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15 >
“오늘은 무조건 이겨야 해. 알고 있지?”
에레디비지에 개막전을 앞두고 헤이팅아를 중심으로 모인 아약스 선수단의 라커룸은 비장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2003/04시즌 이후 PSV에게 3년 연속 우승을 내주고 있었으니 리그 개막전을 앞두고 비장함이 감도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비장함 이상의 절박함까지 느껴지는 이 분위기는 조금 이상했다.
“겨우 한 경기 치렀는데 팬들 반응이 심상치 않아.”
리그 개막전이기는 하지만 이번 시즌 공식전으로 따지면 두 번째 경기였다.
공식 전 첫 경기였던 슬라비아 프라하와의 챔피언스리그 3차 예선 1차전.
아약스는 패배했다.
“프라하한테 진 게 충격적이기는 했지. 경기 내용도 형편없었으니까.”
성배가 무심히 던진 한마디에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몇몇 선수들은 성배를 향해 눈을 흘기기도 했다.
프라하전에서 움직임이 좋지 않았던 선수들이었다.
“그래. 맞아. 모두 당연히 우리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경기였고, 게다가 홈경기이기까지 했으니까.”
유럽 축구의 강호 중 하나이지만, 체코의 시노트 리가는 유럽 축구 변방 리그였다.
최강팀인 스파르타 프라하도 유럽 무대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데, 슬라비아 프라하에게, 그것도 홈에서 패배했다는 것은 아약스 팬들을 분노케 했다.
‘선수들이 정신 차린다고 뭔가 될 상황은 아닌데.’
경기가 코앞인데 아직도 감독이 라커룸에 도착하지 않았다.
원래 감독이라는 위치가 라커룸에 붙어있는 시간보다 다른 곳에서 준비하는 시간이 더 많다고 하더라도 이건 좀 심한 경우였다.
‘뭔가 있어.’
그래서 성배는 케이테 감독에게 무슨 일이 있다고, 그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확신했다.
“어쨌든, 데 그라프샤프는 이제 막 승격한 팀이야. 그런 팀에게 우리 아약스가 밀릴 수는 없지. 격의 차이를 보여주자고!”
“아자!!”
“가자고! 다 잊고 오늘부터 새로 시작하는 거야!”
헤이팅아의 선창에 맞춰 다른 선수들 역시 한 마디씩 내뱉었다.
‘오늘은 절대 질 수 없지.’
솔직히 데 그라프샤프에게 아약스가 승리하지 못할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었다.
분명 전술적으로 문제가 많았고, 준비가 덜 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데 그라프샤프 정도는 개인 기량과 개인 전술만으로도 탈탈 털어줄 선수들이 모여 이루어진 팀이 아약스였다.
‘아무래도 이번 시즌이 험난할 것 같으니... 개인 스텟을 좀 챙겨야겠지.’
솔직히 말해서 시즌을 치르기 전 상태만 봐도 이번 시즌이 어떨지 대략적인 견적을 낼 수 있었다.
지금 아약스는 리그 우승은 어떻게 비벼볼 수 있을지 몰라도 유럽 대항전은 무리였다.
리그도 솔직히 간당간당했다.
경쟁자들이 유럽대항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서 리그와 병행하느라 체력적인 부담을 느끼고 아약스가 광탈하면 비벼볼 수 있을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 스텟 챙긴다고 누가 뭐라 할까.’
그렇다면 개인 기록이라도 좀 챙겨야 했다.
‘물론 팀의 승리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다른 선수들과는 조금 다른 마음가짐을 가지고 그라운드로 나서는 성배였다.
***
예상대로 아약스는 데 그라프샤프를 거칠게 몰아붙였다.
데 그라프샤프의 홈구장에서 펼쳐지는 경기였지만, 거대한 전력의 차이 앞에서 무력해졌다.
아약스는 슬라비아 프라하에게 당한 굴욕적인 패배를 데 그라프샤프에게 화풀이하는 듯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삐-익!
전반 26분, 수아레즈가 골대 정면보다 살짝 오른쪽으로 벗어난 지점에서 프리킥을 얻어냈다.
경기 시작과 동시에 데 그라프샤프 수비진을 농락하더니 결국 한 건 해낸 것이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그리고 그것은 성배에게 기회가 주어졌다는 뜻이었다.
직접 슈팅이 가능한 거리에서의 프리킥.
게다가 왼발 각도였다.
‘아직은 왼발이 좀 더 편한 게 사실이니까.’
오른발도 왼발처럼 쓸 수 있었다.
진정한 의미의 양발잡이, 오른발잡이보다 오른발을 잘 쓰고 왼발잡이보다 왼발을 잘 썼다.
하지만 아무래도 왼발잡이로 시작했기 때문인지 본격적으로 연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직접 슈팅은 오른발보다 왼발이 아주 조금이지만 더 편했다.
“자신 있지? 없으면 말해. 내가 찰 테니까.”
프리킥을 처리하기 위해 다가온 성배에게 수아레즈가 말을 걸었다.
평소에는 장난기가 좀 있어도 대체적으로 얌전하고 내성적인 친구가 그라운드만 밟으면 성격이 변했다.
지금도 평소라면 상상할 수 없는 전투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훈련 때 많이 봤으면서.”
이제는 조금이나마 프리킥 슈팅에도 자신감이 붙었다.
“지난번 경기에서는 한 골도 못 넣었잖아. 전부 다 넘어갔었다고.”
슬라비아 프라하 전에서 두 번의 프리킥 기회를 잡았었다.
그때는 두 번 모두 크로스바를 넘기고 말았다.
“어떻게 기회를 잡을 때마다 다 넣어. 한 시즌 내내 50경기 이상을 뛰어도 열 골 넣으면 많이 넣는 건데.”
애초에 프리킥으로 직접 득점을 노리는 경우의 성공률 자체가 그리 높지 않았다.
“게다가 두 번 다 오른발이었다고.”
그리고 그 두 번의 기회 모두 오른발 각도였다는 것도 변명거리가 될 수 있었다.
왼발이었다면 최소한 유효 슈팅 정도는 만들어낼 수 있었을 거라 자신했다.
“뭐, 어쨌든 우리 키커는 너니까. 믿어볼 수밖에 없겠지.”
전투적이었던 눈빛이 어느새 평소의 순둥이로 돌아왔다.
그것을 보고 성배가 놀란 사이,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다시 전투적인 눈빛으로 페널티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괜히 괴짜라는 게 아니었어.’
향후 축구계의 어마어마한 악동으로 성장하는 수아레즈였다.
직접 같은 팀에서 활약하게 되면서 그 징후를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뭐, 그건 나랑 상관없고. 프리킥에만 집중하자.’
감았다가 다시 뜬 성배의 눈빛이 강렬했다.
방금 어이없어했던 수아레즈의 그것과 비슷한 수준의 변화였다.
‘제일 확률이 높고 자신 있는 걸로 가야겠지.’
제일 자신 있는 킥은 역시 먼 쪽 포스트 상단으로 감아서 때리는 슈팅이었다.
아주 완벽하게 그 각도가 나오는 위치였다.
골대에서 45도 정도의 각도를 그리는 이 위치는 성배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위치이기도 했다.
‘아약스의 프리 키커는 나야.’
데 그라프샤프의 벽도 완전히 자리를 잡았고, 아약스 선수들 역시 자리를 잡은 상황이었다.
주심의 휘슬만 남아 있었다.
그 사이, 성배는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자신이 찰 수 있는 최대한의 킥을 보여주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삐-익!
드디어 주심의 휘슬이 울렸다.
‘후-욱’
크게 한숨을 내쉰 성배는 볼을 향해 달려들었다.
-뻐-엉!
‘이건 제대로다!’
임팩트가 이루어진 순간, 성배는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이어지는 기분 좋은 떨림을 느꼈다.
최고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수준에서 손꼽히는 프리킥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아자!”
볼은 반 페셈 골키퍼의 손에 닿지 않고 시원하게 골망을 갈랐다.
그것을 지켜본 성배는 자신도 모르게 제자리에서 주먹을 꽉 쥐며 기합을 내뱉었다.
“좋았어! 멋진 킥이었어!”
훈텔라르와 수아레즈가 가장 먼저 달려왔다.
아약스의 이번 시즌 첫 번째 골의 주인공.
2005/06시즌 에레디비지에 득점왕 훈텔라르도, 비싼 이적료를 주고 영입한 수아레즈도 아니었다.
***
“주!”
가브리가 성배에게 볼을 돌려주었다.
데 그라프샤프 선수들은 수비적으로 경기를 운영하느라 볼을 따라오지 않았다.
전혀 압박이 없는 가운데, 성배가 고개를 들어 전방을 살폈다.
‘저 친구라면 분명 따라갈 수 있겠지.’
볼을 한 번 트래핑 할 때마다 공격의 성공 가능성은 확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다음 플레이를 결정했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받아라.’
가브리가 내준 볼은 성배의 오른발에 의해 쉬지도 못하고 다시 데 그라프샤프 진영으로 날아갔다.
‘너라면 받을 수 있을 거다.’
정확한 킥을 자랑하는 성배였지만, 이번 패스는 너무 길어 보였다.
라인을 한껏 내리고 있는 데 그라프샤프 수비진보다도 더 뒤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한 선수가 순식간에 볼을 따라잡았다.
‘그렇지! 그거야!’
그리고 다음 순간, 볼은 데 그라프샤프의 골대 안에서 구르고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눈으로 보고 있었음에도 믿을 수 없었다.
‘역시 루이스. 라인 브레이킹은 최고야.’
오프사이드 라인을 무너뜨리는 능력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아레즈였다.
성배의 패스가 길었던 것은 실수가 아니었다.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수아레즈가 가진 능력의 한계까지 몰아붙인 패스였던 것이었다.
예상대로 수아레즈는 볼을 따라붙었고, 논스톱 발리 슈팅으로 데 그라프샤프의 골문을 열었다.
“멋진 패스였어! 이런 패스는 정말 처음 받아보는데.”
“그 패스를 받는 선수도 처음 봤어. 라고 해야 되나?”
성배와 수아레즈, 두 선수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손뼉을 마주쳤다.
수아레즈의 아약스 데뷔 골, 성배의 이번 시즌 첫 어시스트였다.
전반전은 아약스가 2-0으로 앞선 채 마무리되었다.
전반전에만 두 골을 넣으며 확실히 전력의 격차를 보여준 아약스였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후반 10분, 수아레즈의 어시스트를 받은 훈텔라르가 오른발 슈팅으로 골망을 갈랐다.
후반 14분, 이번에도 수아레즈의 어시스트를 받은 훈텔라르가 머리로 골망을 갈랐다.
그리고 후반 15분.
“이야, 이거 미친 거 아냐? 벌써 두 골째라고.”
세리머니를 마치고 돌아오는 성배를 향해 베르마엘렌과 베르통헨이 손을 내밀었다.
-짜-악!
성배는 양손으로 두 선수와 동시에 하이파이브를 나누었다.
성배는 후반 15분, 이번에는 오른발 프리킥으로 득점에 성공하며 오늘 경기 두 번째 골을 넣었고, 커리어 최초의 멀티 골을 기록했다.
‘멀티 골은... 선수 인생에서 처음인 것 같은데...’
전생에서도 멀티 골을 넣었던 경험은 없었던 것 같았다.
별로 기억에 남는 경험이 없었던 인생이었기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없었던 일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내 인생 첫 멀티 골...’
최초라는 것, 첫 번째 경험이라는 것.
이런 수식어가 붙는 것들은 항상 의미가 깊을 수밖에 없었다.
생애 최초의 멀티 골을 기록하게 된 성배 역시 그 기분을 즐기고 있었다.
“이러다가 해트트릭까지 하는 거 아냐? 키야, 해트트릭을 경험한 수비수는 거의 없을 텐데. 이것도 기록이야, 기록.”
뒤늦게 다가온 헤이팅아가 호들갑을 떨었다.
수비수는 포지션의 특성상 해트트릭을 기록하기 힘들었다.
현대 축구에서 해트트릭을 경험한 수비수는 열 명, 아무리 많이 잡아도 스무 명을 넘지 않을 것이었다.
“내가 미하일로비치냐. 엄한 소리는 됐고, 집중이나 해. 한 골이라도 먹으면 쪽팔리니까.”
프리킥만으로 해트트릭을 기록한 어마어마한 이력의 주인공.
시니샤 미하일로비치.
축구 역사상 최고의 왼발 프리키커를 꼽으라면 무조건 들어가는 선수였다.
세계 축구사에 유일한 프리킥 해트트릭을 기록한 미하일로비치의 기록을 유이한 것으로 만들 기회였지만, 성배는 욕심을 내지 않았다.
“에이, 그래도 한 번 노려는 보지?”
성배보다 더 아쉬워하는 헤이팅아였다.
“그게 쉬워? 나도 하고야 싶지만, 기대는 안 해.”
하지만.
성배의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그 기회가 찾아왔다.
< 낭만필드 - 11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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