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10 >
‘그거, 무조건 때려라.’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저 슈팅이 진짜 슈팅이 아니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콰레스마의 발이 올라간 순간, 성배도 몸을 날렸다.
“콰레스마, 슈팅! 다리 맞고 굴절!”
완벽한 태클이었다.
콰레스마의 슈팅이 이루어지는 순간, 성배의 다리가 바로 그 앞을 가로막았다.
볼은 성배의 종아리에 맞으면서 굴절되었고, 베르마엘렌이 곧바로 멀리 걷어냈다.
“완벽한 태클이었어요! 이건 거의 한 골을 막아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멋진 수비죠!”
굉장히 위험했던 순간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5할 이상의 확률로 실점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성배의 태클이 이를 막아냈고, 벨기에의 사기를 크게 올릴 수 있었다.
“솔직히 이건 실점이라고 봤거든요? 그런데 이걸 막아내네요!”
“정말 대단한 태클이었습니다. 영상을 보시면 슈팅을 날리기 전에 콰레스마가 몇 번이나 페이크를 주는 것 같았는데, 맞습니까?”
화면에 나오는 다시보기 영상에서는 움찔거리면서 페이크를 시도하는 콰레스마의 모습이 잡혔다.
“예. 하지만 주성배 선수는 그 페이크에 전혀 속지 않다가 마지막 슈팅 순간에 정확히 몸을 날렸어요. 이건 진짜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죠.”
완벽한 기회.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최고의 순간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골을 넣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라는 건 그렇게 마냥 좋은 일은 아니었다.
만약 실패할 경우, 단번에 경기 분위기가 바뀔 수 있었다.
성배는 지금 혼자 힘으로 경기의 분위기를 바꿀 기회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 기회를 살려낼 수 있을까.’
성배가 그라운드를 돌아보았다.
분명, 이 경기의 분위기를 자신들 쪽으로 가져올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성배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
“데푸르, 왼쪽으로 크게 열어줍니다!”
벨기에의 중앙 미드필더, 데푸르가 왼쪽으로 크게 열어주었고, 성배는 왼쪽 측면을 타고 빠르게 올라갔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공격 기회를 잡고 빠르게 올라가는 성배였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자신의 결정적인 수비 이후 벨기에 쪽으로 바람이 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바람이 불었을 때, 그 기회를 잡지 못하면 오늘 경기에 희망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은 무리해서 공격적으로 움직였지만, 얻어낸 것이 없었다.
‘힘들어 죽겠다.’
포르투갈도 바뀐 분위기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라인을 살짝 내리면서 수비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포르투갈의 수비를 뚫을 수 있는 위력을 갖춘 선수가 벨기에에는 없었다.
“주, 다시 한 번 오버래핑을 시도합니다.”
그래서 성배가 더욱 더 많이 움직여야 했다.
공격에서도 마땅히 믿을 수 있는 선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오늘 벨기에는 측면 윙어를 활용하지 않았거든요? 주가 이렇게라도 활발히 움직여주지 않았다면 벨기에는 예전에 주도권을 내줬을 거예요.”
오늘 벨기에는 4-4-2 포메이션을 들고 나왔다.
미드필드를 두 명의 중앙 미드필더와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에게 맡긴, 중앙에 집중한 포메이션이었다.
호날두가 없어서 측면에 대한 부담감을 던 것인지, 아니면 어설프게 윙어를 출전시켜 애매하게 공격과 수비를 시키는 것보다 수비형 미드필더 두 명으로 측면을 막아내기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것은 측면 윙어가 없는 만큼 자신이 열심히 뛰어야 한다는 것 뿐이었다.
‘개인 전술은 좀 부담스러운데.’
측면을 파고들다 보면 자연스럽게 상대 수비수를 만날 수밖에 없었다.
평소였다면 수비수와의 맞대결은 최대한 피하고 같은 팀 윙어와의 호흡을 통해 돌파를 시도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팀에 윙어가 없었고, 혼자 힘으로 돌파해야 했다.
‘미구엘...’
성배의 앞을 가로막은 선수는 미구엘 브리또였다.
포르투갈과 발렌시아의 주전 라이트백.
성배 입장에서는 개인기량으로 뚫기 부담스러운 선수였다.
‘부담스러워도 어쩔 수 없어.’
마음을 굳게 먹었다.
수비수로서 미구엘에게 크게 밀린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선수 모두 본업은 수비수였고, 당연히 본업을 수행하고 있는 선수가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많지 않아.’
동료의 도움을 받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펠라이니가 도움을 주기 위해 주변에 있긴 했지만,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지는 않았다.
반면 포르투갈에서는 쁘띠가 미구엘을 돕기 위해 달려오는 중이었다.
‘피지컬이나 스피드로 뚫어내는 건 불가능해.’
그렇기에 더더욱 신중해졌다.
피지컬은 흑인인 미구엘에게 밀렸다.
스피드는 미묘하게 앞서는 것 같았지만, 큰 차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식의 돌파를 시도하기에는 자신의 드리블이 그렇게 능숙하지 못했다.
‘내 발이 원망스럽다.’
정확한 킥을 보여줄 수 있는 발이었다.
축구 선수로서 다른 어떤 부위보다 중요했고, 자신을 여기까지 올려준 부위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발의 감각이 민감하고 뛰어나지 못하다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렇다면 역시...’
하지만 지금은 속 편하게 원망이나 할 시간도 없었다.
어차피 자신에게 부족한 것은 많았다.
그리고 부족한 것 중에서도 쓸만한 것을 찾아내 어떻게든 해내는 것이 자신의 장기였다.
‘그렇게 위에 있지 말고 내려와라.’
같은 조건에서 상대하는 것이 힘들다면 조건을 같지 않게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좋아.’
성배의 선택은 페이크였다.
단순히 원래 의도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여준다고 다 페이크가 아니었다.
진짜로 그렇게 움직일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주는 것이 페인트였다.
단순히 말하면 거짓된 움직임을 진실이라고 믿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공만 한다면 개인 기량에서 우위에 있는 상대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바닥 인생의 발악도 쉽진 않지?’
그런 의미에서 페이크 하나만큼은 자신있었다.
거의 매번 만나는 상대들이 성배보다 위에 있었다.
그런 선수들을 상대로 버텨오는 동안 성배에게 큰 힘이 되어준 무기였다.
페이크는 두 가지 상황에서 위력적이었다.
개인 기량이 압도적으로 위에 있어서 상대가 먼저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경우, 그리고 경험이 많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아는 경우였다.
“왼쪽 측면으로 빠르게 돌파 시도!”
거짓된 움직임을 통해 미구엘의 중심을 중앙 쪽으로 흩트린 뒤, 빠르게 그 옆으로 볼을 차고 달렸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미구엘의 스피드와 피지컬은 세계 수준.
잠시 우위를 점했다고 절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제발 좀 떨어져라.’
먼저 유리한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몸싸움에 유리한 위치를 잡을 수 있었다.
오른팔을 먼저 앞으로 집어넣은 성배는 이어서 어깨까지 집어넣으며 미구엘의 상체를 뒤로 밀었다.
‘이래도 안 밀려?’
자신의 몸뚱어리는 항상 원망의 대상이었다.
정말 피를 토하는 노력을 했고, 덕분에 어느 정도는 괜찮아졌다고 생각한 것이 얼마 전이었다.
하지만 미구엘과 붙으면서 아직은 부족함을 절감했다.
‘그래도 이대로는 안 끝내.’
흔하게 겪었던 일이었다.
언제부터 자신이 상대를 피지컬로 압도했다고.
익숙한 상황이었다.
“치열한 어깨 싸움! 버텨내면서 크로스 시도!”
일단 미구엘 정도 되는 힘 좋은 선수와의 경합에서 여기까지 버텨냈다는 것만으로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은 받았다.
이제 진짜 자신의 장점을 보여줄 때였다.
‘그렇지!’
조금 무리이기는 했지만, 크로스를 하기 위해 발을 들어 올렸다.
당연히 미구엘이 발을 뻗어왔다.
크로스를 위한 길이 모두 막혔지만, 그래서 반가웠다.
“아! 페이크!”
페이크였지만, 자신이 원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으면 진짜 크로스를 올릴 생각이었다.
그 정도 각오의 페이크였으니 미구엘도 속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미구엘이 발이 뻗어진 순간, 성배는 크로스를 시도하기 위해 들어 올린 발을 조금 더 앞으로 뻗은 뒤, 볼을 뒤로 접었다.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볼을 뒤로 뺀 뒤, 왼발을 빼지 않고 오히려 더 깊숙이 내려놓았다.
이미 파악은 끝났다.
지금 접어서 뭔가를 시도하기에는 쁘띠가 거의 도착한 상황이라 힘든 부분이 있었다.
“으악!”
그렇다면 답은 프리킥밖에 없었다.
성배가 발을 내려놓은 위치는 절묘했다.
이미 발을 뻗은 미구엘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위치였다.
당연히 미구엘의 발이 성배의 왼발을 걷어찼고, 예상했던 성배는 걷어차인 힘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미리 발을 움직여 충격을 분산시키며 뛰어올랐다.
-삐-익!
‘다행이다.’
당연히 파울이 선언되었다.
솔직히 돌파 도중에 버거움을 느꼈던 성배는 닥친 상황 속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어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가벼운 페이크로 미구엘을 속이고 돌파해내는 모습이 나오는데, 대단하네요. 이런 모습을 자주 보여주지는 않았는데, 개인 돌파도 나쁘지 않네요.”
절대로 가벼운 페이크가 아니었다.
경험 많고 기량도 뛰어난 미구엘을 속이기 위한 페이크였다.
절대 가벼울 리 없었다.
발은 물론이고 다리, 엉덩이, 골반에 가슴, 심지어는 어깨와 머리, 시선까지.
신체 모든 부분의 움직임을 계산한 멋진 페이크였다.
“어쨌든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을 얻어낸 벨기에입니다. 드디어 좋은 기회를 맞이합니다.”
코너킥보다 조금 더 안쪽, 그리고 조금 더 앞쪽에서 얻어낸 프리킥.
굉장히 좋은 기회였다.
벨기에의 공격이 포르투갈의 수비를 전혀 흔들지 못했음을 감안하면 오늘 경기 중 찾아온 최고의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잘할 수 있지?”
볼을 내려놓고 뒤로 물러나는 성배에게 데푸르가 다가와 물었다.
벨기에의 코너킥과 프리킥은 거의 성배가 도맡아서 해결했다.
직접 슈팅을 할 때는 데푸르와 나누어서 해결했지만, 크로스가 올라가야 하는 지금은 당연히 성배의 차례였다.
“당연하지. 이 정도는 껌이야. 너는 세컨 볼이나 준비해.”
가볍게 대답한 성배의 시선이 박스 안에 고정되었다.
드디어 잡은 기회였다.
그리고 이런 세트피스 상황이 아니면 득점 기회를 잡기 힘들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살려야 했다.
‘제공권은 나쁘지 않아.’
190cm대 중반의 펠라이니를 시작으로 190cm에 가까운 베르통헨, 신장이 작아도 제공권은 뛰어난 베르마엘렌까지.
벨기에의 제공권 담당은 소수 정예로 이루어져 있었다.
반면 포르투갈의 제공권은 190cm의 메이라를 제외하면 위협적이지 못했다.
‘무조건 살린다.’
공격 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세트피스 기회 역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 몇 번 없을 세트피스 기회가 벨기에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주가 세트피스를 준비합니다. 제공권이 좋은 선수들은 모두 페널티박스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전력에서 밀리기 때문에 벨기에는 이런 세트피스 기회를 잘 살려야죠. 주성배 선수의 프리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요.”
원정 경기에서 벨기에에 0-4 패배를 안겨주었던 포르투갈이었다.
적어도 이번 홈 경기에서는 승패를 떠나 팬들이 만족할 수 있는 경기를 펼쳐주어야 했다.
현실적인 한계는 분명 있었다.
‘경기 내용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면... 최소한 스코어에서는 따라가야지.’
성배도 이 프리킥의 중요성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단 한 개의 킥도 허투루 처리할 생각이 없었다.
-삐-익!
주심이 경기 재개 휘슬을 불었다.
성배는 볼을 향해 출발했다.
< 낭만필드 - 11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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