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04 >
‘한 시즌 내내 레프트백으로 뛰었는데 마지막 경기에 물 먹이네.’
아약스 소속의 풀백은 성배를 제외하면 오가라루 밖에 없었다.
그리게라와 헤이팅아, 베르마엘렌은 풀백도 가능하지만 센터백이 원래 포지션이었고, 엠마누엘슨은 이제 미드필더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자신은 마지막 경기에 미드필더로 나서야 했다.
‘우리 풀백 중에 나보다 나은 선수가 없는데. 나보다 성적이 좋은 선수도 없고.’
차라리 엠마누엘슨을 공격으로 올리고 자신에게 센터백 겸 풀백 자리를 주던가.
아니면 아예 엠마누엘슨을 배제하고 자신에게 그 자리를 주던가.
이도 저도 아닌 수비형 미드필더 출전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엠마누엘슨을 빼고 싶지 않은데, 자신의 패스가 아까워 아무 자리나 던져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자신의 롱패스가 오늘 전술의 핵심이라고 하더라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 정도로 무너질 생각도 없어.’
수비형 미드필더 역할은 분명 익숙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오직 롱패스 하나뿐이라면, 그 정도는 소화해내야만 했다.
***
“빌렘, 다시 한 번 중앙으로 길게 띄웁니다!”
아약스와 빌렘의 경기.
빌렘의 홈에서 펼쳐지는 경기였지만, 당연히 아약스가 우세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빌렘도 순순히 물러날 수 없었다.
‘너무하네, 이거.’
성배는 다시 한 번 다리에 힘을 주고 위로 뛰어올랐다.
-퍼-억!
“아! 다시 한 번 니우벤다르 선수가 볼을 따냅니다.”
성배가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했다는 것을 확인한 빌렘의 선수들은 그 이후, 성배 쪽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경기의 주도권을 완전히 내준 상황에서 빌렘이 할 수 있는 것은 한 번에 깊숙이 찔러주는 역습밖에 없었다.
그리고 제공권이 약함에도 가장 중요한 위치에 출전한 성배는 자연스럽게 상대의 타겟이 되었다.
“빌렘은 집요하게 주를 향해 공중볼 경합을 붙여주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주성배 선수의 피지컬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중원에서 상대와 맞대결을 펼칠 정도는 아니거든요?”
180cm대 초반의 신장도 작은 편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탄력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피지컬은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아쉬운 편.
성배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빌렘의 전술이 잘 통하는 이유였다.
‘징글징글하네.’
나름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아직 중원의 파이터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측면으로 빠지는 선수들은 중앙에서의 경합을 버티지 못해 밀려난 선수가 많았던 만큼, 측면 플레이어보다는 확실히 중앙 쪽 플레이어들의 피지컬이 뛰어났다.
“다비즈! 다비즈의 태클이 부타르 선수를 멀리 날려 보냅니다!”
하지만 빌렘의 공격은 항상 여기까지였다.
성배가 집중적으로 공략당할 수 있다는 것은 아약스에서도 예상한 바였다.
그리고 그 구멍을 채워줄 선수도 준비해 놓았다.
“고마워요, 에드가.”
에드가 다비즈.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어색한 포지션에서 뛰어야 하는 성배를 위해 옆에서 철저히 보조해주는 중이었다.
“뭐가. 그러니까 좀 밀리지 마라. 너무하네.”
다비즈가 투덜댔다.
그래도 경기에 출전하기 전부터 오늘 자신의 역할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로 끝내고 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그나마 에드가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네.’
우승이 결정되는 중요한 경기에 수비형 미드필더로 나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성배도 사람이라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비즈에게 보디가드 역할을 맡길 것이라는 감독의 말은 성배를 안심시켰다.
‘에드가가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적으로 만나면 좀 다른 의미로 가장 무서운 선수이지만, 같은 팀일 때는 이보다 더 믿음직할 수 없었다.
이미 예전에 전성기가 끝난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성배가 지금까지 호흡을 맞춰본 선수 중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는 중이었다.
‘아직 어색하긴 하지만. 에드가를 믿고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겠어.’
경기 초반부터 세 번 정도 상대에게 기회를 내준 성배였다.
여기서 끝나면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을 것 같았다.
다비즈의 서포트에 확신이 생긴 지금, 성배는 역습을 준비했다.
***
“아약스 입장에서는 지금쯤 한 골 정도 터지기를 바랄 텐데 말이죠.”
“승리뿐만 아니라 다득점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흐르는 시간이 굉장히 아쉬울 것 같습니다.”
순식간에 끝난 빌렘의 역습 이후 아약스가 또 볼을 잡았다.
다비즈는 성배에게 볼을 밀어주고는 주변에서 눈을 부라리며 빌렘 선수들의 접근을 견제했다.
오늘 경기에서 성배는 딥라잉 플레이메이커, 즉, 레지스타 역할을 맡은 것이었다.
‘롱패스는 좀 하는 편이지만... 팀의 패스 줄기를 책임질 정도는 아닌데.’
이 역할은 좀 부담스러웠다.
자신의 롱패스는 분명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하지만 롱패스 정확도가 뛰어난 것일 뿐, 패스 자체가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패스 센스나 시야도 괜찮은 편이기는 하지만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깔끔하지만 평범한 패스밖에 없는데.’
지금의 전술에서 맡은 성배와 다비즈의 관계는 AC 밀란의 피를로-가투소의 관계와 비슷했다.
리그 수준을 감안했을 때, 가투소와 다비즈는 비슷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해도 성배는 피를로와 비슷한 플레이를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여기에는 베슬리가 있으니까.’
성배는 그나마 자신 있는 깔끔한 킥으로 스네이더에게 볼을 투입해 주었다.
성배에게 피를로와 같은 모습을 기대하고는 있었지만, 몇몇 장면을 기대하는 것뿐이었다.
아약스의 플레이메이커는 스네이더였다.
“주, 스네이더에게 볼을 투입합니다.”
“깔끔한 패스죠? 확실히 킥에 장점이 있는 선수예요.”
사실 깔끔한 패스를 넣어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꽤 메리트가 있었다.
수비형 미드필더 중에서는 이 정도의 패스도 못하는 선수가 수두룩했다.
레프트백으로서 워낙 높은 곳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성배 자신이 만족하지 못할 뿐, 수비형 미드필더로도 충분히 쓸만한 수준은 되었다.
“스네이더, 전방을 주시합니다! 긴장하고 있는 빌렘 수비진!”
프리킥과 중거리 슈팅 등 공격적인 재능을 뽐내며 이번 시즌 열여덟 골을 득점한 스네이더였다.
날카로운 패스를 활용한 어시스트 능력과 폭발적인 득점력, 절묘한 공간 침투 능력까지 갖춘 스네이더를 막는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왼쪽으로 패스! 페레즈가 돌파합니다!”
스네이더의 선택은 왼쪽 측면의 페레즈였다.
절묘하게 파고든 페레즈의 움직임에 맞춘 스네이더의 패스가 빌렘의 페널티박스를 갈랐다.
“얀스의 태클! 태클로 페레즈의 돌파를 저지합니다!”
하지만 페레즈의 돌파는 빌렘의 라이트백, 옌스 얀스의 태클에 막혔다.
몸을 날린 얀스가 절묘한 태클로 페레즈는 건드리지 않고 볼만 걷어낸 것이었다.
‘내 거다.’
하지만 그 볼은 박스 바깥에서 대기하던 성배에게로 향했다.
자신에게 볼이 날아오는 것을 확인한 성배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전방을 빠르게 훑었다.
‘어비, 라이언, 헌터...’
페레즈의 볼을 받아주기 위해 왼쪽 측면을 파고들었다가 중앙으로 방향을 바꾼 엠마누엘슨.
중앙의 바벨과 훈텔라르.
세 선수가 성배의 패스를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직접 슈팅할 수 있는 각도 역시 나와 있는 상태였다.
‘하나 만들어 봐라.’
하지만 성배는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이미 한 선수가 수비를 떨쳐내고 움직이고 있었다.
“아! 논스톱으로 로빙 패스! 엠마누엘슨!!”
성배의 선택은 엠마누엘슨이었다.
뒤에서부터 달려와 상대 측면 미드필더를 따돌린 엠마누엘슨이었고, 그를 막아야 할 얀스는 태클 후 넘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노마크 상태.
그런 엠마누엘슨에게 패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슈팅! 골! 골입니다!! 통렬한 엠마누엘슨의 왼발 슈팅이 빌렘의 골망을 흔듭니다!”
돌파해 들어가는 엠마누엘슨의 왼발에 맞춘 패스였다.
득점력이 뛰어난 선수가 아니라고 해도 프로라면 대부분 넣을 수 있는, 그런 절묘한 패스였고, 엠마누엘슨 역시 손쉽게 득점을 올려주었다.
“드디어 아약스의 첫 골이 터집니다! 전반 19분입니다!”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PSV와 비테세의 경기는 2-1로 PSV가 리드를 잡고 있고, AZ와 엑셀시오르의 경기는 아직 0-0인데요, 이렇게 되면 아약스가 1위로 올라섰어요!”
중계를 하는 방송사도 세 경기의 정보를 동시에 받고 있었다.
이 세 경기의 결과에 따라 이번 시즌의 우승팀이 정해지기 때문이었다.
“전반 10분 만에 두 골을 터뜨렸던 PSV는 이후 3분 만에 추격 골을 허용했네요. 골 득실에서 가장 밀리고 있는 PSV이기 때문에 마음이 급하겠죠!”
에레디비지에 생존 경쟁을 펼치는 클럽과 동기 부여가 없는 클럽.
이런 차이가 있다고는 해도 사실 세 팀 모두 승리할 확률이 가장 높았다.
골 득실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말씀드리는 순간, 의외로 엑셀시오르가 선취 골을 터뜨렸어요! AZ, 3위로 밀려나죠?”
우승을 결정짓는, 시즌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34라운드답게 경기 초반부터 손에 땀을 쥐는 상황이 연이어 펼쳐졌다.
현재 상황은 아약스가 승점 75점에 골 득실 +48, PSV가 75점에 +47, AZ가 72점에 +52였다.
***
‘이거 좋지 않은데...’
선취 골을 넣었고, 점유율도 확실히 우위에 있는 아약스였지만, 경기가 진행될수록 성배는 불안해졌다.
아약스의 플레이가 미묘하게 어긋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아약스가 경기를 주도하고 있지만, 결정적인 장면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경기를 지켜보는 모두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계속 조금씩 어긋나는 모습이 보이죠? 선수들 사이의 호흡이 아주 약간씩 계속 어긋나요.”
개인기량의 우위로 인해 경기의 주도권은 놓치지 않았지만, 확실히 평소보다 조금 무딘 느낌이었다.
직접 받아보는 선수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조금씩의 어긋남이 패스에서 나타나고 있었고, 이 미묘한 차이는 다음 플레이에 영향을 끼쳤다.
‘전술은 좋은데. 훈련이 너무 부족했어.’
최대한 공격에 많은 숫자를 참여시키기 위한 전술이었다.
센터백으로 나선 헤이팅아와 엠마누엘슨은 공격 시 풀백처럼 움직였다.
양 측면에서 오버래핑을 활발히 해준 것이었다.
엠마누엘슨이 올라가면 헤이팅아는 내려오고, 헤이팅아가 올라갈 때는 반대였다.
이런 식으로 공격 숫자를 최대한 늘렸지만, 이론과 실전은 달랐다.
‘이런 전술은 많은 훈련이 필요한데. 쯧.’
정석에서 벗어난, 변칙전인 전술일수록 많은 훈련이 필요했다.
하지만 오늘의 이 전술은 지난 경기가 끝나고 고작 일주일 정도 훈련한 것이 전부였다.
그 정도 훈련으로 이 전술을 꺼내 든 것은 케이테 감독의 실책이었다.
‘익숙해질수록 먹히지도 않을 텐데.’
그리고 이 전술은 어디까지나 일회용이었다.
최소한 두 명의 수비수를 남긴다고는 하지만, 일반적인 쓰리백과 달리 수비 숫자가 적었다.
수비수가 측면 공격까지 가담하는데 절대적인 수비 숫자까지 적다. 이것은 곧 역습에 취약하다는 뜻이었다.
“아두이르의 중간 차단! 빌렘, 역습에 나섭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엠마누엘슨이 오버래핑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상대 선수에게 볼을 빼앗기고 말았다.
헤이팅아도 올라가다가 엠마누엘슨을 발견해 이제 막 내려가려는 상황이었다.
“빌렘의 결정적인 찬스! 아약스, 위험합니다!”
최대한 다득점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실점까지 하게 되면 너무 큰 타격이었다.
아약스 선수들도 모두 이를 알고 있었기에 사력을 다해 수비진영으로 복귀했다.
‘내 선에서 절대로 끊어야 한다.’
다비즈와 성배가 나서야만 했다.
수비형 미드필더 라인에서 이를 막아내지 못하면 바로 결정적인 실점 위기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 낭만필드 - 10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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