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05 >
‘다행히 숫자는 많지 않아.’
아약스가 계속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역습 찬스 임에도 하프라인을 넘어선 빌렘 선수가 많지는 않았다.
아두이르의 돌파만 막아준다면 패스를 끊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다비즈, 아두이르의 앞을 막아섰고, 아두이르는 돌파 시도!”
다행히 다비즈가 한 발 먼저 아두이르의 앞을 막아섰다.
억지로라도 돌파를 시도해봤던 아두이르지만, 다비즈의 수비를 뚫지는 못했고, 몸을 뒤로 돌려 바로 패스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성배가 있었다.
피지컬이 부족해 수비형 미드필더에 어울리지 않는 것일 뿐, 수비수였기 때문에 태클 실력과 가로채기 능력만큼은 다른 수비형 미드필더들보다 더 나은 것이 성배였다.
“아! 주가 끊어냈습니다! 완벽한 예측! 확실한 태클입니다!”
과감히 다른 코스를 포기하고 두 개 정도의 패스 코스에 집중한 성배였고, 이는 정확히 들어맞았다.
아두이르의 패스는 성배의 발에 맞고 사이드라인을 넘었다.
그리고 아약스 선수들은 그사이 모두 자리를 잡았다.
“멋진 태클이었죠? 수비수 중에서도 태클과 볼 차단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선수이니 중원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죠.”
“빌렘에게는 굉장히 아쉽게 되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잡은 기회인데 허무하게 날린 모습입니다.”
중계진은 성배에 대한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수비형 미드필더로 나서서 어시스트도 기록하고 멋진 수비도 한 개 보여준 성배의 표정은 정작 좋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좋을 것 없을 텐데.’
멋지게 막아냈다는 것에 기뻐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의 아약스는 분명 전술상의 수정이 필요했다.
멋진 태클로 수비해냈음에도 불구하고 성배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
“다른 곳은 어떻게 됐어?”
전반전이 끝나고 라커룸으로 돌아가는 아약스 선수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힘든 전반이 끝났지만, 땀을 닦거나 물을 마시는 것보다 PSV, AZ의 경기 진행 상태를 묻는 것이 먼저였다.
“PSV는 2-1로 이기고 있고, AZ은 1-1로 동률이야.”
어느 순간부터 벤치로 밀린 로저가 대답했다.
빌렘에 1-0으로 앞서고 있는 아약스가 여전히 1위 자리를 지키는 중이었다.
“아직 우리가 1위란 말이지...”
전반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성배였다.
살펴보니 다른 동료들 역시 전반전의 플레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이건 빠르게 해결하기 힘들 것 같은데...’
그 이유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전술 숙지 부족, 훈련 부족이었다.
선수들이 훈련 시간에 게을렀던 것이 아니었다.
케이테 감독이 새로운 전술을 들고 온 것이 너무 늦었고, 그 전술을 숙달할 시간이 없었을 뿐이었다.
‘수석코치 경험이 많다고 해도... 감독이라는 자리는 또 다르지.’
사실 케이테 감독도 모두 알고 있었을 내용이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정작 급한 순간에는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게 초보 감독이었다.
특히 조급함을 느낄수록 더 심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이번 시즌의 우승 경쟁은 초보 감독이 감당하기에 너무 무거운 것인지도 몰랐다.
‘모르겠다. 선수야 하라는 대로 하는 거지.’
어차피 방법은 없었다.
감독은 오늘의 전술을 확정했고, 선수는 그에 따라 최선을 다해 뛰어주면 되는 것이었다.
‘PSV랑 AZ도 생각보다 좋지 못하니까.’
나머지 두 팀도 승기를 잡지 못했기에 여유가 있었다.
일단은 그렇게 생각했다.
***
“PSV가 또 한 골 넣었어! 이제 진짜 위험해!!”
벤치에서 동료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골을 또 넣었다고?’
성배를 비롯해 그라운드 위에서 뛰고 있는 아약스 선수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건 심각한 상황이었다.
“PSV가 또 득점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PSV, 비테세를에 4-1로 앞서나가기 시작합니다!”
후반전이 시작하고 20분, PSV는 두 골을 폭발시키며 비테세의 골대에 폭격을 가했다.
승점 75점, 골 득실 +49.
1위로 올라서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PSV가 1위예요! 아약스, 정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인데요, 아약스 벤치도 이 소식을 들었을 거거든요? 조금 더 적극적으로 공격할 필요가 있어요!”
후반전에도 여전히 아약스의 분위기였다.
그러면서 또 여전히 아약스의 공격은 미묘하게 엇나갔다.
“이번 시즌 우승 경쟁은 정말 재미있네요! 이렇게 치열한 우승 경쟁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요. 아약스가 한 골만 더 넣으면 골 득실이 같아져 다득점으로 1위를 차지하고, AZ는 오늘 이기기만 하면 거의 1위 확정이에요.”
세 팀이 한 치의 양보 없는 경쟁을 펼치는 상황.
그리고 그것이 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이어진 상황.
다른 건 모르겠지만 적어도 리그를 주최하는 입장이나 중계하는 입장에서는 최고의 결과가 나와주고 있었다.
“한 골이면 세 팀의 순위가 요동칠 수 있습니다. 아약스도, AZ도, PSV도, 한 골에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입니다.”
“지금 상황을 보면 AZ가 가장 힘들어 보이네요. 1-2로 뒤지고 있거든요? 경기를 직접 볼 순 없지만, 스코어를 봤을 때 경기력이 그리 좋을 것 같지는 않네요.”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AZ였지만, 마지막 경기에서 결국 미끄러지는 모양새였다.
리그 16위의 엑셀시오르를 상대로 리드를 빼앗긴 졸전.
심지어 엑셀시오르에게 경기의 주도권까지 내준 상황이었다.
“이래서 우승 DNA라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미끄러지다뇨.”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힘을 짜내서 여기까지 달려온 판 할 감독과 AZ였다.
하지만 우승 트로피가 주는 무게감은 그들의 생각보다 조금 더 큰 모양이었다.
“세트피스!! 세트피스를 노려!!”
PSV의 득점 소식에 성배는 공격진을 향해 소리쳤다.
만들어가는 플레이는 오늘 별로 좋지 못했다.
그렇다면 오래전부터 만들어 놓았던 패턴 플레이와 개인 기량으로 승부를 봐야 했다.
여기에 가장 어울리는 건 역시 코너킥과 프리킥, 세트피스였다.
‘시작 전부터 불안하더라니.’
레프트백이 아닌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해서 좋은 것 중 하나는 동료들의 움직임을 확인하기가 조금 더 편리하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그라운드의 가운데 즈음에서 동료들을 한눈에 담으니 오늘 경기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개개인의 플레이에는 큰 문제가 없어.’
전술이 익숙하지 않아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개개인의 컨디션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역시 세트피스가 정답이지.’
전술과 상관없이 기량으로 누르는 방법.
세트피스였다.
‘나도 오늘 킥 감각이 괜찮고.’
아약스의 세트피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성배였다.
왼쪽에서의 코너킥과 중앙으로 올려주는 프리킥은 성배의 것이었다.
그런 자신의 킥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더욱 세트피스를 노려야 했다.
‘이 자리에서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몇 번 좋은 패스를 찔러주었고, 그것으로 감독은 만족한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성배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피나는 노력으로 만들어낸 뛰어난 체력과 강한 수비력.
거기에 15년을 구르고 여기저기 땜빵으로 뛰어다니면서 얻은 경기를 읽는 감각과 노련함.
아직 피지컬이 부족했기에 수비형 미드필더로 고전할 것은 예상했지만, 생각보다도 더 많이 헤매고 있었다.
‘아는 게 끝은 아니지.’
수비형 미드필더가 어떻게 뛰어야 하는지는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몸으로 펼쳐내는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세트피스.’
그래서 결론은 세트피스였다.
감독도 자신이 힘들어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큰 기대를 걸지 않고 몇 번의 패스 공급으로 만족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빛나기 위해서는 세트피스 밖에 없었다.
‘아무리 필드 내에서 움직임이 좋지 않았다고 해도. 어시스트 두 개면 MVP지.’
첫 골도 성배의 어시스트가 기록된 득점이었다.
여기서 두 번째 골까지 어시스트하거나 결정적인 패스를 넣어줄 수 있다면 모두가 성배에게 엄지를 들어 보일 것이었다.
***
“스네이더, 중거리 슈팅! 골키퍼 선방! 아약스가 코너킥을 얻어냅니다.”
어느새 경기 시간은 70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아약스 선수들은 조급해져만 갔다.
여전히 패스 흐름은 미묘하게 어긋났고, 그렇게 되면서 선수들은 조금씩 개인기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중거리 슈팅 빈도도 늘어나고 있었다.
‘이쯤에서 한 번 끊어줘야 해.’
코너킥을 준비하기 위해 왼쪽 측면으로 걸어가면서 성배는 마음을 다잡았다.
점점 급해지고 있는 동료들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줘야 했다.
“아약스는 지금 골이 꼭 필요한 상황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주는 코너 플래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급한 상황임에도 천천히 움직였다.
급한 상황에 오히려 더 침착하게 움직이는 자신을 보면서 동료들도 마음을 가라앉혔으면 했다.
자신이 코너킥을 준비하는 그 시간 동안 한 번 호흡을 고르기를 바랐다.
“계속 몰아치기만 하면 오히려 몰아치는 선수들이 더 지칠 수 있어요. 지금은 저렇게 적절히 시간을 끌어주는 것도 좋아 보이네요. 역시, 주성배 선수는 나이답지 않게 굉장히 노련해요.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저렇게 침착할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하죠.”
천천히 걸었지만 코너 플래그는 그리 멀지 않았다.
금방 코너킥 위치에 도착한 성배는 볼을 잡고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자신이 심호흡하는 모습을 모두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쉬었다.
‘너희도 한 번씩 해라, 좀.’
몇몇 선수들은 제자리에서 통통 뛰어보기도 하고 심호흡을 하기도 하고 스트레칭을 하기도 하면서 몸과 마음을 가라앉혔다.
성배가 원했던 그런 장면이었다.
‘좋아. 그러니까 하나 넣어보자고.’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코너킥 위치에 볼을 놓은 성배였다.
‘잘 부탁한다. 꼭 골대 안으로 들어가.’
볼을 놓기 전, 가볍게 입을 맞추며 주문을 걸었다.
그 어느때보다도 중요한 코너킥이었다.
“주, 코너킥을 준비합니다. 중앙에서는 양 팀 선수들이 치열하게 몸싸움을 펼치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스탐, 그리게라, 마두로, 로저 등 장신 선수들이 대부분 빠져있다는 게 정말 아쉽겠네요.”
스탐과 그리게라는 부상, 마두로와 로저는 주전 경쟁에서의 패배로 인해 그라운드에서 빠져야 했다.
세트피스 하나하나가 중요해진 지금 시점에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헤이팅아나 베르마엘렌은 신장에 비해 점프력이 좋아 제공권이 뛰어나고 바벨, 훈텔라르, 페레즈도 작은 키는 아닙니다. 빌렘도 긴장해야 합니다.”
어떻게든 골을 넣어야 하는 아약스 선수들과 아직은 안심할 수 없어 승점 1점이라도 따내고 싶은 빌렘 선수들.
그들은 페널티박스 안에서 치열한 자리 싸움을 벌였다.
‘후우... 킥은 얼마든지 올려줄 수 있지만, 잘 움직여줘야 할 텐데.’
세트피스에서는 킥도 킥이지만 박스 안에서 득점을 노리는 선수들의 움직임이 정말 중요했다.
킥이 아무리 정확해도 받는 선수가 편하게 슈팅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절대 득점으로 이어질 수 없었다.
-삐-익!
‘제대로 파고들어 보라고.’
플레이를 알리는 주심의 휘슬에 볼을 향해 도움닫기를 시작했다.
출발하기 직전, 한 번 고개를 들어 박스 내부를 살핀 성배의 눈에 한 선수가 들어왔다.
< 낭만필드 - 10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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