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101화 (76/356)

< 낭만필드 - 101 >

‘백업 선수들은 체력이 남아돈다, 이건가?’

경기 시작 직후에 선취 골을 허용한 RKC는 많이 뛰는 압박 전술을 들고 나왔다.

특이한 것은 베르통헨처럼 주전으로 뛰는 선수들은 많이 뛰지 않고, 백업 선수들 위주로 압박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강등권 팀에서도 백업으로 뛰는 선수들의 압박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일반적인 선수들이었다면 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비즈, 헤이팅아, 베르마엘렌 등 정상권에서 놀았거나 정상권으로 올라갈 선수들로 구성된 아약스 수비진이 그런 허술한 압박에 고전할 리 없었다.

‘그렇지! 제대로 빠졌어.’

오히려 상대의 압박으로 생긴 뒷공간을 노려 절묘한 패스워크를 이어가는 아약스였다.

베르마엘렌의 패스가 성배에게 이어졌고, 성배는 다시 전방의 바벨에게 패스했다.

“리턴!”

상대의 압박을 간단하게 패스로 무력화시킨 성배는 중앙으로 이동하며 바벨에게 패스 코스를 만들어주었다.

바벨도 원터치로 성배에게 볼을 돌려주었고, 강하게 압박했던 RKC의 윙어는 성배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베슬리!’

바벨과의 2-1 패스로 상대 압박을 뚫어낸 뒤, 다시 볼을 넘겨받은 성배는 수비수를 등지고 버티며 볼을 기다리는 스네이더를 발견했다.

‘아무리 볼 키핑이 약해도...’

스네이더는 분명 볼 키핑에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수준에 비해 약하다는 것이지, RKC 정도의 클럽을 상대하면서도 그 약점이 드러난다는 것은 아니었다.

성배는 스네이더를 믿고 그에게 볼을 밀어주었다.

‘지금은 내가 올라가야겠네.’

바벨이 자신과 볼을 운반하기 위해 밑으로 내려가 있었다.

스네이더 역시 볼을 받아주기 위해 내려온 상황이었다.

자신의 움직임에 맞춰 바벨은 중앙으로 움직였고, 훈텔라르는 반대편으로 이동해 있었다.

[우와아아아!!]

스네이더에게 볼을 넘겨준 성배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중앙 쪽으로 돌아서 왼쪽 측면을 파고들었다.

성배의 움직임에 아약스 홈 관중들의 환호가 따라붙었다.

‘저거...’

볼을 잡고 있는 스네이더가 불안했다.

RKC 수비형 미드필더 오보다이의 압박에 휘청이는 모습이었다.

‘역시. 믿고 있었다고.’

하지만 다음 순간, 손으로 오보다이를 견제하면서 공간을 만들어낸 스네이더는 넘어지면서 다리를 휘둘렀다.

그 패스는 절묘하게 RKC 선수들 사이를 가르며 왼쪽 빈 공간, 성배가 있는 곳으로 투입되었다.

‘비켜라, 다친다.’

멀더도 볼을 향해 달려왔지만, 성배가 한발 앞섰다.

달리던 방향 앞으로 비집고 들어가 먼저 볼을 차지한 성배 때문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 멀더는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성배의 돌파를 막기 위해서는 중앙 수비수가 내려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 조금 더 와라.’

성배는 침착하게 전방을 주시했다.

중앙에서 파고드는 바벨, 중앙보다 살짝 오른쪽으로 빠져 움직이는 훈텔라르가 보였다.

그리고 상대 수비수는 두 명.

하지만 바벨이나 훈텔라르를 막기에는 무리가 있는 위치였다.

‘이건 누굴 줘도 넣겠는데?’

행복한 고민.

누굴 줘도 넣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왕이면 확실한 쪽으로 줘야지.’

성배의 왼발이 움직였다.

상대 중앙 수비수가 달려왔지만, 성배의 킥을 막기에는 무리였다.

빠르고 낮게 감아올린 성배의 크로스는 중앙을 지나 반대편의 훈텔라르에게로 향했다.

‘조금 더 자유로우니까.’

수비수와의 거리가 훈텔라르 쪽이 더 멀었다.

성배의 크로스가 올라가는 동안 바벨은 상대 수비수에게 앞쪽을 잡혔고, 그 모습에 성배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확신했다.

[우와아아아!!!]

‘이번 건 좀 멋졌다.’

그리고 예상대로 훈텔라르의 두 번째 득점이 터졌다.

최후방에서부터 최전방까지, 그리고 득점까지 순식간에 이어진 시원한 플레이에 관중들의 함성이 따라왔다.

성배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이번 플레이는 좀 멋졌던 것 같았다.

“멋진 돌파였어, 주.”

성배 덕분에 또 한 번 득점에 성공한 훈텔라르는 골을 확인하고 바로 성배에게 달려왔다.

오늘 두 골을 만들어준 성배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골이 곧 몸값이 되는 공격수에게 멋진 패스를 공급해주는 선수는 귀한 존재였다.

“뭘. 네 움직임이 좋았으니 당연한 거지.”

성배에게도 자리를 잘 잡아주는 공격수가 필요했다.

자리만 잘 잡아주면 바로 득점을 만들어줄 자신이 있었다.

어시스트 능력이 있는 풀백임을 증명하기에 훈텔라르만큼 좋은 선수도 없었다.

***

경기 막판, 암스테르담 아레나에 홈팬들의 탄식이 울려 퍼졌다.

“괜찮아,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성배는 헤이팅아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볼은 아약스의 골대 안에서 구르고 있었고, 헤이팅아는 그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래. 어차피 토너먼트인데 한 골 정도는 줘야지. 그게 사람 사이의 정 아니겠냐.”

스테켈렌부르크도 헤이팅아를 위로했다.

“아아, 위로하지 마. 더 슬퍼지니까.”

헤이팅아는 여전히 쭈그려 앉아있었다.

조금 전의 실점은 헤이팅아의 자책골로 인한 실점이었다.

측면에서 올라온 빠른 크로스를 막아내기 위해 발을 뻗은 것이 굴절되어 아약스의 골문에 볼을 밀어넣은 것이었다.

“실없는 소리 계속하는 거 보니까 살만한가 보네.”

성배는 헤이팅아의 말에 위로를 그치고 일어섰다.

장난기가 느껴지는 말을 내뱉는 걸 보면 별 타격은 없는 듯했다.

[아약스 암스테르담 4 : 1 RKC 발베이크]

완승이었다.

성배의 어시스트 두 개와 그 어시스트를 독식한 훈텔라르의 두 골이 터진 순간, 경기는 이미 아약스 쪽으로 기울었다.

승리를 확신한 케이테 감독은 리그 경기를 위해 공격의 핵심인 훈텔라르와 바벨, 스네이더를 빼주었다.

그리고 페레즈, 미테아, 사퐁 등 벤치 선수들을 투입했다.

페레즈는 몰라도 미테아나 사퐁은 이번 시즌 거의 출전하지 않았던 선수들이었고, 다음 시즌에도 함께 할지, 아니면 이대로 헤어질지 결정하기 위한 시험대에 올랐다.

‘확실히 물건은 물건인데...’

훈텔라르의 두 골 이후, 나머지 두 골은 미테아와 페레즈에게서 나왔다.

30분의 시간을 얻은 페레즈는 오늘도 한 골을 추가했다.

거의 출전할 때마다 한 골 이상을 뽑아주고 있는 페이스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백업.

“한 골 먹었어도 문제는 없으니까 하던 대로 하자고.”

어느새 타격에서 회복한 헤이팅아가 힘차게 외쳤다.

리그 경기를 위해 핵심 선수들을 교체시켜주었지만 세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선수들도 성배나 헤이팅아, 베르마엘렌, 다비즈 등 적지 않은 선수들이 꼭 필요한 핵심이었다.

승기를 확실히 잡은 이후에는 체력을 아끼기 위해 많이 뛰지 않고 있었다.

“오케이. 그건 알겠는데, 네가 그런 말을 하기에는 너무 뻔뻔하다는 생각 안 하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저앉아있던 헤이팅아의 돌변에 어이가 없었는지 베르마엘렌이 한 마디 건넸다.

사실상 멘토에 가까웠기 때문에 헤이팅아의 바보짓에 관대한 베르마엘렌이 그런 말을 했을 정도였으니 다른 선수들의 심정은 알만했다.

“몰라. 내가 주장이야.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하하.”

‘자책골을 넣더니 민망해서 어쩔 줄 모르는군.’

허리에 손을 얹고 오버해서 웃는 헤이팅아의 모습을 보면서 성배는 웃음을 흘렸다.

***

“역시 이번 시즌에는 만만치 않네.”

4강에서 만난 RKC를 4-1로 가볍게 꺾은 아약스 선수들은 다음날 휴식을 취했다.

휴식을 받았지만, 덮어놓고 쉬지 않은, 방금 한 마디 내뱉은 헤이팅아를 비롯한 몇몇 선수들은 함께 모여 결승 상대가 결정될 반대편 준결승전을 분석했다.

AZ 알크마르와 NAC 브레다의 경기였다.

“아무리 NAC가 강팀은 아니라지만, 6-0은 너무한 거 아냐?”

AZ은 이번 시즌 무서운 기세를 보이며 리그 2위에 올라있는 팀이고, NAC는 10위에 올라있는 평범한 팀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6-0의 스코어는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너무 총력전으로 나온 것 같은데. 리그에서도 지금 급하잖아.”

베르마엘렌의 말에 나머지 선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시즌 굉장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AZ라고는 하지만, 에레디비지에의 특성, 그리고 AZ 자체의 자금력의 한계로 인해 스쿼드가 두꺼운 편은 아니었다.

아약스, PSV와는 그 차이가 확연했다.

그럼에도 AZ는 베스트 전력을 총출동시켜 NAC를 상대했다.

“그러게. 우리는 물론이고 부상 타격이 큰 PSV도 그나마 굴러가고 있는데.”

6-0의 승리로 기분은 좋을 수 있겠지만, 승리를 거두면 모두 똑같은 토너먼트였다.

이 정도의 차이가 나타났다는 것은 쓸데없이 전력을 낭비했다는 뜻과 같았다.

“그만큼 우승이 절박하다는 거겠지. 우승 못 한지 한참 되었으니.”

가만히 이들의 말을 듣고 있던 성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음... 그런가? 하긴, 내가 기억하는 선에서는 AZ가 우승한 적이 없긴 하지.”

오늘 모인 선수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스테켈렌부르크였다.

그런 스테켈렌부르크도 고작 스물넷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이 자리에는 그 이상의 경험을 가진 선수가 없었다.

“AZ의 무사에게 들었는데, 81/82 KNVB 베이커 우승이 마지막이라고 하던데.”

성배는 AZ의 마지막 우승 기록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대표팀 동료인 무사 뎀벨레가 AZ에서 뛰고 있었고, AZ의 우승이 가시권에 들어온 이후 항상 그 이야기를 입에 달고 다녔다.

얼마 전 포르투갈과의 경기를 위해 모였을 때도 그 이야기를 들었으니 정확한 정보였다.

“그러면 올해로 딱 25년 째네. 그럼 그럴 수 있지.”

헤이팅아의 말에 나머지 선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려 25년이나 우승 트로피를 차지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에레디비지에 우승컵이든 KNVB 우승컵이든 뭐라도 하나는 꼭 가지고 싶을 것이었다.

“그다지 좋은 선택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성배가 말을 덧붙였다.

아무리 그래도 6-0으로 이길 수 있는 경기에 전력을 투입한 건 무리수였다.

이번 시즌, AZ에서 리그 20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는 정확히 열한 명에 불과했다.

물론, 지금까지 보여준 경기력을 봤을 때, 가까운 시일 내에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안정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확실히 눈앞에 무언가 보이기 시작하면 그전까지 훌륭한 선택을 하던 사람도 흔들리는 법이지.’

AZ의 현재 감독은 명장으로 유명하지만, 괴장으로 더 유명한 감독.

루이스 판 할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 본인의 커리어를 거하게 말아먹고 재기를 노리는 그에게 25년 만의 우승컵이라는 업적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열매일 것이었다.

“판 할은 분명 더블을 노리고 있을 거다.”

성배는 확신할 수 있었다.

리그에서는 1위에 승점 2점을 뒤진 압도적인 골 득실의 2위, 리그컵에서는 결승에 올라 있었다.

루이스 판 할의 성격이라면 더블을 이루면서 한 번에 명예를 회복하고 싶어 할 것이었다.

“뭐? 더블은 우리 거 아니었나?”

성배의 말에 헤이팅아가 고개를 돌려 다른 선수 한 명 한 명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럼. 당연히 우리 거지.”

“굳이 말할 필요가 있나? 입 아프다고.”

아약스 선수들도 더블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잡음이 있었고, 불만도 많았지만, 선수들의 분전 덕분에 성적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리그 우승을 노리는 세 팀 중에는 가장 불리했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KNVB 베이커 역시 결승에 오른 상황이었다.

아약스에게도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렇다는데?”

헤이팅아가 성배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허.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성배도 마주 웃어주었다.

< 낭만필드 - 101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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