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07 >
일주일 뒤, 아약스와 AZ 알크마르는 페예노르트의 홈구장인 데 큅에서 KNVB 베이커 결승전을 가졌다.
PSV와 함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치열한 우승 경쟁을 펼쳤던 두 팀이 결승에서 만난 것이었다.
세 팀 중 어느 한 팀이 우승 트로피를 가져가도 이상하지 않았을 시즌이었지만, 당연히 우승 트로피의 주인은 한 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결국 우승 트로피를 빼앗긴 두 팀이 다른 트로피라도 가져가기 위해 결승에서 격돌했다.
‘진짜 가지가지 하는구나.’
하지만 그런 뒷이야기에 비해 경기 내용은 실속이 없었다.
리그 마지막 경기부터 힘이 빠진 듯한 모습을 보였던 AZ는 이번에도 몸이 무거워 보였고, 아약스 역시 맥이 빠진듯한 모습을 보였다.
오늘 경기에서는 양 팀 모두 좋지 못한 경기력을 선보였고, 경기종료 직전까지 두 팀의 경기력은 올라오지 않았다.
‘하아, 결국 승부차기까지 가겠구나.’
전반 4분, AZ의 주전 윙포워드이자 성배의 국가대표 동료인 무사 뎀벨레가 선취 골을 터뜨렸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AZ의 경기력이 올라온 듯 보였다.
하지만 옛 성현들께서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고 하셨던가.
AZ는 거기까지였다.
‘둘 다 최악이었지만, 그나마 우리가 조금 나았는데.’
첫 골을 실점한 이후, 아약스는 그제서야 조금은 정신을 차린 듯한 경기력을 보였다.
똑같이 눈이 썩는 경기력이었고,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했지만, 도토리에도 크기의 차이는 있었다.
체력까지 방전된 AZ에 비해 아약스는 체력이라도 남아있었다.
그 덕에 경기의 주도권은 잡을 수 있었다.
‘진짜 운이 좋았지.’
하지만 아약스가 동점을 만든 것은 선취 골을 허용하고 50분 뒤였다.
그나마 그것도 훈텔라르가 어거지로 욱여넣은 골이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정말 어이없게 패배할 뻔했다.
-삑! 삐-익!
‘하아, 정말 승부차기구나.’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아약스와 AZ은 전후반 90분과 연장 전후반 30분 동안 경기를 치르면서도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이번 시즌 마지막 우승 트로피의 주인은 결국 승부차기를 통해 가려지게 되었다.
***
“오른쪽 다리가 살짝 무겁네요. 그쪽 위주로 풀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린 뒤, 양 팀은 하프라인 부근에 자리를 잡고 마지막으로 팀을 정비했다.
성배 역시 한 손에 물병을 들고 앉아 팀닥터의 마사지를 받는 중이었다.
“헌터! 오늘 컨디션은 어때? 괜찮아?”
그리고 케이테 감독은 그라운드 위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선수들 사이에서 가장 바쁘게 돌아다녔다.
승부차기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승산을 높이기 위해서는 승부차기에 나서는 키커의 순서를 공들여 짜야만 했다.
그것을 위해 선수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평소 킥 좀 찬다는 선수들의 컨디션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주! 컨디션은?”
“좋습니다. 킥도 잘 맞는 것 같고.”
당연히 성배도 키커 후보에 포함되어 있었다.
골 결정력에 문제가 있을 뿐이지, 데드볼 상황에서의 킥이 부족할 리 없었다.
아약스 내에서 손꼽히는 페널티 키커인 성배였기에 당연히 키커 후보가 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문제없지? 다리는 어때.”
팀닥터에게 집중적으로 마사지를 받고 있는 오른 다리를 보면서 묻는 케이테 감독이었다.
킥을 하는 발도 발이지만, 디딤발이 되어주는 다리도 굉장히 중요했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없습니다. 힘이 좀 빠진 것 같아서 잠깐 풀어주는 것 뿐이에요.”
성배의 말을 들은 케이테 감독은 한동안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4번 키커다. 준비해.”
“알겠습니다.”
4번부터는 경기의 승패를 결정짓는 킥을 찰 확률이 높아졌다.
1번에서 3번까지는 경기의 승패를 결정짓기에는 좀 빠른 순번이었지만, 4번부터는 충분히 결정될 수 있었다.
‘내 킥을 꽤 좋게 보는군. 기분 좋은데.’
마지막 키커인 5번, 첫 시작을 알리는 1번.
이 두 순번이 가장 중요한 순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음을 꼽으라면 아마도 4번.
성배에게 4번 키커를 맡긴 것은 최소한 성배의 킥에 신뢰를 보내고 있음을 의미했다.
***
그라운드 위의 러시안 룰렛.
11미터 룰렛.
페널티킥을 의미하는 문장들이었다.
득점으로 이어질 확률이 훨씬 높았지만, 키커고 키퍼고 할 것 없이 큰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잔인한 11미터 룰렛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양 팀 두 명의 키커 모두 성공하면서 2-2로 균형을 맞추고 있습니다.”
AZ의 1번 키커 아벨라체와 아약스의 1번 키커 훈텔라르, AZ의 2번 키커 뎀벨레와 아약스의 2번 키커 페레즈는 모두 득점에 성공했다.
그리고 3번 키커들이 킥을 할 차례가 되었다.
“스타인슨, 도움닫기 후 슈팅! 들어갔습니다!”
“왼쪽 상단으로 강하게 때려 넣었네요. 알고도 막기 힘든 슈팅이었어요.”
AZ의 3번 키커 역시 승부차기에 성공했다.
“톰 데 뮬, 멈칫거리고 다시 슈팅! 골! 들어갑니다. 톰 데 뮬 역시 성공시키면서 3-3, 팽팽합니다.”
그리고 아약스의 3번 키커 톰 데 뮬 역시 성공, 여전히 스코어는 3-3으로 동률이 유지되었다.
“현재까지는 양 팀의 키커 여섯 명 모두 승부차기에 성공하면서 3-3으로 팽팽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막판으로 접어듭니다.”
“이제는 정말 한 번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들 수 있어요.”
120분 동안 펼쳐졌던 혈투보다 승부차기가 훨씬 더 흥미진진했다.
그나마 이거라도 건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정규 시간 안에 끝났다면 눈이 썩는 경기만 지켜보다가 돌아가야 했을 것이었다.
‘아, 점점 살 떨리네.’
차례가 다가올수록 긴장하기 시작하는 성배였다.
경험이 아무리 많아도 페널티킥, 특히 승부차기는 항상 떨리고 무서운 것이었다.
“자, AZ의 4번 키커 라이언 동크 선수가 준비합니다.”
“정말 떨리겠네요. 앞 선수들이 한 명 한 명 킥을 성공시킬 때마다 얼마나 떨릴지 상상만 해도 제가 다 끔찍하네요.”
이 선수 다음이 바로 성배의 차례였다.
긴장하고 지켜보던 중, 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거... 마르텐이 잘하면 막겠다.’
동크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승부차기의 부담감에 먹히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것만 막으면 이길 수 있어.’
다음에 자신이 무조건 성공시켜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냥 상대가 놓치기를 바랄 뿐이었다.
성배의 주문을 한몸에 받으며 동크가 도움닫기를 시작했다.
“동크, 슈팅! 아! 스테켈렌부르크 선방!! 선방입니다! 드디어 승부차기를 막아냅니다!”
“스테켈렌부르크! 대단하네요! 드디어 한 건 해내나요?”
성배의 예상대로 동크는 승부차기에 실패했다.
긴장한 것을 숨기려고 한 것인지 여유 있는 척하며 중간에 멈추기도 했지만, 오히려 자신에게 독이 되고 말았다.
잠시 멈칫한 순간, 밸런스가 깨졌고 동크의 킥은 생각한 것보다 중앙으로 몰렸다.
“이제 아약스의 주가 들어섭니다. 볼을 들고 접근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성배의 차례였다.
성배는 볼을 들고 천천히 페널티 스팟으로 걸어갔다.
“사실 이 경기에서 패배하면 더 아쉬운 쪽은 아약스거든요? 더 좋은 경기를 펼쳤기 때문에 승부차기까지 끌고 온 것도 아쉬울 거예요.”
정규시간과 연장전을 통해 승부를 내지 못한 것이 아쉬운 아약스.
팀의 기대를 등에 업고 승부차기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전번 선수가 놓치니까 더 긴장되는 것 같네.‘
바로 전에 찼던 선수가 실패하고 나니 더 많이 긴장되었다.
자신이 성공하면 승리에 정말 바짝 다가서는 것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실패하면 이 좋았던 분위기를 AZ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스무 살이 된 어린 선수에게는 살짝 부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리그에서 킥이 좋기로 따지자면 한 손으로 꼽히는 선수지 않습니까?”
“그렇죠. 주성배 선수가 페널티킥을 차는 건 처음 보지만, 아마 잘 찰 거예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성배에게 집중되었다.
‘페널티킥은 진짜 오랜만이네.’
전생에서는 종종 페널티킥을 맡아서 차곤 했었다.
킥이 워낙 좋았고, 킥력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담 키커는 아니었지만, 전담 키커가 없을 때는 종종 찼었기 때문에 페널티킥이 낯설지는 않았다.
다만 오래간만이라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회귀 후, 페널티킥은 처음이었다.
‘별거 있나.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되지.’
성배의 페널티킥 스타일은 오른쪽 상단 구석으로 빠르고 강하게 때려 넣는 것, 한 가지였다.
평소 성배의 플레이 스타일을 생각하면 골키퍼와 치열하게 심리전을 펼칠 것 같지만, 최소한 페널티킥에서는 앞뒤 재지 않고 때리는 스타일이었다.
11미터라는 거리는 짧았다.
강하고 빠르게, 그리고 정확한 코스로 때리면 골키퍼가 알고 있어도 막을 수 없었다.
킥력과 정확도에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삐-익!
‘간다...’
주심의 휘슬이 울리고, 성배가 그라운드에서 발을 뗐다.
“주, 도움닫기! 강하게 슈팅!!”
하던 대로.
성배는 오른쪽 상단 구석을 보면서 볼을 터뜨리려는 듯 강한 슈팅을 시도했다.
‘제대로 맞았다.’
볼을 때리는 순간, 성배는 성공을 확신했다.
파워, 스피드, 그리고 방향.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킥이었다.
“골! 골입니다! 주, 엄청난 슈팅으로 승부차기에 성공합니다!”
“정말 멋진 슈팅이네요! 강하고 정확했어요! 이런 건 알아도 못 막죠!”
이제 3-4.
아약스가 승부차기에서 리드를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빨리 와! 여기가 네 자리야!”
승부차기에 성공하고 돌아온 성배를 동료들이 맞아주었다.
동료들과 한 번씩 손바닥을 마주친 성배는 베르마엘렌의 부름에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어깨동무하고 있는 동료 선수들 사이에 껴서 마지막 키커의 결과를 지켜보았다.
“슈팅! 골! 골입니다! 부카리, 마지막 키커로 나서서 침착하게 득점에 성공합니다. 4-4! 그리고 이제 아약스의 마지막 키커, 헤이팅아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아약스의 마지막 승부차기 키커는 주장, 헤이팅아였다.
헤이팅아가 승부차기에 성공하기만 하면 아약스의 승리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승리는 곧 KNVB 베이커 우승을 의미했다.
“아약스의 주장, 헤이팅아에게 아약스의 KNVB 베이커 2연패가 달려있습니다.”
“아약스 정도 되는 클럽이 무관으로 시즌을 마칠 수는 없죠! 리그 우승컵은 안타깝게 놓쳤지만, KNVB 베이커 우승컵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가져가고 싶을 거예요.”
지난 시즌에도 결승전에서 PSV를 꺾으며 KNVB 우승 트로피를 가져갔던 아약스였다.
최소한 한 개의 우승 트로피는 가져가야 체면이 서는 클럽이 아약스였고, 이는 아약스의 주장, 헤이팅아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헤이팅아, 깊게 심호흡합니다.”
“떨릴 수밖에 없겠죠. 십분 공감합니다.”
한숨을 크게 내쉬며 심호흡을 마친 헤이팅아는 옆으로 가볍게 폴짝 뛰더니 볼을 향해 달려들었다.
“헤이팅아, 슈팅!! 골!! 골입니다!! 들어갔습니다! 경기 끝납니다!”
헤이팅아의 선택은 중앙이었다.
팀의 우승을 결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상황에서 과감하게 중앙을 선택한 헤이팅아의 선택은 정확히 맞아 들었다.
“으아아!! 으아!!”
“됐다! 됐어!”
우승이 확정된 순간, 어깨동무한 채 초조하게 지켜보던 아약스 선수들은 무슨 뜻인지 모를 외침과 함께 일제히 헤이팅아를 향해 돌격했다.
성배 역시 이들과 함께 달렸다.
“아약스! KNVB 베이커 2연패를 달성합니다! 열일곱 번째 우승으로 대회 최다 우승 기록을 또 하나 늘렸습니다!”
“2위 페예노르트와는 어느새 7회나 차이가 나게 되었네요!”
리그 우승을 놓치며 분위기가 다운되었던 아약스였다.
하지만 KNVB 우승 트로피를 차지하며 분위기를 끌어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대회 우승을 통해 유로파리그 4차 예선 티켓을 얻어냈다.
‘이번 생에서는 운이 꽤 좋네.’
성배는 동료들이 뿌려대는 물에 기분 좋게 몸을 내던지면서 생각했다.
겨우 두 번째 풀 시즌이었다.
그런데 우승 트로피도 두 개를 차지했다.
지난 생에서 단 한 개의 우승 트로피도 가지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엄청난 성과였다.
‘좋아. 이 분위기 계속 이어서 가자.’
정규시즌 일정은 이것으로 모두 끝이 났다.
하지만 아약스의 시즌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 낭만필드 - 10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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