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02 >
아약스 우승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PSV는 핵심 선수들의 부상에 허덕이고 있었다.
특히나 대체할 수 없는 센터백 자원인 알렉스를 비롯해 부상자들이 수비진에 집중되어 있어서 수비라인이 붕괴된 상황이었다.
선수들이 지쳐가는 시즌 후반, 부상의 마수에서 아약스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야콥도 없고 즈데넥도 없군.’
성배는 그라운드를 주욱 훑어보았다.
앞쪽 라인에는 부상자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자신과 함께 라인을 이루고 있는 수비진에서는 두 명의 주전 수비수가 아웃된 상태였다.
‘그런데 오히려 경기력이 더 좋은 것 같은데...’
부상으로 빠진 선수는 스탐과 그리게라.
이번 시즌 아약스의 구상에서 수비진의 핵심이었던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두 선수가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약스의 경기력은 평소보다 더 나은 모습이었다.
‘그러게... 포백을 썼어야 한다니까.’
두 명의 센터백이 아웃되면서 아약스는 자연스럽게 포백을 활용해야 했다.
헤이팅아와 베르마엘렌을 중앙에 두고 오가라루를 오른쪽에, 성배를 왼쪽에 둔 포백 라인은 쓰리백과 비교해도 전혀 차이가 없는 수비력을 보여주었다.
주축 자원들의 부상과 체력저하로 어쩔 수 없이 포백을 활용한 후반기 성적이 더 좋은 것만 봐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다음 시즌에는 시작부터 포백으로 가자고.’
물론, 케이테 감독에게 시간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보통 한 감독이 자신의 전술을 팀에 완벽히 이식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두 번째 시즌을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선수들이 전술에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미 아약스 선수들은 포백에 익숙해져 쓰리백을 낯설어했다.
‘뭐, 그건 나중에 신경 쓰고.’
성배는 전광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약스 암스테르담 2 : 0 스파르타 로테르담]
그리고 조금 더 고개를 돌려 전광판 시계를 쳐다보았다.
[19:21]
경기 시작 후 20분이 채 되지 않아 벌써 두 골을 터뜨린 아약스였다.
게다가 홈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을 받으며 치르는 홈경기.
아약스가 승기를 확실히 굳혀놓은 상황이었다.
‘그래도 이대로 끝낼 수는 없지.’
승리가 확신한 상황에서는 안전한 플레이를 지향했던 시즌 초반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우승컵을 놓고 경쟁하는 세 팀의 승점이 모두 비슷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골을 넣어야만 했다.
‘역시. 그런 주문이 들어올 줄 알았지.’
성배의 예상대로 벤치에서도 비슷한 플레이를 요구했다.
수비라인을 높이 올리고 양 측면 풀백들에게 적극적인 공격을 요구한 것이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한 번 제대로 저어주지.’
시즌 3골 9어시스트.
지난 시즌과 같은 개수였다.
어시스트 한 개를 더 추가해서 깔끔하게 두 자릿수로 넘어가고 싶기도 했고, 지난 시즌의 기록을 넘어서고 싶기도 했다.
‘공격 포인트 한 개 정도는 따오자고.’
감독의 지시가 떨어진 이상 거칠 것은 없었다.
성배가 오랜만에 공격 포인트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
“허억, 허억... 제길.”
세상일이라는 건 참 신기했다.
의도하지 않을 때는 잘 돌아가다가도 뭔가 마음을 먹고 제대로 해보려고 하면 꼭 방해가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공격에 집중하라는 감독의 지시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스파르타를 압도했던 아약스였지만, 감독의 지시가 떨어진 이후 경기가 요상해졌다.
‘벌써 두 번째 실점인가.’
[아약스 암스테르담 3 : 2 스파르타 로테르담]
전반 27분에 세 번째 득점을 기록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분위기가 좋았다.
스네이더와 훈텔라르의 콤비 플레이를 통해 훈텔라르의 리그 20호 골이 터진 것이었다.
그렇게 3-0으로 리드를 잡았을 때, 아약스 선수들은 물론이고 홈팬들까지도 승리를 확신했다.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금방 이렇게 되어버리니...’
객관적으로 아약스 선수들과 스파르타 선수들 사이의 기량 차이는 확실히 있었다.
그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스파르타 선수들도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 무대에서 뛰고 있었고, 그 정도 기량이라면 빈틈이 보였을 때 공략할 정도는 된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아약스는 스파르타에게 빈틈을 보였다.
‘제길. 너무 신을 냈나.’
전반 종료 직전, 스파르타의 윙어 부오잔에게 실점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아약스 선수들이었다.
한 골을 허용하면 두 골을 넣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후반 시작과 동시에 다시 한 번 실점하면서 한 골 차로 따라잡히자,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아. 플레이가 그다지 좋지 못해.’
성배의 시선이 반대편 측면으로 향했다.
“조르제! 공격도 좋지만 네 스피드를 생각해야지! 발이 느린데 그렇게 높이까지 나가면 어떡하자는 거야!”
다른 선수들도 같은 생각인듯했다.
헤이팅아가 라이트백으로 경기에 나선 오가라루에게 쓴소리를 던졌다.
스피드가 별로 빠르지 않은 오가라루였지만, 스피드는 물론이고 오르내리는 타이밍이 뛰어나다고 평가되는 성배와 같은 라인까지 올라간 것이었다.
이는 스파르타의 선수들에게 계속 뒷공간을 내주는 결과로 이어졌다.
“벌써 두 골 모두 오른쪽이 뚫려서 실점한 거야, 조르제. 조금 더 신경을 써줘.”
베르마엘렌 역시 오가라루에게 한 마디 던졌다.
확실히 오른쪽 수비가 헐거워지면서 아약스의 수비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뭔가 보여주고 싶기도 하겠지.’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헤이팅아와 베르마엘렌이 이미 한마디씩 했고, 굳이 얼굴 붉히고 싶지도 않았기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가라루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위치가 불안하기도 하겠지.’
아약스에서 전문 라이트백은 오가라루가 유일했다.
그런데 이번 시즌 라이트백으로 가장 많이 출전한 선수는 열두 경기의 헤이팅아였다. 다음이 다섯 경기의 성배, 그다음도 네 경기의 그리게라였다.
나머지 경기들도 대부분은 쓰리백이라 라이트백이 없었던 경우였고, 오가라루가 선발로 출전한 경기는 세 경기에 불과했다.
‘확실히 공격 쪽이 임팩트를 남기기 좋은 건 알지만...’
한 경기로 확실한 눈도장을 받으려면 공격 포인트를 올리는 것이 가장 편했다.
상대가 강팀이 아니었기 때문에 수비에서는 큰 임팩트를 남길 수 없었다.
입지가 불안한 오가라루의 마음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조급함이 망쳤어.’
차라리 무리하지 않고 본인의 장점을 보였으면 언제고 기회를 받을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야심차게 던진 승부수가 실패로 끝나면서 감독이나 팬의 신임을 잃게 되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리턴은 없고 리스크만 떠안았어.’
오가라루에 대한 생각은 이걸로 끝이었다.
남은 것은 이 경기를 어떻게든 승리로 이끄는 것.
그리고 어떻게든 다시 골 득실에 유리한 경기로 만드는 것이었다.
***
‘지금 이럴 시간이 없는데.’
경기가 한 골 차의 시소게임 양상으로 흘러가기 시작한 이상 아약스도 계속 라인을 끌어올릴 수는 없었다.
오히려 짧은 시간 동안 두 골을 몰아치며 분위기가 좋아진 스파르타 쪽에서 적극적으로 공격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번만 걸려라.’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성배의 눈은 상대 진영을 향해있었다.
기분을 내기 시작한 스파르타였지만, 철저한 전술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감정의 흥분으로 인한 것이었다.
즉, 겉으로 보면 분위기가 좋아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삐걱대는 부분들이 많았다.
‘걸리기만 하면 한 번에 보내주지.’
여기서 한 골을 더 넣어 도망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경기는 끝난다.
성배는 그렇게 확신했다.
‘한 번만 실수해라.’
양 팀 모두 실수를 하지 않으면 0-0으로 끝나는 경기.
미셸 플라티니가 축구에 대해 내린 정의였다.
반대로 말하면 골이 터지는 모든 경기에서는 누군가 실수를 범했다는 말이었다.
‘이거다!’
그리고 그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공격적으로 나오던 아약스가 살짝 라인을 내리자, 그새 아약스의 무서움을 잊었는지 안일한 패스를 시도한 것이었다.
‘다시 무서움을 알려주지.’
뒤로 물러나며 선수를 마크하던 성배가 빠르게 달려들었다.
중간에 볼을 끊어내기로 한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상대 공격수가 깜짝 놀라 달려왔다.
‘충분히 붙어볼 만해.’
이대로 가면 볼을 따내기 위해서는 공중에서 경합을 펼쳐야 했다.
이전이었다면 극도로 꺼렸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지도 몰랐던 선수한테까지 밀리지는 않아!’
볼을 향해 전력으로 달렸던 성배는 다시 한 번 전력으로 뛰어올랐다.
상대 선수는 경기를 앞두고 조사하기 전까지 이름도 몰랐던 선수였다.
이제 피지컬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선수가 아니면 성배와의 몸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기 쉽지 않았다.
‘좋아!’
게다가 먼저 출발한 성배가 좋은 위치를 잡은 상황이었다.
함께 뛰어오른 상대 공격수는 뒤로 밀리며 중심을 잃었고, 볼은 성배의 앞에 떨어졌다.
“뛰어!”
성배의 말에 아약스 공격수들이 일제히 출발했다.
살짝 공격의 고삐를 늦춘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수비적으로 돌아선 것은 아니었다.
공격수들은 정위치에 있었고, 성배의 외침에 달려나간 순간 이미 위험지역이었다.
‘어디냐.’
왼쪽에서 파고드는 바벨.
중앙에서 파고드는 훈텔라르.
오른쪽에서 파고드는 데 뮬.
떨어진 볼을 쫓아가는 두 발자국 동안 빠르게 전방을 훑었다.
‘저기다!’
그리고 두 발자국 내에 판단을 내렸다.
볼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성배는 왼발을 내려 강하게 땅을 디디고 오른발을 휘둘러 바운드된 볼을 걷어찼다.
‘좋아.’
성배의 패스는 오른쪽에서 파고드는 데 뮬의 발밑으로 정확히 이어졌다.
데 뮬이 중앙으로 움직인다는 것까지 정확히 계산한 패스였다.
‘남은 건 톰이 골까지 연결할 수 있냐는 건데...’
바벨과 훈텔라르는 그 명성이 높았기 때문에 스파르타 선수들의 수비가 비교적 견고했다.
그에 비해 데 뮬은 이번 시즌이 첫 풀타임 시즌이었다.
활약상 또한 둘과 비교하면 분명 떨어지는 감이 있었고, 수비수들의 견제도 비교적 약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만큼 기량은 떨어졌기에 득점까지 이어줄 수 있다는 확신은 덜했다.
‘제발 좀 넣어라.’
패스가 깊고 정확하게 들어갔기에 득점까지 이어갈 경우 충분히 어시스트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번에 어시스트를 기록하면 시즌 10호였다.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럴 때마다 짜증 나는 건 어쩔 수 없네.’
성배가 아무리 정확한 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누군가 마무리 지어줄 선수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시즌에도 실질적으로 기록된 것만큼의 어시스트를 동료들이 날려 먹었다.
그나마 아약스가, 훈텔라르가, 바벨이 에레디비지에 맨 꼭대기에 올라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였다.
‘패서의 한계지.’
가진바 능력이 마무리보다 과정에 집중되어있는 선수들의 숙명이었다.
모든 플레이는 마무리가 되어야지만 스탯으로 이어졌다.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패서들의 스탯은 피니셔들의 능력에 달려있었다.
‘제발...’
데 뮬이 마지막 슈팅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성배는 저 슈팅이 들어가기를 간절히 빌었다.
자신의 스탯도 스탯이었지만, 팀의 승리도, 과장하면 팀의 우승도 저 슈팅에 달려있었다.
< 낭만필드 - 10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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