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95 >
‘내가 원한다고 어떻게든 미니를 붙잡아놓는 것이 옳은 행동일까?’
자스민과의 첫 술자리는 그렇게 끝이 났다.
서로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가져보자며 자리를 마무리하고 돌아온 성배는 계속 자스민의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래 생각했고, 심사숙고한 이후에 자스민을 만난 것이었지만, 아직도 어렵기만 했다.
‘무엇보다도... 나부터가 이렇게 빨리 변해버릴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처음 시간을 거슬러 온 이후, 자스민과 엘리자베스를 생각하며 울었던 자신의 마음부터가 이미 많이 달라져 있었다.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망각은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이라 했던가.
그 말대로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던 기억들은 회귀 후 3년, 회귀 전의 시간까지 더해도 채 10년이 되지 않아 무던해졌다.
‘사실 회귀하기 전에 이미 상당히 무뎌진 상태이기도 했고.’
회귀하던 그 순간, 자스민을 생각하며 울부짖었던 그 날은 특별한 경우였다.
엘리자베스에 관한 일이야 워낙에 불행한 일이기도 했고, 자신의 딸과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가슴이 찢어지지만, 자스민과 이별한 슬픔은 회귀하기 전에 이미 극복한 상태였다.
마지막 날의 울부짖음은 그 당시 자신에게 한꺼번에 닥친 여러 일들의 영향이 훨씬 컸다.
그리고 현생에 적응하면 할수록 그 날의 감정은 옅어졌다.
‘이런 마음으로 미니를 붙잡는다면, 과연 그게 내가 바랐던 미니의 행복을 지켜주는 일이 될까?’
벨기에로 건너와서 처음으로 자스민과 마주쳤던 그 날.
로얄 앤트워프의 강등이 결정되었던 그 날의 먹먹함도 3년이 되지 않아 무뎌져 있었다.
앞으로 시간은 계속 흐를 것이고, 그 시간 속에서 자스민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될지는 자신조차도 확실히 예상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생과 같은, 아니, 그 이상의 감정이 생겨난다는 확신이 있다면 미니를 붙잡아야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추억도, 기억도 희미해질 것이었다.
이미 돌아온 시간에 익숙해져 전생의 기억과 감정이 상당 부분 희미해졌고, 아버지처럼 따랐던 헤르만과의 관계도 어느 정도 정리했다.
자스민과는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시작하는 지금 시점에서도 이미 자스민에 대한 마음이 옅은데, 앞으로 살아가면서 다시 사랑을 느낄 수 있을까?’
함께 하면 정이 든다고 했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면 정이 들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자스민과 함께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그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솔직히... 미니를 붙잡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연애하던 시절, 젊었던 시절 자스민이 무엇을 좋아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붙잡으려고만 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붙잡아둘 수 있을 것이었다.
‘사람은 변해.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에게 맞춰가는 거야. 그런데 그렇게 바뀐 내가, 지금의 미니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맞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은 누구나 변하게 된다.
성배가 자스민과 함께한 시간도 십 년을 훌쩍 넘겼고, 그러면서 자신이 변해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 자스민이었다.
십 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고, 서로를 변화시켰다.
그렇게 성배는 20대 초반의 자신과 달라졌고, 지금의 성배는 자스민이 반했던 20대 초반의 자신이 아니라 자스민과 함께 변해갔던 30대 후반의 자신과 더욱 가까웠다.
‘20대 초반의 나를 연기해서 자스민과 함께 한다면, 그게 서로에게 좋은 것일까?’
20대 초반에 자신이 어땠는지 대충은 알고 있었다.
자스민과 함께 어떤 시간을 보냈고, 어떻게 사랑했는지는 거의 기억나지 않았지만, 대충은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연기해서 만들어낸 사랑이 정말 자신이 원했던 것인지, 자신이 바라던 대로 자스민이 행복해지는 길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자스민이 행복해지기를 바라. 나와 함께해서 불행한 미니보다는 나와 함께하지 않아도 행복한 미니를 보고 싶어.’
자스민을 놓치기 싫어했던 성배였다.
하지만 굉장히 오래 고민하고 실제로 몇 번 만나보기도 하면서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이 서로를 위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점점 과거로 돌아온 자신에게 익숙해지면서 한 번 더 뜨거운 사랑이 해보고 싶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지금의 어린 자스민이 원하는 뜨거운 사랑을 자신이 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나지만, 미니도 미니야. 과연 지금의 내가 미니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일까.’
사랑.
이만큼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감정이 또 있을까.
다른 누구보다 자스민에게 잘해줄 자신은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스민이 그런 자신을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이 부분은 확신할 수 없었다.
‘사랑을 시작할 때, 그때 미니를 보며 느꼈던 감정과 지금의 내 감정이 다르듯, 미니도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 다를 텐데.’
자스민이 처음 만났던 스물두 살의 자신과 겉으로는 열아홉이지만 사실은 마흔이 다 된 자신.
두 명의 자신에게 느끼는 자스민의 감정이 같을 수 없었다.
당장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부터가 다르고 그에 따라서 행동하는 양식 자체가 달라졌는데, 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것이라 생각하는 것부터 말이 되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어땠지? 어떤 부분에서 미니를 설레게 했고, 어떤 부분에서 미니가 실망하게 했었지?’
완전히 다른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두 사람의 자신.
자스민이 완전히 다른 두 명의 자신에게 동시에 사랑을 느낄 수 있을까?
그것도 성배를 고민하게 만드는 주제였다.
‘지금이야 초반이고, 나와 잘 맞는다고 생각할 테니 나에게 호감을 갖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과연 콩깍지가 벗겨지는 시기가 와도 계속 그럴까.’
자스민이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말만 하고 좋아하는 행동만 하면서 취향까지도 잘 맞는 이성에게 호감을 갖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계속 만나면서도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계속 말해왔듯 자신은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자스민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면...’
당장 처음부터 자스민이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없는 자신이 그녀를 평생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도 자스민에게 확실한 끌림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 자스민에게 그것을 강요할 수도 없었고, 기대할 수도 없을 것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결론을 내지 못했던 일.
이제는 질질 끌면서 고민하는 것을 멈추고 확실한 결론을 내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
“...안녕하세요. 잘 지냈어요?”
“네. 잘 지냈어요. 주는 어땠어요?”
성배에게는 시간이 많이 없었다.
이제 곧 겨울 휴식 기간도 끝날 시기였고, 다시 시즌이 재개되면 따로 시간을 낼 기회가 별로 없을 것이었다.
안트베르펀이 가깝기는 하지만, 시즌 중반에 짧지 않은 거리를 운전해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를 위해서 빨리 결론을 내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음. 잘 지내...기는 했는데 고민이 많았죠. 앞으로 우리 관계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 걸까, 하고요.”
실제로 성배는 이번 휴식기를 거의 통째로 자스민에게 할애했다.
초반에 알아가는 단계에서는 자스민과 만나는 시간을 제외하면 그 시간 동안 충실하지 못했던 만큼 더 필사적으로 운동했지만, 자스민의 발언 이후에는 거의 자스민 생각만 했을 정도였다.
“어, 그러면 안 되죠. 저 때문에 훈련도 제대로 못 한 거 아니에요?”
축구 팬이었기 때문에 자스민은 만나기 전부터 벨기에 국가대표인 성배를 잘 알고 있었다.
후반기 시즌 준비에 대해 걱정까지 할 정도로 꽤나 헤비한 팬이기도 했다.
‘음... 자스민과 만나면 이런저런 내조도 받을 수 있을 텐데.’
사실상 결론은 내린 상황이었지만, 막상 만나서 대답하려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난번에 그렇게 헤어진 이후 어색해진 둘 사이의 공기도 성배를 힘들게 만들었다.
“뭐,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동안 워낙 열심히 해왔으니까요.”
“그건 다행이네요. 하긴, 그 나이에 그렇게까지 성공하시려면 진짜 열심히 하셨겠죠.”
두 사람의 대화는 차마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핵심 주변을 크게 빙빙 돌고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차마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후우... 그래도 내가 남자이고, 훨씬 많은 시간을 살아온 사람이기도 하니까. 먼저 말을 꺼내야겠지.’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한 성배가 입을 열었다.
“어때요? 생각은 좀 해봤어요?”
성배가 먼저 운을 띄웠다.
자스민은 난감했는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도 생각 엄청 많이 했어요. 하루에 열 시간 이상 앞으로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 같아요.”
자스민이 최대한 편안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성배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우선... 미안하다는 이야기부터 하고 싶어요. 당신이 나에게서 진심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다는 것은 다 내 잘못이에요.”
너무 어설픈 마음으로 시작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일단 만나고 나면 뭐라도 될 줄 알았다.
누구보다 자스민을 잘 알고 있는 자신이었기에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행동보다 마음이, 진심이 먼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려 했다.
“자스민. 당신에게 호감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당신은 좋은 사람이고, 굉장히 매력적인 사람이라서 누구든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니까요.”
성배의 말에 자스민은 고개를 숙였다.
진심이 느껴지는 성배의 말에서는 여기에서 멈추자는 뜻을 알아챌 수 있었다.
“솔직히 당신이 좋아요. 하지만... 그 감정이 사랑의 감정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자신이 자스민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
그것은 가족과 같은 감정이었고, 젊은 시절 만나서 함께 늙어간 동료, 친구에게 갖는 감정에 가까웠다.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사랑의 감정은 이미 무뎌졌고, 자스민을 생각하면 동료애가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의 자스민, 그러니까 열일곱의 자스민을 볼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마치 가족을 보았을 때, 그러니까 유빈이를 볼 때와 비슷한 그런 감정으로 변해갔다.
“그래서... 여기까지만 할까 해요.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자스민이 고개를 떨궜다.
성배도 그런 자스민의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괜히... 괜히 다시 찾았어. 그냥 나만의 추억으로 남겨뒀어야 했을 것을.’
자스민을 다시 만난 이후, 하루에도 열두 번씩 후회했다.
다시 만나지 말고 그냥 자신만 알고 있는 추억으로 남겨두는 것이 나았을 걸... 하면서 후회했다.
하지만 사랑과는 조금 다른 미련 때문에 여기까지 일을 끌고 왔고, 이번에는 자스민이 아닌, 자신이 끝을 고해야 할 순간이 오고 말았다.
< 낭만필드 - 09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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