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16 >
-삐-익!
‘또?’
성배가 두 번째 프리킥을 성공시키고 9분 뒤, 다시 한 번 주심의 휘슬이 울렸다.
이번에도 직접 슈팅이 가능한 위치에서의 프리킥이었다.
‘완전히 맛이 갔네. 발이 따라가질 못해.’
무려 5-0이었다.
그리고 후반전 시작 후 15분 만에 세 골을 허용한 것이었다.
정신이 멀쩡할 리 없었다.
“유후! 해트트릭하고 와. 거의 10년 만에 다시 나오는 기록인데 욕심 한 번 내야지.”
“힘내! 한 건 해보자고!”
프리킥을 처리하기 위해 올라가는 성배의 등 뒤에서 동료 수비수들의 응원 소리가 들려왔다.
축 처진 아약스의 분위기를 끌어올리기에 이런 기록만큼 좋은 것도 없었다.
“내가 제일 욕심 나니까 굳이 부담 주지 말라고.”
사실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었다.
성배도 이름을 날리고 싶은 욕심이 있었고, 빅리그 입성을 노리고 있는 선수였다.
이런 좋은 기회를 잡고 싶은 것이 당연했다.
‘너무 욕심내지 말고, 긴장하지 말고.’
프리킥 위치까지 걸어가는 동안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천천히 움직이면서 걷는 속도에 맞춰 느리게 호흡했고, 느린 호흡 속에서 긴장감에 가빠졌던 숨도 안정되었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그냥 평소처럼 해.”
상황이 상황이었기 때문에 동료 선수들 모두 성배를 안정시키기 위해 애를 써주었다.
“긴장? 그런 거 안 해. 오늘 경기에서 긴장할 게 뭐 있다고.”
프리킥 위치에 도착했을 때, 어느새 날뛰던 가슴은 진정되어 있었다.
가빠졌던 숨도 평상시대로 돌아왔다.
느려진 호흡에 맞춰 가라앉은 감정도 어느새 평정을 되찾았다.
“그럼 다행이고.”
안심했다는 듯 미소를 보인 수아레즈가 성배의 어깨를 툭 쳐주고 안으로 움직였다.
평소였다면 성배의 옆에서 상대 수비수들에게 혼선을 주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프리킥으로만 두 골을 넣고 있는 선수가 있었다.
상대 수비수들도 이번에는 성배의 차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설프게 혼란을 유도하는 것보다 세컨 볼에 대비하는 것이 훨씬 좋은 선택이었다.
‘두 번 다 먼 쪽 포스트로 감아서 때렸는데, 또 그렇게 때려도 되려나.’
가장 자신 있는 킥이었지만, 벌써 두 번이나 보여준 킥이었다.
상대 골키퍼도 분명히 대비하고 있을 텐데, 여기서 또 한 번 같은 킥을 시도하면 막힐 확률도 적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아직 미숙한 무회전 프리킥을 때릴 수도 없고, 강하게 때리기도 뭐하고. 낮게 깔아차는 것도 무리고.’
성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성배의 머릿속이 어떻든 상대 선수들은 벽을 완성했고, 아약스 선수들 역시 준비를 마쳤다.
-삐-익!
‘인프런트로 감아찬 킥은...’
주심의 휘슬이 울렸다.
성배도 생각을 마치고 도움닫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왼발을 힘차게 휘둘렀다.
‘정확하게만 날아가면 아무도 못 막아!’
인프런트 킥이 정석이 된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정확하게 구석을 노리면 알고 있어도 못 막는 프리킥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심혈을 기울여 킥을 처리한 성배는 바로 고개를 들어 골대를 바라보았다.
‘궤적은 좋아!’
그리고 일단 시작 궤도는 완벽했다.
머릿속에 그려놓았던 그 궤적을 볼이 정확하게 따라가고 있었다.
-탱!
‘밑으로!’
왼쪽 상단을 지나치게 노려서 그런 것인지 모서리도 모자라 꼭짓점을 향해 날아간 볼이었다.
하지만 크로스바를 맞추고 말았다.
‘밑으로 떨어져!’
크로스바 아랫부분에 맞고 떨어져서 골라인을 넘어가라는 아약스 측의 기도였고,
‘바깥으로 튀어 나가!’
그대로 크로스바에 맞고 튕겨 나가기를 바라는 데 그라프샤프 측의 기도였다.
-삐--익! 삑!
[......]
길게 울린 주심의 휘슬 소리.
그리고 경기장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이 미친 자식! 그냥 응원차 해본 말이었는데, 진짜로 넣냐!”
“기세 제대로 탔구나! 국가대표팀 한 번 갔다가 오더니 뭘 해도 다 돼!”
성배의 프리킥은 크로스바 아랫부분을 강하게 때리고 그대로 떨어졌다.
떨어진 위치는 골라인 안쪽이었다.
‘프리킥 해트트릭...’
해트트릭. 한 경기 세 골.
프리킥 해트트릭도 대단한 기록이지만, 성배는 해트트릭을 구경한 적조차 없었다.
참고로 이야기하자면 전생과 현생을 포함해서 성배의 한 시즌 최다 골 기록이 세 골이었다.
풀타임 데뷔 시즌이었던 2005/06시즌과 2006/07시즌, 성배의 득점 기록은 세 골.
전생에서도 두 번 정도 세 골을 넣었던 적이 있었다.
윙어로 뛰었던 시절에.
‘개인 최다 골 기록을 한 경기에 완성해버렸네.’
즉, 해트트릭은 한 시즌 동안 넣어야 하는 골을 하루에 다 넣어야 하는 기록이었다.
당연히 처음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프리킥 해트트릭이라니...’
그냥 해트트릭만 해도 적응이 안 되는 엄청난 기록인데, 프리킥 해트트릭이었다.
오른발로 한 골, 왼발로 두 골.
1998년 라치오 유니폼을 입고 미하일로비치가 기록한 이래 세계 축구 역사상 두 번째로 나온 대기록이었다.
그 주인공이 성배였다.
‘몸값 올라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 이적시장에서 이적하지 않았던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이런 기록을 세울 거라고는 프리킥 훈련에 매진했던 성배 자신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세계 축구계에 자신의 이름 석자를 떡하니 새겨버린 것이었다.
버크만에게 어떤 시계를 받아야 할지 벌써부터 고민이었다.
‘내 이름이 역사에 남았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성배라고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서조차 냉정할 수는 없었다.
세 번째 프리킥이 골라인을 통과한 순간, 성배의 머릿속에서 그동안 겪었던 고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
“코너킥 올라옵니다! 훈텔라르! 헤더!!”
정규시간 시계가 멈춘 추가시간, 아약스가 코너킥을 얻어냈다.
키커는 언제나처럼 성배였다.
정확하게 올라온 성배의 코너킥에 훈텔라르가 머리를 가져다 댔다.
“골! 골입니다!! 훈텔라르, 해트트릭을 완성한지 채 1분도 되지 않아서 네 번째 골을 터뜨립니다! 오늘 경기 네 번째 골!!”
프리킥 해트트릭을 기록한 성배가 일찌감치 오늘의 주인공 자리를 예약했지만, 훈텔라르도 만만치 않았다.
후반전 45분까지 두 골을 기록하고 있었던 훈텔라르는 마지막 2분의 시간 동안 대폭발, 2분 동안 두 골을 넣으며 네 번째 골을 득점했다.
아약스의 여덟 번째 골.
8-0이라는 무시무시한 스코어를 완성한 골이었다.
“이걸로 주의 세 번째 어시스트가 기록됩니다! 장기인 롱패스와 크로스로 수아레즈, 훈텔라르의 골을 어시스트했던 주는 코너킥으로 세 번째 어시스트까지 기록합니다!”
그래도 주인공은 성배일 수밖에 없었다.
오프사이드 라인을 무너뜨리고 수아레즈의 득점을 만들어낸 첫 번째 어시스트.
낮고 빠른 크로스로 훈텔라르의 골을 도운 두 번째 어시스트.
그리고 코너킥 상황에서의 세 번째 어시스트까지.
프리킥 해트트릭을 완성한 이후 본업으로 돌아온 성배는 두 개의 어시스트까지 마저 추가하며 3골 3어시스트의 믿을 수 없는 활약을 선보인 것이었다.
“프리킥 해트트릭과 어시스트 해트트릭, 그리고 골과 어시스트의 동시 해트트릭까지. 정말 흔히 볼 수 없는 기록들을 한 번에 쏟아내고 있어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맹활약이네요.”
이제 막 승격한, 아약스와는 전력의 차이가 큰 데 그라프샤프와의 경기라고 해서 이 기록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성배의 어마어마한 기록은 이미 실시간으로 기사화되어 전 세계에 퍼지고 있었다.
***
리그 개막전에서 8-0이라는 기록적인 스코어로 승리한 아약스는 체코로 날아가 챔피언스리그 3차 예선 2차전을 치렀다.
1차전 패배로 완전히 꺾여버린 기세를 다시 살려낸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약스의 본선 진출을 의심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아, 아약스! 이대로 가다가는 이번 시즌 챔피언스리그 무대에서 짐을 싸야 하는 상황입니다! 한시가 급합니다!”
하지만 팬들의 기대와는 달리 아약스는 2차전에서도 슬라비아 프라하를 압도하지 못했다.
전반적으로 경기를 주도하기는 했지만, 마무리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슬라비아 프라하의 역습에 실점하면서 후반 막판까지 1-1 스코어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대로 경기가 끝난다면 1차전에 패배한 아약스는 탈락이었다.
“아약스! 아약스는 네덜란드 축구의 자존심이에요! 여기서 이렇게 무너지면 안 되는 클럽인데요. 조금 더 힘을 내줘야죠!”
하지만 중계진들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전개하던 가브리의 패스는 수아레즈에게 닿지 못했다.
후반전 35분을 넘어가면서 꽁꽁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는 슬라비아 프라하의 수비를 뚫기에는 아약스 선수들 사이의 호흡이 부족했다.
‘역시. 전술적으로 전혀 유기적이지가 못해.’
경기를 시작할 때부터 일찌감치 승기를 잡지 못하면 탈락 가능성이 클 것이라 예상했던 성배였다.
그도 그럴 것이 1차전 승리로 인해 수비적으로 나올 프라하의 수비를 뚫기에는 아약스의 팀워크가 부족했다.
전술 훈련을 소홀히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개인 기량이 아무리 앞서도 저런 수비 앞에서는 호흡이 필수적인 것을.’
성배는 탈락을 직감했다.
지금의 아약스로는 저 수비벽을 뚫기가 쉽지 않아보였다.
수비수들조차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하고 있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골을 넣기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프라하의 수비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이럴 때 믿을 거라고는 천재들의 번뜩이는 플레이 밖에 없는데.’
성배의 시선이 수아레즈에게로 향했다.
현재 팀 내 에이스는 물론 훈텔라르였다.
하지만 훈텔라르는 번뜩이는 플레이를 보여준다기보다는 정교하고 기술적인 마무리 능력을 통한 득점력에 장점이 있는 선수였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상상을 뛰어넘는 플레이로 팀을 구해내는 역할은 수아레즈에게 더 어울렸다.
“마렉 수지! 프라하의 마렉 수지가 수아레즈의 돌파를 저지합니다!”
하지만 수아레즈의 돌파는 훗날 체코의 핵심 수비수로 성장할 마렉 수지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그래. 루이스도 아직 스무 살의 어린 선수일 뿐이니까.’
스무 살의 어린 선수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자신도 고작 스무 살이면서 성배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의 수아레즈도 굉장한 재능과 번뜩이는 플레이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팀을 살려내는 역할을 맡으려면 더욱 성장할 필요가 있었다.
“엠마누엘슨, 볼 빼앗깁니다! 프라하, 역습 찬스! 프라하가 역공에 나섭니다!”
그 순간, 급한 마음에 무리해서 돌파를 시도하던 엠마누엘슨이 볼을 빼앗기고 말았다.
라인을 극단적으로 내리고 수비하던 프라하 선수들은 순간적으로 뛰쳐나갔고, 순식간에 상황이 뒤바뀌었다.
“아약스의 위기! 무조건 막아내야 합니다! 지금 실점하면 정말 미래가 없습니다!”
1-1 상황에서는 경기가 끝나기 전에 한 골만 더 넣으면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골을 더 허용하면 남은 5분 정도의 시간 동안 두 골을 넣어야 했다.
지금 실점하게 된다면 무조건 탈락이었다.
“타바레스, 중앙으로 크로스! 비첵, 몸을 날립니다! 다이빙 헤더!!”
하지만 프라하와는 반대로 극단적으로 라인을 끌어올렸던 아약스 수비진은 타바레스의 돌파를 막아세우지 못했다.
낮고 빠른 타바레스의 크로스는 중앙에서 빠르게 쇄도하는 비첵에게로 향했고, 첫 골을 넣었던 비첵은 몸을 날리는 헤더로 아약스의 골문을 갈랐다.
“아... 이번 득점으로 프라하가 앞서나가기 시작합니다. 아약스, 굉장히 힘들어졌습니다.”
프라하의 스타니슬라브 비첵은 오늘 경기에서 두 골을 넣으며 아약스 격파의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아약스는 1, 2차전 합계 3-1, 2전 2패의 성적을 기록하며...
챔피언스리그 3차 예선에서 탈락했다.
< 낭만필드 - 11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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