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94 >
“우와! 이게 웬 꽃이에요?”
성배의 예상대로 자신이 사들고 온 꽃 한송이에 자스민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냥. 오는 길에 꽃집이 보이길래 한 송이 사 왔어요. 그냥 가벼운 선물이라고 생각해줘요.”
솔직히 말하면 조금 오버였다.
이제 겨우 얼굴을 본지 일주일 조금 넘은 수준에 불과했다.
물론, 자신은 자스민의 번호를 물어보기까지 굉장히 많은 고민을 했지만, 그것을 자스민이 알 리 없었다.
‘그 얼굴을 도대체 몇 년 만에 다시 보는 건지...’
살짝 울컥했다.
고작 꽃 한 송이가 뭐라고, 얼마나 한다고 그렇게 인색했던 것인지,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니까 날 떠났지.’
처음에는 힘든 자신을 두고 떠난 자스민이 원망스러웠다.
엘리자베스를 잃었고, 팀에서도 주전 자리에서 밀려나며 힘들었던 자신을 두고 가버린 자스민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자스민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고작 꽃 한 송이도 안 사주고 힘들 때 기댈 수도 없는 남자였어, 나는.’
자신의 과거는 몇 번을 떠올려도 너무 한심했다.
다행히 이번 생에서는 모든 것들이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다행이었다.
“저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생각에 빠진 성배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며 자스민이 물었다.
꽃 한 송이를 건네주더니 갑자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버린 성배를 바라보는 자스민의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아! 미안해요. 순간적으로 잡생각을 잠깐...”
이런 실수를 하다니.
자스민은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들에 대해 엄격한 편이었다.
사람을 만날 때,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상대방에게 집중하지 않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그런데 방금, 자신은 자스민이 싫어하는 행동을 한 것이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우선 밥부터 먹으러 가요. 배고파요.”
“그럴까요? 오는 길에 보니까 괜찮은 식당이 있더라고요. 거기로 가죠. 파스타 전문점인 것 같던데.”
“항상 느끼는 건데, 주는 저랑 취향이 비슷한 것 같아요. 항상 가자고 하는 곳은 제가 다 좋아하는 곳이더라고요.”
당연했다.
10년을 넘게 만났고, 10년 가까이 함께 살기까지 했는데.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자스민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았지만, 그 이상으로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아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게요. 우리 엄청 잘 맞네요.”
성배는 그저 웃어 보였다.
***
“그런데 진짜로 왜 저한테 꽃을 사다 준 건가요?”
식사를 마친 후, 작은 펍에서 가볍게 맥주 한 잔을 기울이던 두 사람이었다.
자스민은 옆자리에 놓아두었던 꽃을 들어 보이면서 물었다.
“왜긴요. 그냥 지나가는 길에 꽃이 정말 예뻐서 자스민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런 거죠.”
꽃을 왜 사준 것이냐는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입술을 깨물며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자스민의 모습에 성배도 불안해졌다.
“그런데. 우리 지금 어떤 사이인가요?”
고소한 프렌치프라이와 시원한 맥주 한 잔으로 정말 오랜만에 알코올을 충전하던 성배는 자스민의 한 마디에 굳어버렸다.
“음, 그게 무슨 뜻이에요?”
가까스로 정줄을 붙잡은 성배가 물었다.
“말 그대로예요.”
자스민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굉장히 진지한 표정으로 성배의 눈을 주시하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모르겠는데요. 의미가 뭔지도 모르겠고요.”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실없는 농담들과 서로에 대한 이야기들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자스민의 진지한 물음에 성배가 말을 잃을 만도 했다.
“굳이 이걸 설명하자면, 주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슬슬 자스민의 눈빛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호감을 느끼고 있죠. 나름 진지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어렵게 말을 꺼내는 성배의 모습을 자스민은 그저 빤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허... 이렇게 당황하는 건 오랜만인데. 돌아와서는 당황했던 적이 거의 없었는데.’
과거로 돌아온 뒤에는 언제, 어느 자리에서, 누구와, 어떤 목적으로 대화를 나누든지 항상 침착하고 냉정하게 대처했었다.
상대를 당황하게 만드는 쪽은 자신이었고, 자신의 말에 당황하는 것은 항상 상대방의 역할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당황케 한 적은 거의 없었다.
‘헤르만과의 계약을 거절하러 갔을 때도 이렇게 어렵지 않았는데...’
함께 하기를 바랐던 헤르만에게 계약 거절의 뜻을 전하러 갔을 때도 조금 흔들렸을 뿐, 당황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던 성배였다.
자스민을 앞에 둔 지금 이 순간, 최근 몇 년 간 흘려본 적 없는 식은땀이 성배의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호감이라...”
그런 성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스민은 또 한 마디를 내뱉고 침묵을 지켰다.
‘나 참... 원래부터 그러긴 했지만, 열일곱 살에도 마찬가지였구나.’
사실 자스민과의 진지한 대화는 항상 부담스러웠었다.
원래부터 발랄함이나 애교, 상큼함 등과는 거리가 조금 있었지만, 그래도 평소에는 밝은 모습과 귀여운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때는 순간순간 훅 치고 들어오는 촌철살인의 한 마디와 사람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이 성배를 긴장하게 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열일곱 살의 자스민에게서도 보였다.
“저한테 호감이 있는 건 알겠어요. 저도 주에게 호감은 있어요.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는 성배였다.
“그런데 그게 어떤 종류의 호감인지는 모르겠어요. 주의 눈빛과 말투, 행동에서 보이는 감정들이 제가 생각했던 종류는 아닌 것 같아서요.”
솔직히 조금 놀랐다.
전생에서 자신의 행동이나 말투, 심지어 숨소리만 듣고도 현재 기분이나 마음을 읽었던 자스민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제 만난 지 일주일 정도밖에 되지 않은 현생에서도 이리 쉽게 읽힐 줄은 몰랐다.
‘내가 그렇게 알기 쉬운 사람이었나?’
항상 몸을 부대끼며 함께 지내는 동료 선수들도 아직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이번 생에서는 자신의 속마음이나 내면을 쉽게 들키지 않으려 하고 있었고, 성공적으로 수행해오면서 어느 정도 성격도 바뀌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자스민이 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거나... 자스민 앞에서 내 보호막이 무너졌거나. 둘 중 하나겠지.’
성배도 조금씩 냉정함을 되찾고 있었다.
아직 머릿속은 텅 비어있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머리가 굴러갈 정도까지는 회복되었다.
“저도 처음에는 제가 마음에 들어서, 저에게서 매력을 느껴서 다가온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주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번호도 교환하고, 함께 몇 번 만나기도 했죠.”
자스민은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만나다 보니까 뭔가 이상했어요. 주, 주는 정말로 나를 좋아하나요?”
성배는 눈을 감았다.
처음 자스민을 만나러 가던 날부터 자신을 고민하게 했던 그 주제였다.
그 주제가 결국 자스민의 입을 통해 나오고 말았다.
“주의 눈빛에서는 나를 향한 마음이 느껴지지 않아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호감이 느껴지기는 하는데, 나에게 이성으로서 끌리는 마음은 아닌 것 같아요.”
오늘 말문이 여러 번 막히는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정확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눈빛과 행동만 보고도 마음을 알아채는 모습은 전생에서의 자스민과 별 차이가 없었다.
‘나를 잘 모르는 지금도 이렇게 정확했으니, 십 년을 넘게 만난 뒤에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 되었던 건 당연한 일이겠지.’
나름대로 자신의 마음을 잘 숨겼다고 생각했다.
발가벗은 것처럼 모든 마음을 들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주. 어때요? 나에게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느끼기는 하나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자스민의 얼굴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도대체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저 표정을 보면서 어떻게 거짓말을 해...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는데.’
이미 자신의 마음을 어느 정도 눈치챈 것 같았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눈치는 챘지만, 그런 마음이 아니길 바라고 있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한 자스민에게 "나는 너에게 성적인 매력은 느끼지 못한다." 고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이래저래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성배였다.
“그 표정을 보니까 대충 알겠네요.”
“자스민...”
우물쭈물하는 성배의 모습을 보면서 자스민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자스민의 표정을 보면서 성배의 표정도 무너졌다.
“솔직히 예상했어요. 주가 나를 보는 표정만 봐도 알죠.”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가는 자스민의 모습이 성배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는 또 미니가 저런 표정을 짓도록 만드는구나.’
자스민의 씁쓸한 표정에 성배의 가슴은 또 한 번 찢어졌다.
전생에서도 자스민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가슴이 아팠던 성배였다.
시간을 거슬러 돌아와 이번만큼은 자스민이 행복하기를 바랐지만, 자신과 만난 지 보름도 채 되지 않아 자스민은 또 한 번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린... 정말로 아닌 걸까?’
이제는 성배도 점점 현실을 깨닫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극명한 온도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주가 나를 보는 표정이 어떤지 알아요? 음... 내 친구들이 나를 보는 표정이에요. 가끔 보면 우리 아빠가 나를 보는 표정을 지을 때도 있어요.”
성배에게 자스민은 가족이었다.
가족을 볼 때마다 뜨거운 눈빛으로 사랑을 표현하기는 쉽지 않았다.
따뜻한 눈빛으로 흐뭇하게,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그 눈빛.
그것이 성배의 눈빛이었다.
“그런데 주변에 짝이 있는 친구들이나 지인들을 보면 그런 눈빛이 아니에요. 당장 내가 주를 쳐다보는 눈빛과도 확연히 달라요.”
성배는 입을 닫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서로의 온도 차이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자스민이 성배를 바라보는 눈빛은 그야말로 매력적인 이성을 바라보는 뜨거운 눈빛이었다.
뜨거움과 따뜻함.
여기서 느껴지는 서로의 온도 차이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가족? 좋죠. 우정? 좋아요. 그런데 나는 우정으로 사랑하고 싶지 않아요. 어른스럽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나도 아직 십대에요. 뜨거운 사랑, 불같은 사랑이 하고 싶어요. 그런데 만나면 만날수록 주와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네요.”
과거에. 그러니까 전생의 자신은 어땠더라.
자스민과 처음 사랑을 시작했을 때, 그때의 자신은 어땠더라.
필사적으로 떠올려보려 했지만, 떠오르지 않는 감정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주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어요. 주는 참 좋은 사람이고, 매력적인 사람이에요. 그래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해두고 싶었어요.”
자스민의 목소리에서 점점 물기가 느껴졌다.
자스민의 눈가가 젖어들었고, 성배는 그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더 깊어지면 너무 힘들어지잖아요. 조금이라도 더 일찍 결론을 지어야 할 것 같았어요. 저를 위해서요.”
자스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떤 행동을 좋아하는지, 어떤 남자를 좋아하는지, 뭐를 싫어하고 뭐에 설레는지.
이런 것들을 다 알고 있으니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내가 미친놈이지. 그렇게 어설픈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려 했다니.’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미안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과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아 슬픈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눈물을 흘리는 자스민의 모습에 가슴이 너무 아팠다.
자신에게 설렐 수밖에 없도록 행동했으면서 정작 자신은 이전에 자스민에게 느꼈던 설렘을 되찾지 못한 채였다.
“자스민. 왜 울어요. 울지 마요. 자스민이 잘못한 건 없어요. 그냥... 우리가 원하는 사랑의 모습이 달랐을 뿐이에요. 살다 보면,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에요. 어떻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같은 걸 원하게 된다는 게 쉬울 수 있겠어요.”
자스민과 가족같이 편안하게 보냈던 시간을 그리워했던 성배.
젊은 시절의 뜨겁게 불타는 사랑을 원했던 자스민.
두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어긋나 있었다.
< 낭만필드 - 09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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