경우에는 또 몇 가지로 유형이 나뉘었다.

갑작스럽게 성장한 계기가 어떤 것인지를 기준으로 할 수 있었다.

한 가지 기준은 약점의 보완이었다.

도드라지는 약점이 있고, 계속해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고 하면 어느 수준까지는 그 약점을 극복하지 못한다.

최소한의 요구치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최소한의 기준을 넘어 약점이 더는 치명적이지 않은 수준에 도달하는 순간, 다른 능력치들의 수준에 따라서 한 번에 몇 단계를 뛰어넘게 되는 것이었다.

또 한 가지 기준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각성하는 것이었다.

각성이라는 것은 무협이나 판타지 소설 속 세계관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도 하루아침에 다른 선수가 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일반적인 루트로는 국가대표 소집이 있었다.

국가대표로 소집되어 훈련을 받거나 A매치에 데뷔한 이후 소속팀에 복귀한 선수가 갑자기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했다.

그리고 대표적인 루트를 하나 더 대자면 자신의 기량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면서 경기 자체를 씹어먹었을 때였다.

흔히 이야기하는 그분이 오신 날.

그 날의 경험이 있는 선수 중 몇몇은 그 경기를 기점으로 다른 선수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성배가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성배는 지난 포르투갈과의 유로 예선 경기에서 그 날을 경험했다.

콰레스마와 미구엘이 있었던 포르투갈의 오른쪽 선수들은 성배를 띄워주기 위한 들러리가 되었고, 성배는 측면을 넘어 경기 자체를 지배했다.

그 날 이후, 성배의 플레이는 한 단계 더 위력적으로 성장했다.

단순히 하루 계시를 받은 날을 경험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일부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핀란드전과 이번 시즌으로 이어졌고 출전한 모든 경기에서 달라진 위력을 선보였다.

원래부터 매력적인 카드였고, 그전에도 빅리그에서 주목하는 유망주 타이틀을 달고 있었지만, 포르투갈전 전후의 입지에는 분명 차이가 존재했다.

***

성장하기 전에도 에레디비지에 최고의 풀백 유망주이자 정상급 풀백으로 평가되었던 성배였다.

여기서 한 단계 더 성장한 지금, 성배를 막을 수 있는 선수는 별로 없었다.

프리킥 장착은 그런 성배의 위력을 한 단계 더 높여주었다.

11라운드까지 치르면서 리그에서만 4골 7어시스트의 무시무시한 스탯으로 경기당 1의 믿을 수 없는 공격 포인트를 기록한 성배는 국가대표팀에 합류해 유로 예선 마지막 경기를 준비했다.

“오늘도 좋은 활약을 기대하게 하는 주성배 선수의 모습이 보입니다. 최근 벨기에의 상승세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선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활약은 국가대표팀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A조 최강팀인 포르투갈과의 경기 일정을 일찌감치 끝낸 벨기에는 연달아 대륙에서 중위권, 혹은 하위권으로 꼽히는 팀들과 경기를 이어갔다.

핀란드전에서의 패배 이후 벨기에는 세르비아, 카자흐스탄, 핀란드, 아르메니아, 폴란드로 이어진 유로 예선 경기들에서 무패 행진을 달렸다.

“벨기에 국가대표팀의 분위기가 이렇게 좋은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섯 경기 연속 무패 행진이라니. 드디어 빛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벨기에 축구가 암흑기에 접어든 지도 몇 년이 지났다.

예전이었다면 승리를 확신했을 팀과의 경기에서도 이제 안심하지 못했다.

팬들은 거의 모든 경기를 마음 졸이며 응원했다.

그런데 그런 타이밍에 다섯 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달린 것이었다.

당연히 이 상승세의 중심에 있는 선수들이 인기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

“무사 뎀벨레 선수의 얼굴이 보이네요. 무패 행진을 이어가는 동안 세 골을 넣으면서 맹활약하고 있는 선수죠? 소속팀에서도 좋은 활약을 이어가고 있는데, 오늘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네요.”

첫 번째가 무사 뎀벨레.

성배와 같은 87년생의 그는 중앙 스트라이커에서 윙어로 포지션을 변경해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었다.

“케빈 미랄라스 선수도 대단합니다. 마찬가지로 세 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속팀에서도 이번 시즌부터 주전으로 올라섰고, A매치에 데뷔하자마자 4경기에 3골을 넣었습니다.”

성배가 오매불망 기다렸던 미랄라스도 드디어 국가대표팀에 합류했다.

성적은 4경기 출전에 3골.

아직 부족한 기량이지만 골 냄새를 잘 맡아서 허술했던 벨기에 공격진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벨기에 상승세의 일등 공신은 이 선수죠! 주성배 선수입니다. 이제는 굳이 말이 필요 없을 것 같네요.”

하지만 무패 행진 기간에 가장 많은 공격 포인트를 기록한 선수는 수비수인 성배였다.

다섯 경기에서 2골 4어시스트를 기록, 팀의 상승세를 이끌고 있었다.

모든 세트피스를 도맡아 처리한 덕분이었다.

“이제는 거의 붉은 악마의 에이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콤파니 선수와 반덴 보레 선수가 차기 에이스 자리를 놓고 다툴 때 처음으로 벨기에에 건너온 선수였는데, 이제는 두 선수를 제치고 벨기에의 미래가 되었어요.”

지난 시즌, 적응 문제로 부진했던 데다가 크고 작은 부상까지 겹치면서 콤파니가 잠깐 주춤한 틈을 타서 벨기에 최고의 유망주 자리를 차지한 성배였다.

반덴 보레는 이미 옛날에 따돌렸다.

그리고 에당 아자르나 데 브라위너, 베르마엘렌, 베르통헨 등은 아직 확실하게 자리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 틈에 성배는 반 바이텐과 함께 벨기에를 대표하는 선수로 인정받고 있었다.

“오늘 경기는 정말 중요합니다. 오늘 경기에서도 주성배 선수의 발이 좋은 그림들을 많이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네요.”

한때 5위까지 떨어졌던 벨기에의 순위는 5경기 4승 1무의 약진에 힘입어 3위까지 올라와 있었다.

1위 포르투갈이 7승 5무 1패, 승점 26점을 기록하고 있는 가운데 2위 폴란드도 8승 1무 4패, 승점 25점을 기록, 유로 본선 진출에 바짝 다가선 상황이었다.

“여전히 힘든 상황인 것은 맞습니다만, 드라마틱한 반전을 이끌어내며 여기까지 올라온 벨기에입니다. 아직 기회가 남았으니 포기하기에는 이릅니다.”

그리고 3위 벨기에는 7승 2무 4패로 승점 23점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 뒤로 세르비아와 핀란드가 각각 승점 22점을 기록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이미 예선 탈락이 확실시된 상황이었다.

유로 본선 대회 진출 티켓은 두 장.

그 주인은 폴란드와 포르투갈, 그리고 벨기에.

이 세 팀 중 두 팀이 될 것이었다.

“일단 벨기에는 경기에서 이겨놓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폴란드가 패배하기만을 빌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포르투갈이 패배해도 승점은 같아지지만, 그래도 벨기에는 포르투갈보다 아래로 밀릴 수밖에 없어요. 무조건 폴란드가 패배해야 해요.”

유로 예선의 순위 산정 방식은 1차가 승점, 2차가 승자승 원칙이었다.

현재 1위와 2위에 올라있는 포르투갈과 폴란드는 벨기에와의 상대 전적에서 모두 앞서있었다.

포르투갈은 1승 1무를 기록했고, 폴란드는 2무를 기록했지만, 원정 다득점 원칙에서 앞섰다.

폴란드가 무승부라도 거둔다면 벨기에가 100-0으로 승리하더라도 본선 진출은 실패였다.

“어쨌든 이겨놓고 봐야 합니다. 벨기에는 일단 이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다음은 하늘에 맡겨야겠죠.”

분명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가 워낙 좋았기에 기대도 되었다.

그리고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대하지 않는 팬들이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

“경기 끝났습니다. 우리 선수들, 마지막 경기에서 2-0으로 승리를 거두며 유종의 미를 장식했습니다. 비록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벨기에는 유로 예선 마지막 상대인 아제르바이잔과의 경기에서 시종일관 압도적인 경기 끝에 2-0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유로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30분 정도 먼저 열린 폴란드와 세르비아의 경기가 2-2로 끝났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벨기에는 승점 26점을 따내 2위 폴란드와 동률이 되었지만, 상대 전적에서 밀리면서 3위가 되고 말았다.

2위까지 주어지는 유로 본선 진출 티켓은 벨기에의 것이 아니었다.

“맞습니다. 비록 8년 만의 본선 복귀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암흑기를 끊어낼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었어요. 그것만으로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네요.”

최근 몇 년은 벨기에 축구팬들에게 괴로운 시간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확연히 앞선다고 생각했던 팀들이 벨기에를 추월했다.

최소한 30위 근처에서 놀았던 FIFA 랭킹도 어느새 50위 권 바깥까지 밀려나 있었다.

그런 좌절 속에서 유로 예선 마지막 여섯 경기를 무패로, 5승 1무로 마무리한 벨기에 대표팀의 선전은 최소한 그들에게 희망을 보여주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었다.

“예선 막판부터 실질적인 에이스로 활약해준 주성배 선수 이외에도 여전히 벨기에 최고의 유망주인 콤파니, 막판에 혜성처럼 등장한 미랄라스, 그리고 베르마엘렌, 베르통헨, 데푸르, 펠라이니, 뎀벨레 등 수많은 유망주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어요.”

그리고 이 대회에서 벨기에는 희망과 함께 미래를 보았다.

80년대 후반에 태어난,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한 어린 선수들이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당장은 유로 예선에서 탈락했지만, 이들이 전성기를 맞이할 수년 뒤,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보였다.

“비록 이번에는 본선 진출에 실패했지만, 축구계는 멈추지 않습니다. 당장 내년 말부터 2010년 월드컵 예선이 진행될 겁니다.”

비록 유로 2008 본선 진출은 실패했지만, 시간은 흐를 것이었고, 다음 대회 또한 찾아올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보여준 어린 선수들의 가능성은 2년 뒤를 기대해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지금 주저앉아 눈물을 보이는 선수들에게 제 말이 닿았으면 좋겠습니다.”

벨기에의 일부 어린 선수들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캐스터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의 축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슬퍼하지 말고 다음을 준비하세요. 다음 대회에서는 여러분의 성장한 모습을 중계하고 싶습니다.”

벨기에는 이제 시작이었다.

성공적인 세대교체가 눈앞에 다가왔고, 이제는 그 과실을 따서 맛있게 먹을 일만 남아있었다.

“여러분, 대회는 끝났지만, 벨기에의 축구는 이제 다시 스타트 라인에 섰습니다. 그럼 저는 더욱 성장한 선수들과 함께 내년에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7년, 벨기에의 A매치 일정도 끝이 났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 유로 예선은 끝났지만, 축구는 계속될 것이었다.

‘그래도 기분이 좋지는 않네.’

냉정하고 계산적인 모습을 보이는 성배였지만, 전생을 보면 알 수 있듯 그 본질은 굉장히 여린 성격이었다.

완전히 남도 아니고 국가대표팀 동료, 게다가 프랑스계와 네덜란드계 양쪽에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이유가 있었지만, 어쨌든 친분이 쌓인 동년배 선수들의 눈물이 좋을 리 없었다.

‘조금만 더 참아라. 우린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테니까.’

정말 오랜만에 감성적이 되었다.

잠깐이지만 목이 메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 낭만필드 - 118 > 끝

ⓒ 미에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