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06 >
‘그래. 역시 이럴 땐.’
아약스에서 가장 믿음직한 선수.
득점이 필요할 때면 여지없이 팀에 득점을 안겨다 주었던 선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훈텔라르 외에 다른 선수를 생각할 수 없었다.
“코너킥! 빠르게 올라갑니다! 훈텔라르!!”
중계진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 정도로 성배의 코너킥과 훈텔라르의 쇄도가 완벽히 맞아떨어졌다.
‘됐다.’
이제 막 훈텔라르의 머리에 볼이 닿으려 하고 있었지만, 성배는 골을 확신했다.
훈텔라르의 쇄도는 기가 막혔고, 수비수들이 함께 뜨기는 했지만 거의 방해를 받지 않는 완벽한 위치에서의 헤더였다.
신장에 비해 헤딩 능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 훈텔라르라도 이건 무조건 넣어줄 것이었다.
“골!! 골!! 골!! 골입니다!! 훈텔라르, 본인의 22호 골을 터뜨립니다!!”
역시나.
훈텔라르는 절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는 선수였다.
현대 축구에 어울리는 유형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골 냄새를 맡는 능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런 선수가 완벽한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코너킥 죽이는데! 역시, 역시 킥은 주성배지!”
득점에 성공한 훈텔라르에게 선수들이 달려가는 와중에 성배에게도 몇몇 선수가 다가왔다.
이걸로 두 개째 어시스트.
오늘 경기에서 아약스가 승리한다면 성배의 공은 절대로 작지 않을 것이었다.
“아약스, 2-0으로 앞서나가기 시작합니다! 이대로라면 우승트로피는 아약스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1위에 올랐다.
하지만 아직 20분 정도 남아있었고, 분위기를 보면 절대로 이렇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이제는 1위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 다시 한 번 힘을 내야 했다.
***
‘뭐야? 무슨 일이야?’
별 의미 없이 돌아가던 성배의 고개가 아약스 벤치 쪽에서 멈췄다.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설마?’
그리고 그 순간, 성배는 일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지금 상황에서 벤치를 어수선하게 만들 일은 다른 경기장 소식밖에 없었다.
‘아무리 봐도 좋은 소식을 들은 표정은 아니야.’
그래도 혹시나 해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다시 봐도 좋은 소식은 아닌 것 같았다.
“다시 라인 올려!! 무조건 올려!! 한 골 더 넣어야 해!!”
심판에게 제지당할 정도로 그라운드에 바짝 다가선 케이테 감독이 소리쳤다.
성배의 예상대로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제길. 결국, PSV가 사고 쳤나 보네.’
전반전을 2-1로 앞선 채 끝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PSV는 힘들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우승에 걸림돌이 있다면 AZ일 거라 생각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PSV는 후반기의 부진이 없던 일인 것처럼 살아나 마지막 경기에 모든 힘을 불태웠다.
“후반전 막판으로 접어들면서 우승 경쟁에 다시 불이 붙었습니다! 5분 전 AZ, 그리고 방금 PSV가 한 골씩을 추가하면서 다시 순위가 바뀝니다.”
“PSV! 대단하네요. 다섯 골을 몰아치면서 가장 불리했던 상황을 뒤엎었어요!”
전반기에 2위권과 벌려놓았던 승점이 있는데 이대로 우승 트로피를 놓칠 수 없다는 발악으로 보였다.
주축 선수들의 부상 이탈 이후 완전히 무너졌던 PSV가 오랜만에 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제길. 왜 하필이면.’
성배가 빌었던 대로 마지막 경기에서 AZ는 무너지고 있었다.
16위 클럽을 상대로 80분이 다 될 때까지 2-2 균형을 맞추고 있다는 것은 분명 AZ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PSV가 마지막 경기에서 경기력을 회복하고 말았다.
[IN - 21. 니콜라 미테아 / OUT - 13. 주성배]
[IN - 16. 톰 데 뮬 / OUT - 18. 가브리]
케이테 감독은 공격을 강화하기 위해 마지막 수단을 꺼내들었다.
아약스도 이제 더 이상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전술이고, 포메이션이고 전부 포기하고 공격에 올인해야 할 시간이 된 것이었다.
‘허. 오늘처럼 중요한 경기에 중간 교체라고?’
대기심이 들어 올린 선수 교체 패널에 성배의 표정이 굳어졌다.
오늘 아약스가 넣은 두 골 모두에 성배는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두 골 모두 성배가 어시스트한 골이었고, 한 번도 선발로 뛰어본 적 없는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에서도 열심히 뛰었다.
물론 순수하게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좋았다고는 볼 수 없었지만 케이테 감독의 요구는 100% 수행했다고 봐야 했다.
‘공격 강화의 의미는 알겠지만. 그러면 어비를 빼고 나를 어비 자리에 넣으면 되지.’
그래도 공격수와 교체되었다는 것이 약간의 위안을 주었다.
그 덕에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킬 수 있었다.
“수고했어.”
“한 골 부탁한다. 나 대신해서 들어가는 건데 그 정도는 해야지.”
미테아와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친 성배가 벤치로 들어갔다.
“수고했다. 오늘 정말 잘 뛰었어.”
성배를 반겨준 사람은 한 명의 코치밖에 없었다.
그 어떤 경기보다 중요한 경기에서 풀타임 경기를 치러본 적이 없는 포지션으로 뛰었다.
심지어 레프트백으로 뛰면서 시즌 3골 12어시스트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경기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다.
그러면서도 오늘 경기에서 두 골을 어시스트했다.
‘그게 누구 때문인데...’
오로지 케이테 감독이 그런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케이테 감독에게 뭐 큰 것을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최소한 경기를 마치고 나온 자신에게 격려 한 마디 정도는 건넸어야 했다.
오늘 경기에서 가장 고생한 선수는 누가 뭐래도 자신이었다.
‘당신을 위해 뛴 건 절대로 아니지만.’
케이테 감독 따위. 알게 뭐냐.
자신을 위해, 자신에게 나쁜 인상이 생기지 않도록.
그래서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에서도 열심히 뛴 것이었다.
‘그래도 최소한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정도는 했어야지.’
케이테 감독의 시선은 오로지 그라운드에 박혀 있었다..
이해는 한다.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경기이니까.
‘뭐, 어차피 바라지도 않았으니.’
이제 와서 케이테 감독에게 무언가를 바라지 않았다.
성배도 다른 많은 선수와 마찬가지로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케이테 감독에게 반기를 드는 쪽이었다.
다만 인간적으로도 실망했을 뿐이었다.
‘아, 우승은 했으면 좋겠는데, 우승하면 저 감독 내년에 또 보는 거 아닌가.’
성배의 마음속에 갈등이 일었다.
우승도 하고 싶기는 했지만, 자신을 제 포지션에 쓰지 않고 이리저리 돌려막은 케이테 감독 밑에서 뛰고 싶지 않았다.
‘시즌 내내 너무 고생했어.’
생각보다 결장도 너무 많았다.
쓰리백을 쓴다고 하면서 자신을 벤치에 앉힌 경기도 열 경기가 넘었다.
누가 봐도 엠마누엘슨이나 데 뮬, 가브리보다 성적이 좋았는데, 결장한 경기는 풀타임 자체가 처음인 데 뮬을 제외하면 성배가 가장 많았다.
라이트백으로 출전한 경기도 레프트백으로 출전한 경기 못지않게 많았다.
성배가 이번 시즌에 얼마나 고생했는가를 보여주는 수치였다.
‘겨우 에레디비지에에서 보여줄 무기가 아니었는데...’
라이트백으로도 뛸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은 데뷔 초반, 빠르게 자리를 잡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중에라도 제대로 된 빅클럽에 합류했을 때, 벤치에라도 앉힐만한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아약스 정도의 클럽에서 자신의 자리를 내주고 돌아다닐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일단 우승은 하고 봐야지.’
아무리 그래도 우승할 수 있는데 못하기를 바라진 않았다.
일단 우승은 하고, 그다음에 직접 감독을 찾아가 담판을 짓든지 해서 어떻게든 할 것이었다.
‘그런데 이건 밸런스가 너무 무너진 것 같은데.’
아무리 밸런스를 포기하고 공격력을 선택했다고 해도 지금 포메이션은 밸런스가 너무 심하게 무너진 느낌이었다.
이런 밸런스로 과연 한 골을 빼앗아낼 수 있을지.
걱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
-삑! 삐-익!
‘하아... 이렇게 끝났군.’
10여 분 뒤, 주심의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다.
성배는 가만히 하늚을 쳐다보다가 전광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빌렘Ⅱ 틸뷔르흐 0 : 2 아약스 암스테르담]
더 이상의 득점은 없었다.
아약스의 득점은 훈텔라르의 코너킥 헤더를 통한 두 번째 득점 이후 멈춰버렸다.
두 번째 득점 이후 승점을 얻는 것이 힘들어졌음을 깨달은 빌렘의 반항이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약스는 빌렘의 골문을 열지 못했다.
‘공격 강화하겠다고 교체를 했는데. 도대체 뭐가 강해진 건지.’
교체를 통해 데 뮬과 미테아, 로저를 투입했지만, 이들의 교체 효과는 미미했다.
그나마 가브리가 중앙으로 이동해 오른쪽 측면을 맡게 된 데 뮬은 좀 나았지만, 미테아는 훈텔라르, 페레즈와 동선이 겹치며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다비즈, 가브리와 겹친 로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변한 건 없으니까.’
혹시나 다른 경기장에서 변화가 생겼을지도 몰라.
그런 뜻이 읽혀지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선수들에게 성배는 조용히 고개만 가로저어 주었다.
변한 것은 없었다.
아니, 있기는 했는데 아약스의 우승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PSV는 무난하게 버텨내며 5-1의 스코어를 지켰고, 승점 75점에 골 득실 +50를 기록했다.
AZ은 이변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후반 막판, 추가 시간에 실점하면서 16위의 엑셀시오르에게 2-3으로 패배했다.
지난 라운드에 1위로 올라섰던 AZ는 1주일 만에 자리를 내줘야 했다. 승점 72점에 골 득실 +52
‘우리는 승점 75점에 골 득실이... +49. 하아, 이렇게도 지는구나.’
골 득실에서 겨우 한 골 차이였다.
득점과 실점의 차이가 겨우 한 골 적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한 골의 차이가 우승 트로피의 주인을 가르고 말았다.
‘한 골만 더 넣었어도 우리가 우승했을 텐데...’
골 득실이 같으면 다득점으로 넘어간다.
다득점에서는 아약스가 PSV에 거의 열 골을 앞서 있었다.
골 득실로 넘어갈 경우, 더욱 유리했던 건 이번 라운드를 앞두고 골 득실과 다득점 모두에서 앞섰던 아약스였다.
하지만 마지막 라운드에 PSV는 폭발했고, 아약스는 그러지 못했다.
“됐다. 세상 안 끝난다. 뭘 울기까지 하냐.”
몇몇 선수들은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베테랑 선수들은 그라운드로 내려와 그런 선수들을 위로했다.
각자의 이유로 빠졌던 스탐과 그리게라 등도 사복을 입고 경기를 관람하다가 관중석에서 내려왔다.
“우린 잘했어. 우리가 못한 게 아니지. PSV가 너무 잘했을뿐.”
성배도 그라운드로 올라가 친분이 있는 선수들을 위로했다.
경기를 보면서 이런저런 불만들은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2-0의 승리는 절대 나쁜 결과가 아니었다.
심지어 AZ는 강등권 팀에게 패배하기까지 했다.
승리한 것만으로도 잘한 것이었다.
5-1의 대승을 거둔 PSV가 너무했을 뿐.
“아아, 결국 놓쳐버렸네. 꼭 가지고 싶었는데.”
헤이팅아가 성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우승 트로피를 차지하지 못해 속상한 모습은 보였지만, 그래도 유쾌함을 잃지 않는 모습이었다.
헤이팅아의 모습에 미소가 지어졌다.
“뭐, 마지막 기회는 아니니까.”
성배가 말했다.
그랬다. 아직 아약스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 기회는 남아있었다.
일주일 뒤, 데 큅에서 KNVB 베이커 결승전이 예정되어 있었다.
< 낭만필드 - 10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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