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93 >
‘자스민...’
성배는 한 카페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유리창을 통해 카페의 내부가 보였다.
성배의 시선은 한 여성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어리네. 풋풋하다.’
열일곱의 자스민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서른 즈음의 모습과는 확실히 달랐다.
처음 만났던 스무 살 무렵의 모습과도 차이가 있었다.
‘이렇게 가슴이 뛰다니. 상상도 못 했는데.’
그런데도 가슴이 미친 듯 뛰었다.
심장은 당장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펌프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어리네.’
솔직히 이야기하면 자스민에게서 성적인 끌림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열일곱의 자스민은 그냥 아기 같았다.
서른여섯에 회귀해서 3년을 더 살았다. 단순 계산으로는 이제 곧 마흔.
열일곱, 한국 나이로 열아홉의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느끼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마냥 어려 보이는데, 심장이 이렇게 뛰어도 되나?’
성적인 끌림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래서 자스민을 만나러 들어가도 되는지를 확신할 수 없었다.
‘이건 분명 연애감정이 아니야. 그런데도 만남을 시작해도 되나? 도대체 이 감정은 뭐지?’
이번 생에서도 자스민과의 사랑을 시작해도 되는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안트베르펀이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당황하고 있는 성배였다.
자스민을 보면서 심장이 뛰고는 있는데, 연애 감정인가를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분명 연애 감정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리워하던 누군가를 다시 만난 그런 느낌인데. 돌아와서... 어머니를 처음 봤던 그 기분.’
자신이 지금 자스민을 보고 느끼는 감정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던 성배는 이내 그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은 성배에게 저기 너의 가족이 있다고 외치는 중이었다.
‘그래. 자스민은 내 가족이지.’
가족.
성배에게 자스민은 그런 존재였다.
카페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던 성배는 과감히 카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가족...’
그러는 동안 애써 지금의 자스민에게 자신은 생판 남이라는 사실을 무시하려 했다.
이번 생에서도 다시 가족이 되려면 남녀 사이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
그런데도 성적인 끌림이 느껴지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
이런 부분들은 깨닫지 못했다.
아니, 사실 깨닫고는 있었다. 애써 무시할 뿐이었다.
***
“아아, 미안. 늦었다.”
자스민과 안면을 튼 이후 하루가 멀다고 안트베르펀으로 향하는 성배였다.
그러던 와중에 연락을 받아 저녁 식사 약속을 잡았고, 세 명의 남성이 성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었으니까 네가 사라. 연봉도 제일 높잖아?”
베르마엘렌이 대답했다.
베르마엘렌과 톰 데 뮬, 얀 베르통헨.
세 명의 벨기에 선수들이 성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 그 정도야 할 수 있지만.”
한 끼 식사 정도야 충분히 살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자스민을 만나고 오느라 늦게 도착해서 미안했던 참이었다.
“진짜 사달라는 건 아니고. 굳이 얻어먹을 필요 있나.”
톰 데 뮬이 대답했다.
성배가 도착할 때까지 세 명이서 이미 이야기를 끝내놓은 듯했다.
“내 송별회니까 나만 빼고 알아서 계산해. 하하.”
이 자리는 잠시 팀을 떠나게 된 베르통헨의 송별회를 겸하는 자리였다.
성배와 엠마누엘슨, 스탐과 헤이팅아, 베르마엘렌, 그리게라, 오가라루 등 에레디비지에 정상급의 기량을 자랑하는 수비수들에게 밀린 베르통헨이었다.
전반기를 통틀어 세 번의 교체 출전이 전부였고, 결국 후반기에는 임대를 떠나기로 한 것이었다.
“네가 사야지. 리그 못 뛸 뻔하다가 기회를 잡은 건데. 안 그래?”
성배가 베르마엘렌, 뮬에게 동의를 구했다.
충분한 기량을 갖추었지만, 상대적으로 더 뛰어난 선수들이 같은 팀에 존재하는 바람에 경기를 못 뛰었던 베르통헨이었다.
임대를 통해 출전 기회를 잡게 되었으니 자신에게 가장 좋은 일이었다.
“그럼. 임대가 얼마나 좋은 기회인데. 얀이 사야지.”
“음? 난 나올 때부터 얀이 사는 거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나?”
성배의 말에 귀신같이 호흡을 맞추는 두 사람이었다.
아약스의 벨기에 선수들끼리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기에 이 정도 호흡은 기본이었다.
남자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한 사람을 놀릴 때 최고의 호흡을 자랑하는 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너무하네. 아무리 그래도 너희는 같이 있고 나 혼자 떨어지는 건데 말이야.”
기회를 잡은 것과는 상관없이 혼자서 팀을 떠나게 된 베르통헨이 섭섭함을 표시했다.
“웃겼다. 너, 웃기는데 꽤 재능이 있네.”
성배의 대답이었다. 무미건조한 반응이었다.
“헛소리도 수준급이네. 야. 발베이크면 차 타고 한 시간이면 가는데 무슨...”
뮬도 한 마디를 보탰다.
“내가 RKC에서 뛴 적이 있는데 어디서 사기를 치려고. 거기 마음만 먹으면 매일 만날 수 있는 곳인데 무슨. 애초에 네덜란드나 벨기에나 다 하루면 끝에서 끝까지 가는데.”
베르마엘렌이 마지막으로 확인사살을 가했다.
두 시즌 전, 2004/05시즌에 이미 먼저 RKC에서 임대 생활을 경험했던 베르마엘렌이었다.
베르통헨의 엄살이 통할 리 없었다.
“내가 뭔 말을 못하는구나. 이거 너무하네, 진짜로!”
한마디 했다가 세 명에게 한 방씩 얻어맞은 베르통헨이 불만을 토로했다.
“분명 주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같이 주한테 얻어먹자고 했잖아! 이렇게 배신하기냐!”
베르통헨이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함께 성배를 공격하기로 했던 사람들이 성배가 도착하자마자 바로 태도를 바꾼 것이었다.
“솔직히 너도 이해해야지. 주는 뭔가 건드리기 까다로운 게 있잖아.”
베르마엘렌의 말에 뮬도 고개를 끄덕였다.
성배를 타겟으로 하지 않았다고 불만을 내뱉던 베르통헨 역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성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몰라서 묻냐. 너도 알잖아. 친한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어려워한다는 거.”
베르마엘렌의 말에 나머지 둘도 고개를 끄덕였다.
성배와 친하기도 하고 가벼운 장난을 치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의 격식은 차리는 관계였다.
“그건 당연한 거지.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하라고 한 게 아니라 너희가 알아서 그렇게 하는 거잖아.”
만족스러웠다.
아무리 친한 관계라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격식이 있는 사이.
어느 정도는 서로를 어려워하는 관계. 이번 생에서 성배가 원하던 관계였다.
“시끄러워. 됐어. 삐졌어. 말 안 해.”
갑자기 어울리지 않게 베르마엘렌이 속사포 랩을 토해냈다.
평소 성배나 콤파니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진중한 성격을 보여주는 베르마엘렌은 이렇게 가끔 정신줄을 놓을 때가 있었다.
“갑자기 귀여운 척을 하고 난리야.”
뮬의 반응이었다.
“아, 내가 괜히 말을 꺼내 가지고. 토마스 또 정신줄 놓았네, 놨어.”
베르통헨도 자신의 발언을 후회했다.
“정신 나간 놈. 저거 맛이 갔네. 지갑 꺼내라. 카드도. 우리가 지 카드로 계산해도 모르겠네.”
성배도 한마디 거들었다.
베르통헨에서 자신에게 넘어온 어그로에 베르마엘렌이 침몰했다.
“어쨌든!! 축하한다. 임대로라도 기회를 잡은 거.”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베르마엘렌은 급하게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갑자기?”
뮬이 웃으며 말했다.
“뭐, 어쨌든 나도 축하해. 너라면 잘하겠지.”
“그래. 알지만 속아주지. RKC라면 주전으로 나오는 데 큰 무리는 없을 거다. 내가 봤을 때.”
뮬과 성배도 그냥 모르는 척 속아주었다.
어차피 베르마엘렌에게 얻어먹을 생각도 없었고, 충분히 놀려 먹었기에 미련은 없었다.
“그래. 다들 고마워.”
RKC는 현재 에레디비지에 최하위에 머물러있었다.
수비고 공격이고 할 것 없이 큰 구멍이 뚫려 있었고, 베르통헨 정도의 기량이라면 많은 출전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 가서 많이 뛰어보고 많이 배우라고. 야콥이야 은퇴가 얼마 안 남은 선수고, 즈데넥도 이제 곧 계약이 끝나는데 재계약 소식도 안 들리는 거 보면 팀에서 너한테 기회를 주려는 거라고.”
아무래도 같은 포지션의 선수여서 그런지 베르마엘렌은 돌아가는 상황을 꽤 자세히 알고 있었다.
성배가 생각하는 것과 비슷했기 때문에 거의 정확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야콥은 이제 곧 은퇴, 즈데넥은 이번에 재계약 안 하면 떠난다고 봐야겠지. 그럼... 욘, 토마스, 얀에 새로운 선수 하나 영입하려나.’
최소한 이번 시즌이 끝난 뒤의 일이었지만 일단은 이렇게 흘러갈 가능성이 컸다.
“어이! 미안하다. 많이 늦었지?”
한창 대화를 나누던 네 명을 향해 아직 앳된 외모의 소년이 한 명 걸어왔다.
아직 프로 계약도 맺지 못한 채 유소년팀에서 활약 중인 알데르베이럴트였고, 그도 이들과 자주 모임을 갖는 사이였다.
가장 늦게 나타난 알데르베이럴트를 보면서 이미 모여있던 네 명의 선수들은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
‘음... 자스민이 꽃을 꽤 좋아했었지.’
베르통헨이 임대로 팀을 떠나고 로잘레스, 로젠베리, 페레즈를 대표로 한 선수들과 케이테 감독의 불화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등 아약스의 겨울 이적시장은 바쁘게 돌아갔다.
하지만 성배는 그런 것들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었다.
엠마누엘슨이 PSV전에서 퇴장당하고 비테세 전에서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자리는 확고해진 상황이기도 했지만, 다른 곳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금씩 설레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 성배의 머릿속은 자스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주일에 4일 가까이 자스민이 일하는 카페로 출근하면서 어느 정도의 설렘을 가지게 된 성배였다.
자주 보니까 열일곱의 자스민에게서도 여자로서의 매력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꽃이라...’
성배는 카페로 가는 길에 꽃집을 발견하고 핸들을 꺾었다.
대충 근처에 차를 주차한 성배는 바로 꽃집으로 향했고, 꽃 한 송이를 사들고 나왔다.
[와! 이게 웬 꽃이야? 나 주려고 사온 거야?]
[뭐... 아마 그렇겠지? 흠흠.]
[우와! 웬일이야? 이런 걸 다 사주고! 고마워, 진짜로. 감동이야...]
[아니, 뭐 이런 거로 감동까지 받고 그래. 선물 사주고 미안해지기는 또 처음이네.]
[치. 나도 이런 간지러운 거 좋아한단 말이야. 도대체가 한 번을 안 해주니까 서러워서 그런다, 왜!]
[엄마 화나쪄? 아빠 나빠!]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는 자주 사올게.]
전생에서 단 한 번, 자스민에게 꽃을 선물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이 기억하는 것은 한 번이었다.
‘미안해서 앞으로는 자주 사오겠다고 했었는데...’
자스민과 자신이 함께하던 시절.
그리고 그사이에 엘리자베스가 함께였던 시절의 기억이었다.
그 뒤로는 꽃만 보면 그날의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이후로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한 번 자스민을 위해 꽃을 살 수 있었다.
‘그 빚은 내가 어떻게든 두고두고 갚을게.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미련함 때문에 자스민까지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성배였다.
하지만 혼자 생각을 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자스민과 다시 한 번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뉘앙스를 계속 풍기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둘이 함께하는 미래를 다시 한 번 써내려가기 힘들 것이라 생각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 낭만필드 - 09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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