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00 (4권) >
“최소한 우승컵 하나는 들어야지! 오늘, 무조건 이기고 데 큅으로 간다!”
KNVB 베이커 준결승전을 앞두고 주장인 헤이팅아가 선수들 앞에서 연설을 시작했다.
PSV와의 라이벌전에서 5-1의 믿기지 않는 대승을 거둔 아약스는 이후 이어진 세 경기에서 2승 1무로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다.
현재 에레디비지에 우승을 놓고 다투는 클럽은 총 세 팀.
승점 71점의 PSV와 69점의 AZ, 그리고 아약스였다.
전반기 17경기 동안 46점의 승점을 쌓으며 39점의 AZ과 38점의 아약스를 크게 따돌렸던 PSV는 후반기 들어서 주전들의 줄부상이라는 악재를 만나며 추격을 허용한 상황이었다.
“에레디비지에 우승컵도 당연히 노린다! 그래도! KNVB 우승컵도 놓칠 수는 없다고!”
우승 경쟁을 펼치는 세 팀 중 가장 불리한 클럽은 아약스였다.
승점에서는 PSV에게 2점 뒤지고, 승점이 같은 AZ에게는 골 득실에서 7골을 뒤졌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리그 우승컵에 대한 욕심을 살짝 접어둬야지.’
최선을 다해 뛰기는 하겠지만, 리그 우승컵은 일단 물 건너갔다고 봐야했다.
아직 가능성은 있지만, PSV가 전반기에 쌓아놓은 승점과 AZ의 현재 기세가 너무나 무서웠다.
아약스는 마지막까지 단단하게 뭉치지 못했고, 선수들과 케이테 감독은 여전히 거리를 두고 있었다.
‘쯧. 확실히 아무나 감독을 하는 건 아니야.’
케이테 감독의 뛰어난 전술적 역량은 미약한 선수단 장악력으로 인해 빛을 발하지 못했다.
그래도 선수단의 기량이 뛰어났고, 경쟁자들이 주춤해주면서 어거지로 우승 경쟁에는 합류해 있었다.
KNVB 베이커에서 우승 트로피라도 가져와야 다음 시즌에도 아약스의 지휘봉을 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리그에서 한 대 맞은 거 복수해야지. 다들 이 악물고 뛰라고.”
스네이더도 한 마디를 보탰다.
4강 상대인 RKC 발베이크에게 지지난 라운드에서 2-2 무승부를 허용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 경기만 아니었다면 PSV와 승점이 같았을 것이었다.
아약스 입장에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오늘 경기는 결승 진출이 걸린 경기이기도 하면서 아약스의 자존심이 걸려있는 경기이기도 했다.
***
“살살 하자, 살살.”
경기 시작 전, 베르통헨과 성배, 베르마엘렌, 그리고 톰 데 뮬이 모여 짧게나마 수다의 꽃을 피웠다.
남자들도 모이면 접시 하나쯤은 우습게 깰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살살은 무슨. 리그에서 네가 살살했냐? 각오하라고.”
베르통헨의 엄살에 베르마엘렌이 일침을 가했다.
RKC 발베이크로 임대되어 이동한 베르통헨은 첫 경기를 제외하고 현재까지 RKC의 모든 경기에 선발로 출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경기에서 풀타임으로 활약했다.
“요즘 잘 나가던데? 네 칭찬도 엄청나더라.”
뮬의 말처럼 베르통헨의 주가는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베르통헨이 수비라인에 합류하기 전까지 RKC의 성적은 2승 7무 12패로 리그 최하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 기간의 실점은 42실점.
하지만 베르통헨이 합류한 이후 열한 경기에서는 4승 1무 6패로 나름대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실점도 16실점에 불과했다.
“이러다가 다음 경기부터 국가대표팀에서도 볼 수 있게 되겠네.”
베르마엘렌이 과장된 몸짓으로 반가움을 표시했다.
실제로 지금 정도의 활약이라면 충분히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을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렇겠지. 드 망이나 클레멘트보다는 나은 것 같으니까.”
성배도 한마디 거들었다.
안 그래도 지난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0-4로 대패한 이후, 벨기에 내에서는 수비라인의 새로운 얼굴을 발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물론, 콤파니와 베르마엘렌이 복귀하면 두 선수가 당연히 주전이었다.
불의의 일이 생겨서 주전 수비수 중 누군가 출전하지 못하게 되었을 경우, 그 자리를 채울 선수로 다른 얼굴을 발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드 망은 아직 어리지만, 재능이 없어. 클레멘트는 이미 기회를 많이 받았고. 그들이 빠지고 새로운 얼굴을 뽑아야 한다면, 그 자리는 얀이 가져가야지.”
길게 말하지 않는 성배의 성격상, 이 정도로 길게 말했다는 것은 100%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성배의 말에 나머지 선수들은 어색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왜?”
“아니, 뭐. 드 망이랑 같은 팀에서 뛰었었잖아. 너무 칼같이 냉정한 게 아닌가, 싶어서.”
또 뭐라고.
프랑스계가 중심인 브뤼셀 지역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프랑스계인 드 망보다 네덜란드계인 베르통헨을 지지한다는 것에 놀란듯했다.
“얼마나 뛰었다고. 드 망이랑 오래 뛰지도 않았고, 별로 부딪힐 일도 없었는데.”
드 망과는 그다지 접점이 없었다.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고, 그렇다는 말은 성배가 그에게서 가능성을 보지 못했다는 말과 같았다.
“그리고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제3세력이야. 프랑스계도, 네덜란드계도 나랑은 상관없다고. 팀에 더 도움이 되고 더 잘하는 선수면 만사 OK. 알아둬.”
성배의 말에 나머지 선수들도 그냥 웃고 말았다.
그야말로 정답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답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프랑스계와 네덜란드계의 반목은 그렇게 쉽게 풀릴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 너한테 맡긴다. 어쩌면 네가 귀화 선수라서 더 유리할지도 모르겠다.”
베르마엘렌의 말은 처음 성배가 아약스로 행선지를 정할 때 고려했던 것들과 정확히 일치했다.
반 바이텐의 포지션을 노리기 위해 날아온 네덜란드.
네덜란드계 선수들의 인식에도 프랑스계와의 연결고리가 되어줄 수 있는 선수라는 개념이 박혀 들어가고 있었다.
***
“왼쪽으로 크게 벌려!”
암스테르담 아레나에서 펼쳐지는 경기여서 그런 것인지 아약스가 경기 초반부터 완벽하게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오랜만에 제대로 공격적인 4-3-3 전술을 들고 나선 아약스는 왼쪽과 오른쪽, 중앙 할 것 없이 어디서든 RKC의 수비진을 괴롭히며 완벽하게 경기를 지배해 나갔다.
‘좋은 패스!’
성배는 오늘도 레프트백으로 출전해 있었다.
4-3-3 포메이션에는 측면 미드필더 자리가 없었지만, 성배가 아닌 엠마누엘슨이 라인업에서 빠져 있었다.
전반기가 종반을 향해 접어들 때까지만 하더라도 공격적인 역할이 필요할 때마다 엠마누엘슨에게 밀렸지만, PSV와의 경기가 터닝 포인트였다.
그 경기 이후 엠마누엘슨은 성배를 긴장시킬 수 없었다..
‘오늘 내 역할은... 라이언을 도와 측면을 파괴하는 거니까...’
오늘 경기에서는 수비보다 공격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RKC는 아직 강등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하는 16위에 머물러 있었고, 승리 확률이 낮은 KNVB 베이커 결승을 노리기보다 리그에 매진하는 중이었다.
‘이 정도 상대라면 충분하지.’
선수층이 두껍지 못한 RKC로서는 오늘 경기의 라인업이 빈약할 수밖에 없었다.
아약스도 오가라루나 뮬 등을 출전시키고 교체 명단에도 미테아, 사퐁 등 거의 경기에 나서지 못한 선수들을 많이 포함시켰지만, 주전 라인업 만큼은 탄탄했다.
스탐, 그리게라, 마두로 등이 빠졌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메울 수 있었다.
이와 다르게 RKC는 주전이 빠진 빈자리를 백업 선수들로 채울 수 없었다.
‘내 공격력으로도 충분해.’
혼자서도 RKC의 오른쪽 측면을 파괴할 자신이 있었다.
2년 연속 두 자릿수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면서 공격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다.
바벨도 함께 왼쪽 측면 공격을 맡아주고 있었으니 이런 자신감을 갖는 것도 당연했다.
‘바로 내놔!’
성배가 볼을 잡은 순간, RKC의 윙어 타릭이 성배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어지간한 윙어 수준의 공격력을 갖춘 성배를 공격수의 어설픈 수비력으로 막아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이스 리턴!’
바벨에게 잠시 볼을 내주고 타릭을 간단하게 따돌린 성배가 다시 볼을 돌려받았다.
성배에게 볼을 내준 바벨도 바로 앞으로 출발했고, RKC의 라이트백, 멀더는 누구를 막아야 할지 잠시 멈칫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수비수가 망설이면 바로 위기라고.’
멀더가 망설인 그 순간, 바벨과 성배는 이미 다음 플레이를 결정했다.
결국, 수비수와 공격수의 대결은 수 싸움부터 시작되는 것이었고, 가장 처음 대결이 펼쳐지는 이 수 싸움은 맞대결의 승패에 큰 비중을 차지했다.
망설인 그 순간, 이미 열세에 처한 것이었다.
‘중앙도 OK, 나한테 줘도 OK, 그냥 중앙으로 틀어도 OK. 완벽한 상황.’
멀더가 멈칫하면서 스피드를 죽인 순간, 성배는 그 옆으로 절묘하게 볼을 밀어주었다.
이미 성배에게 볼을 주면서부터 가속하기 시작한 바벨은 간단히 볼을 따라잡았고, 멀더가 애써 따라가 보았지만, 상당한 차이가 벌려져 있었다.
직접 중앙으로 돌파해도, 중앙의 훈텔라르에게 넘겨도, 그도 아니면 패스한 이후 대각선 방향으로 침투하는 성배에게 빼줘도 문제가 없는 완벽한 기회였다.
‘좋아. 완벽해.’
바벨이 크로스를 위해 발을 들어올린 그 순간, 멀더가 몸을 던졌다.
크로스를 방해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거기까지 예상한 바벨은 마지막 순간 발목을 비틀어 성배를 향해 빠르게 볼을 밀어주었다.
‘수비, 없고, 코스는... 있네.’
누가 뭐라 해도 아약스에서 가장 위협적인 공격수는 훈텔라르였다.
바벨과 성배의 호흡으로 왼쪽 측면을 완벽히 뚫어냈을 때, RKC의 수비수들은 훈텔라르에게 몰릴 수밖에 없었다.
바벨을 받쳐주기 위해 살짝 안쪽에서, 페널티박스에 걸리는 정도의 위치에서 자리를 잡은 성배는 일단 그다음 순위였고, 그에 대한 수비는 헐거웠다.
‘내 킥을 무시하지 말라고.’
바벨의 패스를 받음과 동시에 오른발 쪽으로 옮겨 놓았다.
왼발잡이지만, 오른발도 비슷하게 잘 사용하는 성배였다.
지금은 오른발로 때리는 것이 더 유리했다.
-뻐-엉!
성배의 장점은 정확한 킥이었다.
슈팅은 그다지 뛰어나지 못하지만, 강하게 때리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감을 경우, 슈팅 대비 득점율이 꽤 높았다.
지금도 반대편 골포스트를 향해 정확히 감긴 모습이었다.
‘호오, 생각보다 반응이 괜찮네.’
RKC의 골키퍼 어윈이 생각보다 민첩하게 몸을 날렸다.
벨기에 출신으로 프리메라 리가에서 수년간 활약했고 A매치에도 두 경기 나섰던 수준급의 선수다웠다.
‘덕분에 쉬워졌네.’
하지만 그 빠른 반응속도 덕분에 아약스의 공격이 더 쉬워졌다.
슈팅인 줄 알았던 볼의 궤적을 가로막으며 훈텔라르가 뛰어오른 것이었다.
[와아아아아!!!]
골키퍼가 이미 몸을 날린 상황에서 훈텔라르의 헤더를 막을 선수는 없었다.
가볍게 머리를 갖다 대 방향만 살짝 바꾼 훈텔라르의 헤더는 RKC의 골문을 열었다.
“나이스. 좋은 선택이었어.”
훈텔라르와 손바닥을 마주치며 성배가 말했다.
“그러라고 준 볼인 거 다 알아. 네가 때린 슈팅이라기에는 코스나 파워가 애매했다고.”
훈텔라르의 말에 미소를 지은 성배였다.
겸사겸사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도한 것이었고, 안 통해도 골문을 열 수 있도록 감은 것이었는데, 확실히 훈텔라르의 재능도 만만치 않았다.
‘알아채는 것도 쉬운 건 아닌데, 반응까지 하다니. 확실히 여기까지만 와도 재능이 대단해.’
레알 마드리드, AC 밀란 등 빅클럽을 거쳐 샬케에서 드디어 자리를 잡는 훈텔라르.
S급이라 하기에는 뭐하고 애매한 A급 스트라이커 정도로 성장할 선수였지만, 확실히 이 정도만 되어도 자신이 상상한 수준 이상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재미있어. 이제 이런 게 재미있네. 이래도 되나.’
전에는 이런 것을 확인할 때마다 초조해지거나 부담스러워졌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더 높은 세상에서 더 뛰어난 재능들과의 대결이 기대되었다.
< 낭만필드 - 100 (4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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