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09 >
“으아아! 이 자식! 이 자식 때문에 우리 챔스 진출권 못 땄어!!”
“어디서 거짓말을. 나 때문은 아니지.”
뎀벨레가 달려들었다. 성배는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그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시즌은 끝났지만, 아직 성배는 한국에 들어가지 못했다.
경기가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얀! 대표팀 첫 합류 축하해! 키야, 후반기에 만나보니까 확실히 잘하더라. 아약스가 괴물인 거지, 얀이 못해서 못 나온 게 아니라니까?”
성배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뎀벨레는 자리를 옮겼다.
처음으로 국가대표팀에 선발된 베르통헨의 옆이었다.
“얀은 원래 잘했지. 충분히 국가대표팀에 뽑힐만해.”
성배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거지. 게다가 주전 수비수들이 너무 많이 빠져서 특히나 그렇고.”
베르마엘렌도 성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시즌이 끝났기에 일찌감치 소집된 벨기에 대표팀이었다.
선수들은 또 각자 친한 무리를 따라 모여서 회포를 풀고 있었다.
“내가 뭘. 이번에 다니엘도 못 오고 뱅상도 못 와서 뽑힌 거지, 나는 아직 한참 멀었지.”
하지만 베르통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이번 대표팀에는 수비의 핵심 반 바이텐과 차기 핵심 콤파니가 빠져 있었다.
두 선수 모두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한 것이었다.
베르통헨의 국가대표 선발은 이런 상황의 덕을 본 측면도 분명 있었다.
“아냐. 그들이 있었어도 충분히 선발될 수 있었어. 없어서 하는 말이지만, 옐레 반 담이나 드 망보다는 네가 훨씬 낫다고.”
뎀벨레가 언급한 저 선수들은 벨기에 국가대표팀에 수비 백업으로 단골 선발되는 선수들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프랑스계 선수들이었다.
“그럼, 그럼. 얀이 좀 더 낫지. 더 어리기도 하고.”
베르마엘렌도 이에 동조했다.
‘사실 맞는 말이기는 해.’
그리고 성배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이들이 굳이 프랑스계 선수들만 언급한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베르통헨은 지금 반 바이텐, 콤파니, 베르마엘렌 정도를 빼면 가장 기량이 좋은 센터백이었다.
1군에서 자리를 잡지 못해 국가대표팀 선발이 늦었지만, 이제 RKC 임대를 통해 확실히 자리를 잡은 만큼 국가대표팀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얀이 국가대표로 뽑힌 건 좋은데, 수비수들이 너무 많이 빠져서 걱정이긴 하네.”
얀 베르통헨의 국가대표 데뷔.
이건 좋은 일이었지만, 사실 처음으로 소집된 선수를 선발로 내보내서 상대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나쁘지 않아. 저쪽도 호날두가 빠졌잖아.”
뎀벨레가 말했다.
이번 벨기에의 상대는 포르투갈.
얼마 전 만나 벨기에에게 치욕적인 0-4 패배를 안겼던 그 상대였다.
“호날두가 빠졌어도 그 날 미쳤었던 콰레스마는 그대로 있는데.”
베르통헨이 말한 것처럼 그 날의 대패에는 2골 1어시스트의 호날두가 큰 역할을 했지만, 1골 1어시스트의 콰레스마도 만만치 않은 맹활약을 보여주었다.
호날두가 빠졌어도 상대하기 어려운 것은 분명했다.
“괜찮아. 콰레스마는 그래도 후반전부터 주에게 탈탈 털렸었고, 스위칭해 줄 호날두도 없으니까.”
베르마엘렌은 그래도 자그마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지난 경기에서 전반전까지 꽉 막혀있었던 포르투갈의 공격력이 폭발한 것은 후반전 시작 이후였다.
그리고 그 계기는 호날두와 콰레스마의 스위칭이었다.
“이번에는 콰레스마도, 나니도 주에게 안 통하니까 조금이라도 더 편해질 거야. 그렇지?”
마지막에 베르마엘렌이 성배를 돌아보았다.
‘기대받고 있는 건가?’
그 모습을 보면서 성배가 웃음을 흘렸다.
자신에게 꽤나 기대를 걸고 있는 눈빛이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뎀벨레도 자신을 보고 있었고, 베르통헨은 당연하다는 듯 이미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아, 그 정도야. 콰레스마는 이미 막아봤고, 나니는 아직이지. 나중에는 잘 모르겠지만.”
보급형 호날두. 나니.
각성하기 전 호날두가 그랬던 것처럼 개인 플레이에 심하게 집착하는 선수였다.
그렇다고 호날두 정도의 기량을 갖춘 것도 아니고 콰레스마 정도의 변칙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보급형이었다.
“그래. 주만 믿고 가자고. 포르투갈도 생각보다 중앙은 약하니까.”
베르마엘렌의 말처럼 측면에 비해 포르투갈의 중원은 그다지 강하지 못했다.
측면만 확실히 막아낼 수 있다면 포르투갈을 상대로 승리하는 것도 꿈은 아니었다.
***
“잘 지냈냐? 우승 못 한 건 TV로 잘 봤는데.”
펠라이니가 그 큰 키로 껄렁대며 들어왔다.
며칠 전 프랑스계 선수들끼리 만나서 식사 자리를 가지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80년대 후반에 태어난 선수들, 그러니까 비슷한 나잇대의 선수들끼리 다시 만나는 것이었다.
“우승 못 한 거 물어봐서 좋아? 시끄럽고 빨리 앉아.”
의외로 이 모임의 주최자는 성배였다.
반 바이텐의 기대가 무겁기도 했고, 자신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에 오랜만에 한 번 적극적으로 움직여 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너도 우승 못 했잖아. 어디서 우승한 척이야.”
이번 시즌에도 주필러 리그의 우승팀은 안더레흐트였다.
2위는 RC 헹크. 3위가 펠라이니의 소속팀 스탕다르 리에주였다.
“그 말 감당할 수 있겠어?”
그리고 그때, 펠라이니의 팀 동료 데푸르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지원군의 등장에 펠라이니의 표정은 밝아졌고, 성배는 혀를 찼다.
“우승도 못 한 아약스 주제에 어딜! 에레디비지에의 안더레흐트가 아약스 아냐? 같은 리그 깡패인데 한 팀은 우승 못 했으면 이상한 거지.”
데푸르와 펠라이니의 합동 공격에 성배는 그냥 조용히 앉아 있었다.
저런 장난에 발끈할 만큼 어리지도 않았고, 지금은 괜히 반박해봐야 둘의 호흡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어디서 아약스를 욕하는 소리가 들린다! 얀, 혹시 너도 들려?”
“아아, 들리네. 그런데 나는 사람 말로 안 들리는데?”
이번에는 성배를 도와줄 선수들이 도착했다.
베르마엘렌과 베르통헨이었다.
이들 네 선수에 이어 차례로 선수들이 모였다.
프랑스계, 네덜란드계로 벽을 쌓지 않고 나이, 세대가 같아 모인 선수들이었다.
‘좋아. 일단 이렇게 시작하자고.’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선수들을 상대로 자신이 이런 자리를 주최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외국은 선후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의외로 외국 역시 선후배 관계가 꽤 엄격했다.
미국이든 유럽이든 신입생 길들이기가 존재했고, 한국처럼 상명하복의 관계는 아니더라도 적당한 수준의 어려움이 존재하는 것이 선배라는 존재였다.
‘어차피 몇 년 뒤면 이들이 대표팀의 주축이 되니까.’
그래서 성배는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선수들, 20세를 근처에 둔 어린 선수들을 공략하기로 했다.
그 위는 반 바이텐의 몫이었다.
자신은 이들만 대충 묶어놓으면 할 일을 다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모아놓으니까 듬직하네.’
베르마엘렌, 베르통헨, 펠라이니, 데푸르.
그리고 자신이 모은 모임에 참여하지 않을 리 없는 콤파니.
여기에 앞으로 대표팀에 합류하게 될 아자르나 미랄라스, 데 브라위너, 루카쿠, 벤테케 등 수많은 선수들.
‘어차피 메인은 이쪽이야.’
아직 어린 나이였고, 대표팀 선수들 대부분이 자신과 나이 차이가 꽤 났기 때문에 지금은 이 정도로 시작하지만, 이들은 앞으로 자신에게 큰 힘이 되어줄 것이었다.
게다가 이제부터 나타날 선수들이 진짜배기였다.
‘다니엘과는 친분이 쌓였으니 그 정도면 충분하고 진짜는 여기지.’
자신보다 선배인 선수 중에서 친분을 쌓아야 하는 선수는 반 바이텐 밖에 없었다.
그리고 벨기에의 황금세대를 이끄는 핵심은 여기 다 모일 것이었다.
‘귀화 선수라서 따돌림이나 받을 줄 알았는데. 벨기에 사회구조 덕분에 오히려 메인이 되네.’
다른 선수들은 기본적으로 네덜란드계 혹은 프랑스계로 나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배는 아시아에서 온 귀화 선수였기 때문에 양쪽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았지만, 반대로 양쪽 모두에 포함될 수 있었다.
“주! 뭐해! 지가 불러놓고 혼자 떨어져 있냐?”
베르마엘렌이 소리쳤다.
“아아, 간다고.”
‘저런 친구들도 나를 밀어주고 있으니.’
벨기에에서 나고 자라서 각각 네덜란드계, 프랑스계 또래 선수들의 대표 역할을 하는 베르마엘렌과 콤파니가 자신의 가장 친한 동료였다.
그리고 그 두 선수는 성배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모든 상황이 성배로 하여금 벨기에 국가대표의 중심이 되라며 등을 떠밀고 있었다.
***
“호날두가 없어도 역시 포르투갈은 강팀입니다! 벨기에를 시종일관 압도하며 좋은 경기력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호날두가 없어도 포르투갈은 포르투갈이었다.
벨기에가 희망을 걸어보았던 중앙 싸움도 포르투갈의 쁘띠와 티아구가 생각보다 잘 버텨주면서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지난 경기에서 깨달음을 얻은 포르투갈의 양쪽 측면 공격수들은 시작부터 스위칭을 시작했다.
성배가 버틴 왼쪽에 대한 욕심은 어느 정도 접은 두 선수는 번갈아 호프킨스의 오른쪽을 공략했고, 호프킨스만 죽어 나가는 중이었다.
“오버래핑해 올라온 미구엘, 중앙으로 크로스!”
그러던 중, 포르투갈의 라이트백 미구엘이 날카로운 오버래핑을 시도했다.
오버래핑을 견제해줬어야 하는 시몬스가 계속된 오른쪽 공략에 긴장을 푼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젠장. 뭐하는 거야.’
미구엘은 스페인의 명문, 발렌시아에서 주전 라이트백으로 활약하는 선수였다.
절대로 만만히 볼 수 있는 선수가 아니었다.
‘절대 쉽게는 못 움직일 거다.’
미구엘의 크로스는 포스티가에게 연결되었다.
미구엘을 시몬스에게 맡긴 성배는 포스티가를 막고 있었다.
하지만 포스티가는 자신이 무언가 할 생각 없이 논스톱으로 힐패스를 시도했다.
‘이게 뭐야!’
그리고 그 순간, 성배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포스티가의 노룩 패스가 콰레스마에게 연결된 것은 괜찮았다.
하지만 콰레스마를 막고 있었어야 할 베르통헨이 왜 자신의 옆에서 포스티가에게 신경 쓰고 있던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잘 뺐어요! 콰레스마!”
페널티박스 오른쪽의 딱 경계선쯤 되는 부근에서 콰레스마가 볼을 잡았다.
오른발과 왼발 모두 잘 쓰는 선수였기 때문에 왼발 앞으로 볼을 옮긴 뒤에 직접 골을 노릴 수 있었다.
“아, 아아!!”
콰레스마의 움직임에 중계진은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감탄사를 내뱉을 뿐이었다.
‘거기까지다. 더는 건방 떨지 말라고.’
펠라이니의 태클은 콰레스마가 볼을 왼발로 5cm 옮긴 것만으로 무력화되었다.
뒤이어 달려든 베르통헨의 태클은 이어진 오른발 드리블, 흔히 말하는 팬텀 드리블에 무력화되었다.
“슈팅 찬스!!”
이제 왼발로 감으면 70% 이상 골로 연결할 수 있는 위치까지 콰레스마가 침투했다.
벨기에의 마지막 보루는 스틴슨 골키퍼, 그리고 성배였다.
‘절대로 허락 못 하지.’
콰레스마를 향해 달려가는 지금, 절박한 이 순간에도 성배는 냉정했다.
급한 상황임은 분명했다.
당장 콰레스마의 앞을 막아서지 못하면 슈팅을 허용하고, 슈팅을 시도하면 높은 확률로 실점할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더 침착해야지.’
그랬기 때문에 태클을 마지막까지 아껴야 했다.
섣불리 몸을 날리면 분명 당장의 슈팅은 막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한 번 더 치고 올라가면 그다음은 막을 수 없었다.
베르마엘렌이 막아준다고 하더라도 그러면 쁘띠가 비었다.
쁘띠를 호프킨스가 막아준다고 하면 나니가 비었다.
‘내가 책임지고 막아야 해.’
그래서 성배는 마지막까지 태클을 아꼈다.
확실하게 슈팅을 할 거라는 확신이 생기기 전까지였다.
‘지금인가!’
그리고 다음 순간, 콰레스마가 왼발을 들어 올렸다.
< 낭만필드 - 10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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