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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96화 (71/356)

< 낭만필드 - 096 >

‘하아, 서로 한 번씩 이별을 고하라는 하늘의 장난인가?’

전생에서는 자스민이 이별을 고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이번 생에서도 사실상 둘 사이에 종지부를 찍은 건 자스민의 솔직한 말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종지부를 찍는 역할은 성배에게 돌아왔다.

“음... 자스민은 뜨거운 사랑을 원한다고 했죠? 사실 나는 별생각 없어요. 그냥 좋은 사람과 함께하고 싶을 뿐이에요. 친구 같은 사이도 좋고, 뜨거운 사랑도 좋아요.”

다시 한 번 뜨거운 사랑, 모든 것을 다 바칠 사랑이 해보고 싶다.

그런 마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시 그런 사랑을 하게 된다면 굉장히 피곤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축구 외적으로 굉장한 심력을 소모해야 하는 뜨거운 사랑.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자스민이 원하는 뜨거운 사랑은 나와 함께 할 수 없을 거예요. 내가 원하는 잔잔한 관계도 자스민과 함께는 할 수 없겠죠.”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정말 힘들었던 고민과 마음고생 끝에, 마지막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막 싹트려고 하는 마음을 자스민이 확실히 다스릴 수 있도록, 질척하게 남아버린 자스민에 대한 미련을 확실히 털어버릴 수 있도록.

“그래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드디어 자스민도 입을 열었다.

성배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감정을 정리하던 자스민이었다.

다행히 고작 열흘 정도의 시간 동안 쌓인 감정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정리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정리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우리 사이는 분명 쉽지 않겠죠.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사랑도 중요하지만 내 미래가 더 중요해요. 그러면서도 이기적인 사람이라서 뜨거운 사랑을 받고 싶어요.”

자스민은 역시 자스민이었다.

전생에서도 자스민은 똑 부러지는 내조를 해주었지만, 사실 자신에게 시간을 많이 투자하지는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충실했고, 연인으로서 해야 하는 일들은 완벽하게 해냈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 자체는 그리 많지 않았었다.

“주는 바쁜 사람이죠. 며칠 정도는 감정을 쌓아가려는 단계였으니까 자주 만났지만, 아마 시즌이 시작되고 어느 정도 관계가 궤도 위에 오르면 만나기조차 쉽지 않을 거예요.”

전생에서도 축구에 모든 것을 걸었던 성배였지만, 지금은 그것보다도 훨씬 더 심해졌다.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축구에 매진했던 것이 전생의 성배였다면, 지금은 더욱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본인의 꿈을 이루기 위해 자발적으로 축구에 매진하는 중이었다.

그 차이는 어떻게든 시간을 빼서 자스민에게 투자했던 전생과 그러기 힘든 미래로 나타날 것이었다.

“맞아요. 솔직히 말해서 자스민이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아직은 사랑보다 축구가 먼저예요.”

솔직히 말하면 처음 회귀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구단에게 배신당하면서 과거로 회귀했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그렇게 당하지 않겠다는 마음, 이번만큼은 성공하겠다는 마음이 가장 컸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만큼이나 컸던 것이 가족에 대한 마음, 실패한 가정을 다시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회귀 이후에는 몇 달이나 자스민과 엘리자베스의 꿈을 꾸었다.

그리고 매일 그녀들과의 행복한 삶을 상상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축구를 통한 자아실현의 꿈은 커져만 갔고, 자스민을 향한 마음의 크기는 작아졌다.

“나도 그래요.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사랑도 해보고 싶지만, 아직은 내 미래가 더 중요해요.”

쉽지 않은 영화감독의 길을 선택한 자스민이었다.

실제로 전생의 자스민도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성공하기 전까지는 불안한 미래에 불안해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그 시기에 둘의 관계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성배의 노력 덕분이었다.

성배는 불안해하는 자스민을 따뜻하게 안아주었고, 그런 성배 덕분에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던 자스민이었다.

마음이 안정되고, 쉴 공간이 생기니 편안해진 자스민은 그때부터 편한 마음으로 작업을 시작해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그 어려운 시기, 자신을 잡아준 성배에게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졌던 것은 성배의 사랑과 배려 덕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에서는 성배가 그렇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런저런 핑계들만 생각나는구나.’

대화를 나누면서 둘 사이에 놓인 장애물들이 꽤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배가 생각하기에 이런 것들은 모두 설득력 있는 변명에 불과했다.

전생에서 확인했던 것처럼 두 사람의 마음만 있다면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그리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야.’

성배에게 자스민은 친구 혹은 가족과 같은 느낌이었다.

자스민에게 성배는 이제 만난 지 열흘 정도밖에 되지 않은 남이었다.

작지 않은 호감을 느끼고 있는 것과는 또 별개의 일이었다.

‘이제 끝이구나.’

대화를 나누는 동안 주문했던 음료는 이미 바닥을 보인지 오래였다.

커피와 주스도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둘 사이에도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분위기.

전생에서 마지막을 마주했을 때와 다르지 않은 이 분위기에 성배는 마지막을 직감할 수 있었다.

“우리, 마지막으로 악수나 하죠.”

무거운 침묵을 깨고 성배가 손을 내밀었다.

자스민도 손을 마주 뻗어 성배의 손을 잡았다.

“행복하게 지내요. 이건 진심이에요. 진심으로 자스민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 어떤 누구보다도.”

오늘 했던 말 중에 가장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회귀했을 때,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다는 마음만큼이나 컸던 그 마음.

어머니와 아버지, 유빈이, 그리고 자스민.

자스민에 대한 사랑 자체는 이미 무뎌져 버렸지만, 자신의 가족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그 마음은 여전했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아니,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 꼭 자스민을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길 바랐다.

이기적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라도 누군가가 자신의 마음의 짐을 덜어가주길 바랐다.

“주도 행복하세요. 앞으로 꼭 잘 되어서 월드컵 우승도 하고, 빅리그 진출도 꼭 하세요.”

성배와 자스민은 서로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아직 조그마한 미련이 남아있어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손을 잡았고, 한동안 놓지 않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럼... 먼저 가세요. 가는 거 보고 갈게요.”

오늘 같은 날, 자신이 떠나고 자스민이 혼자 남아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스민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자신을 위해서였다.

자스민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다짐했고, 그런 마음으로 나왔지만, 사람의 감정을 너무 쉽게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행복하게 해주기는커녕 자신이 자스민에게 해준 것은 또 한 번의 상처를 준 것밖에 없었다.

지난 이별은 두 사람 모두의 잘못이었지만, 이번 이별은 오로지 자신의 잘못이었다.

자신 때문에 상처 받았을 자스민이 홀로 남아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자스민에게 도움이 되어줄 기회가 또 있을까.’

이번 만남이 이번 생에서의 마지막 만남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자스민에게 해준 것은 상처를 준 것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혼자 쓸쓸하게 남겨두고 떠나는 것만큼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뭘 또 따로 나가요. 그냥 같이 나가요. 어차피 시작도 안 한 사이인데 마지막에 너무 큰 의미는 두지 말자고요.”

초반에 잠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자스민이지만 어느새 다시 침착한 모습을 되찾았다.

마지막 이별에 대해서 큰 의미를 두고 있는 성배와 다르게 자스민은 이별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일반적으로는 저런 반응이 나올 상황이지.’

성배에게는 오늘이 자스민과의 지난 17년을 정리하는 자리였다.

자스민과 처음으로 헤어졌던 전생에서는 성배도, 자스민도 너무 정신이 없었던 시기였다.

엘리자베스를 잃은 슬픔 속에서 채 빠져나오지 못했고, 그 이후에 다시 서로의 유대감을 회복할 시간도 가지지 못한 채로 이별했던 전생이었다.

이별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이별 후 6년이 지난 지금에야 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감정의 선을 타지도 않은, 만난 지 겨우 보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이성과의 이별에 대한 반응은 자스민의 반응이 정상이었다.

“여기서라도 먼저 가세요. 제가 뒷모습을 보고 싶어서요.”

카페 바깥으로 나온 성배는 다시 한 번 자스민을 먼저 보내려 했다.

자신의 뒷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알았어요. 그럼 전 이만 갈게요.”

이번에는 자스민도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두 번째 제안인데 거절하는 것도 적절치 않았다.

“잘 지내요. 가끔 생각나면 응원할게요.”

가끔 생각날 리가 없었다.

앞으로도 종종, 적지 않은 순간마다 생각날 것이었다.

그리고 항상 그녀의 행복을 바라줄 것이었다.

“저는 항상 응원할 건데요. 이거 제가 너무 불리한 거 아니에요? 주는 제가 좋아하는 벨기에 축구를 대표하는 선수고, TV에도 자주 나오는 선수잖아요.”

마지막에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자스민이 정말 고마웠다.

그러면서도 또 자신에 대한 마음이 그리 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섭섭하기도 했다.

‘미친놈. 정신 차려라. 내가 보여준 것이 뭐가 있다고...’

그런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한심하기도 했다.

과거와 이별하기로 해놓고서 꼭 자스민과 관련되기만 하면 계속 과거를 떠올리는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 안쓰럽기도 했다.

“저도 그러면 벨기에 유니폼을 입을 때마다 자스민을 생각할게요. 그러면 되겠죠?”

“네. 그렇게 해줘요. 은퇴할 때까지 벨기에 유니폼 벗으면 안 돼요. 국가대표 선수에게 응원받으면 큰 힘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두 사람의 마지막은 깔끔했다.

마지막이라도 좋은 느낌으로,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래. 전생에서의 이별도 이랬어야 했어. 깔끔하게. 그랬다면 이렇게 미련이 남지 않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이렇게 깔끔한 이별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자스민과의 마지막.

다시 자스민과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렇게 깔끔한 이별을 겪고 나니 이렇게 되는 것이 최고의 결과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엘리. 아빠가 말이야, 이번에 엄마랑 또 헤어졌어.’

자스민의 떠나는 뒷모습을 보면서 성배는 엘리자베스를 떠올렸다.

이제 엘리자베스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0%보다 아주 살짝, 정말 살짝 더 높은 그 확률조차도 사라졌다.

하지만 지금 성배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도, 엄마와 아빠를 위해 가장 좋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해. 엘리, 이제 아빠는 괜찮으니까 엄마를 지켜줘. 아빠가 다시 꿈을 찾은 것처럼 엄마의 꿈도 찾아주고 응원해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와 시선이 마주친 것 같았다.

< 낭만필드 - 096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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