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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117화 (92/356)

< 낭만필드 - 117 >

챔피언스리그에서 탈락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약스는 아약스였다.

프라하와의 챔피언스리그 3차 예선 2차전 이후에도 아약스의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6라운드까지 5승 1무를 기록하며 승점 16점을 획득해 리그 선두를 차지한 것이었다.

6경기 24득점으로 폭발적인 득점력을 과시했고, 실점은 6골에 불과했다.

하지만 좋은 성적과는 별개로 경기력 자체에는 그다지 좋은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팬들마저도 이대로라면 결국 바닥이 보일 거라 예상하는 중이었다.

훈텔라르, 수아레즈, 성배, 베르마엘렌, 헤이팅아 등이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이면서 개인 기량으로 상대를 찍어누르는 형태의 경기를 펼치는 아약스였다.

워낙 선수들의 컨디션이 좋아서 한동안은 이 기세를 유지하겠지만, 컨디션이라는 건 원래 오르락내리락할 수밖에 없었다.

선수들 간의 사이클이 어긋나기 시작하는 순간, 아약스의 상승세 역시 어긋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아약스의 상승세가 어긋나는 순간은 생각보다 빨랐다.

***

[헹크 텐 케이테 감독, 첼시와 사전 접촉!]

[시즌 중 첼시 수석코치 직을 놓고 협상 중인 케이테.]

[무섭게 들고 일어난 아약스 팬들. 감독 경질 요구!]

[아약스, 이대로 괜찮은가. 팬들의 비난 목소리 커져.]

언젠가 예정되어 있다고들 했지만,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던 아약스의 추락을 앞당긴 사람은 다름 아닌 아약스의 감독, 헹크 텐 케이테였다.

시즌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상하게 의욕 없는 태도로 선수들의 의구심을 샀었는데, 그 이유가 드러난 것이었다.

‘이런 미친!’

어지간해서는 감정의 변화 폭이 심하지 않은 성배도 그 소식을 처음 듣고는 바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만큼 아약스 선수단과 팬들의 충격은 엄청났다.

지난 시즌, 시즌 중부터 계속해서 케이테 감독의 경질설이 나돌았고, 시즌을 마친 이후에도 나돌았지만, 1년 차니 한 번만 더 믿고 가려 했던 이들의 뒤통수를 제대로 후려갈긴 꼴이었다.

‘이상하다 했어. 자기 커리어에 굉장히 중요한 시즌인데도 열의가 없어 보이더니만. 어쩐지...’

성배는 이제야 케이테 감독의 태도가 이상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여전히 아약스는 공격 전술과 수비 전술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경기에 나섰다.

팀을 이끌고 전략과 전술을 수립해야 할 감독이 이 모양이었으니 감독이 데려온 자기 코치들 역시 팀에 매진할 리 없었다.

‘이건 완전히 망한 느낌인데. 이번 시즌은 거의 희망이 없어.’

이미 늦었다.

감독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팀이 제대로 굴러갈 리 없었다.

지금부터 조치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늦었다.

전체 시즌의 20퍼센트 정도가 흘렀고, 팀은 기본적인 전술도 완성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시즌 중반에 전술을 시험하는 촌극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라면... 답이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없었다.

좋은 기회를 잡은 시즌이었지만, 더이상 선택을 늦출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모든 게 완벽히 준비된 상태로만 일을 시작할 수는 없으니까.’

생각을 마친 성배는 휴대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아약스 선수들, 몸이 무거워 보입니다. 지난 경기까지 보여주었던 가벼운 몸놀림이 아닙니다.”

케이테 감독이 첼시와 물밑 접촉을 하고 있었다는 소식은 아약스의 경기력에도 영향을 주었다.

소식이 터진 이후 바로 다음 경기인 스파르타 로테르담과의 원정 경기에서 아약스는 무거운 모습을 보이며 끌려가고 있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죠. 팀의 수장인 감독이 팀을 버리고 혼자 떠날 준비를 그것도 몰래 해왔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아무 영향도 없을 수는 없어요.”

해설자의 목소리에서는 못마땅한 감정이 여과 없이 흘렀다.

당연한 일이었다.

현장에서는 떠나있지만, 해설자도 엄연한 축구인이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 이럴 때일수록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지!”

헤이팅아가 목이 터지라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선수들에게는 닿지 않았다.

최후방에서 아무리 소리쳐봐야 전방의 선수들에게는 들리지도 않았다.

관중들의 목소리에 묻혀 바로 옆에 있는 선수에게도 말이 잘 전해지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선수단 전체에 목소리가 닿을 리 없었다.

“욘. 진정해. 어쩔 수 없어. 오늘 같은 날에는.”

성배가 헤이팅아를 진정시켰다.

“그렇다고 계속 이런 경기를 할 수는 없잖아.”

헤이팅아도 답답할 것이었다.

팀의 주장이자 아약스를 사랑하는 아약스 유스 출신 선수로서 이런 모습을 두고 볼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지금은 그렇게 악을 써댈 힘이라도 아껴서 네 플레이를 열심히 해. 그게 차라리 더 도움이 될 테니까.”

선수단 전체가 자신의 말을 듣게 하려는 목적으로 소리 지르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했다.

어차피 들리지도 않을 테고, 들려도 큰 변화를 만들 수 없는 일에 힘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플레이에 집중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었다.

“빌어먹을...”

헤이팅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경기 중에 대화를 나누는 두 선수를 흘끔 쳐다보고 있던 베르마엘렌과 베르통헨도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냉정해져. 한동안은 계속 이럴 것 같으니까.”

팀이 흔들려도 자신은 흔들릴 수 없었다.

고작 이따위 일로, 자신과는 상관도 없는 이따위 일로 자신의 몸값을 깎아 먹을 수는 없었다.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아직 시작도 하지 못했다.

빅리그 입성이 눈앞에 있는데 여기서 주춤할 수는 없었다.

“볼이 가브리에게 이어집니다! 아, 스파르타의 무서운 압박에 고전합니다!”

평소였다면 가브리 정도의 선수가 이 정도 압박에 꼼짝 못할 리 없었다.

하지만 팀의 퍼포먼스가 전체적으로 하락한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볼을 지켜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내놔!’

성배는 왼쪽 측면을 타고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점점 공격에 자신감이 생기는 중이었다.

비어있는 공간을 기가 막히게 파악해서 한발 빨리 움직이는 스타일이 성배가 원래 보여주었던 오버래핑이었지만, 점점 개인 기량에 의지하는 오버래핑에도 자신감이 붙고 있었다.

“가브리, 왼쪽 측면으로 벌려줍니다! 주! 볼을 받아서 돌파로 이어갑니다!”

이번 시즌 아약스에서 눈에 띄는 선수를 꼽으라면 훈텔라르와 수아레즈, 그리고 성배였다.

수비수의 본분인 수비는 물론이고 측면 공격과 세트피스 등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한 모습을 보이며 이견의 여지가 없는 팀의 핵심이 된 것이었다.

“아무도 막아서지 못합니다! 데 루버, 따라가는 것이 고작입니다!”

스파르타의 라이트백, 데 루버가 성배를 막기 위해 달려왔지만, 나가떨어지지 않고 따라붙는 것 이상은 그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수비가 철저하네.’

이제 데 루버 정도는 옆에 붙어도 성배를 긴장하게 만들 수 없었다.

볼을 빼앗기지 않을 정도의 관심만 주면서 성배는 천천히 동료들을 살폈다.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훈텔라르와 수아레즈는 상대 수비의 밀착 마크에 고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성배의 크로스는 정확도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정확성은 기본이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적절한 변화를 줄 수 있기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었다.

“페인트! 데 루버, 벗겨집니다!”

왼발을 빠르게 움직여 크로스를 올릴 것처럼 데 루버를 속인 뒤, 인사이드를 이용해 반대편으로 볼을 옮겼다.

데 루버가 완전히 떨어져 나가면서 자유롭게 된 성배의 패스는 당연히 치명적이었다.

“바깥에서 대기하던 데 용에게! 달려들면서 그대로 슈팅!!”

훈텔라르와 수아레즈가 묶인 상황.

반대로 이야기하면 두 선수에게 수비가 몰렸다는 뜻이었다.

두 선수를 묶어두기 위해서는 원래 배정된 선수보다 많은 선수가 두 선수를 마크해야 했고, 누군가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성배는 충분히 그런 상황을 파악할 눈과 경험이 있었다.

“골! 골입니다! 시엠 데 용! 시즌 첫 골을 터뜨립니다! 멋진 중거리 슈팅!”

전체적으로 아약스 선수들의 퍼포먼스가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방해가 없는 상황에서까지 고전할 정도는 아니었다.

전혀 방해를 받지 않는 상황에서 좋은 위치에 좋은 패스까지 더해지자 데 용의 오른발은 불을 뿜었다.

빨랫줄처럼 날아간 데 용의 중거리 슈팅은 그대로 스파르타의 골망을 찢어버렸다.

“2-2! 동점을 만드는 아약스입니다! 며칠 전 그런 일이 있어서 고전할 것이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고전은 면치 못했지만, 그래도 쉽게 패배하지 않습니다!”

“이걸로 주성배 선수의 이번 시즌 어시스트가 6개로 늘어났죠? 엄청난 기세네요. 9경기 4골 6어시스트. 이거 공격수인가요?”

3골 3어시스트를 기록한 개막전을 제외하면 8경기 1골 3어시스트였다.

한 경기에 몰아치기는 했지만,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포지션을 감안하면 굉장한 페이스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약스의 에이스라고 불러야겠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주의 왼발이 터지고 있는데, 역시 오늘도 터졌습니다.”

“조금 전에는 오른발 패스였죠?”

오른발이든 왼발이든 상관없었다.

성배가 노린 그대로, 의도한 그대로 시즌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정도면 버크만이랑 했던 내기에서도 이길 수 있겠지.’

몸값이 떨어질 거라 예상했던 버크만의 생각과는 다르게 성배의 몸값은 상승세가 꺾였을 뿐, 느리게라도 올라가는 중이었다.

일반적인 시장 경제 원칙과는 다르게 몸값이 올라갈수록 관심을 보이는 팀들도 많아지고 있었다.

***

성배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전반적으로 경기력이 떨어진 아약스를 혼자 끌어올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기량이 아직 그 정도까지 올라가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포지션 자체가 그런 역할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진 8라운드.

16위로 처져있는 NEC 네이메헨과의 홈경기에서까지 0-0 무승부에 그쳤고, 결국, 아약스는 결론을 낼 수밖에 없었다.

[아약스, 케이테 감독 경질! 후임 감독은 미정.]

[첼시 수석코치로 이동한 케이테. 아약스는?]

[후임 감독 고민에 빠진 아약스. 난항 예상.]

아약스는 케이테 감독을 해임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마음이 아약스를 떠나 첼시 수석코치로 옮겨간 케이테 감독을 계속 붙잡아두는 것은 양쪽에 다 손해일 뿐이었다.

케이테 감독을 경질하기는 했지만, 대비할 시간도 없이 갑작스럽게 터진 일이었기에 전혀 준비되어있지 않았다.

후임 감독을 선정하기는 해야 하는데, 시장에 나와 있는 감독이 많지 않았다.

시즌 초반이었고, 어지간한 감독들은 전부 소속이 있었다.

소속이 없는 감독들은 자의에 의해 휴식을 취하고 있거나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한 단계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감독들뿐이었다.

[아약스, 외부 인사 영입 없다. 내부 승격 예상.]

[아약스 U-19 감독 아드리에 코스터, 임시 감독 승격.]

[‘임시 감독 체제’ 선언한 아약스, 이번 시즌은 이대로 갈 것.]

아약스도 마땅히 방법은 없었다.

결국, U-19 감독이었던 코스터를 내부 승격을 통해 임시 감독으로 올렸다.

정식으로 감독 계약을 맺은 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임시직이었다.

이번 시즌은 코스터 임시 감독 체제로 마치고 다음 시즌을 앞두고 새로운 감독을 선임하겠다는 것이 아약스의 뜻이었다.

‘뭐. 최선은 아니지만 차악 정도는 되겠네.’

대충 아무나 걸리는 사람을 감독으로 선임하는 것은 최악의 수였다.

임시 감독 체제는 차악 정도는 된다고 봐야 했다.

‘이미 최선도, 차선도 없어. 이 정도면 선방이야.’

케이테 감독이 시즌 초반부터 사고를 쳐버린 순간, 아약스에게 최선의 수는 없었다.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면 납득할 수 있었다.

“아, 먼저 나와계셨군요. 제가 좀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빨리 온 거죠.”

그리고 성배는 케이테 감독의 일이 알려진 그 날,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았던 버크만을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신문을 통해 임시 감독 체제를 선언했다는 아약스의 기사를 보는 사이 버크만이 도착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버크만이 위로를 건넸다.

“뭐, 쉽지는 않지만, 저와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아니, 없게 할 생각입니다.”

성배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을 받았다.

자신의 앞에서 무슨 뜻이냐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짓는 버크만을 향해 말을 이었다.

“이번 겨울, 이적하려고 합니다. 준비해주세요.”

< 낭만필드 - 117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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