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91 >
[아니, 자네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던 게 아니야. 자네도 알겠지만,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지 않나.]
그리고 뒤이어 중년 남성의 목소리도 복도를 울렸다.
성배와 베르마엘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거... 헹크 목소리 아닌가?”
눈을 동그랗게 뜬 베르마엘렌이 성배에게 동의를 구했다.
“처음 목소리가 헹크 불렀잖아.”
뻔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
성배가 궁금한 것은 케이테 감독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대방의 정체였다.
“대화하고 있는 건 케네스 목소리 같은데...”
베르마엘렌의 말을 들은 성배의 머릿속이 깔끔해졌다.
그 목소리는 페레즈의 목소리였다.
“페레즈라. 그런 것 같네. 목소리도 그런 것 같고.”
자신들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성배와 베르마엘렌이었다.
두 사람 모두 페레즈라면 충분히 케이테 감독에게 반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 상황을 말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시즌 초반부터 참았습니다. 제 경기력이 안 좋은 것도 아닌데 최근까지도 계속 벤치에만 앉아있었죠.]
페레즈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7골로 스네이더와 함께 팀 내 최다 득점 1위에 올라있는 페레즈였다.
그럼에도 페레즈의 역할은 로테이션 멤버였고, 포지션이 겹치는 훈텔라르와 바벨의 백업에 그쳤다.
경기 출전 시간 또한 그리 많지 않았다.
“페레즈라면 뭐. 그럴 수도 있지.”
베르마엘렌이 말했다.
유럽 축구계에서 선수가 감독에게 반발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했다.
실제로 고성이 오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럴 수야 있지. 그런데 좋게 풀리지는 않을 것 같은데.”
하지만 흔한 일이라고 해도 그런 갈등들이 모두 무난하게 풀리는 건 아니었다.
때에 따라서 감독과 선수의 갈등으로 인해 둘 중 한 명이 팀을 떠나기도 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지금 상황에서는 페레즈가 팀을 떠날 가능성이 컸다.
“네 말을 들으니까 그럴 것 같네.”
베르마엘렌도 성배의 말에 동조했다.
케이테 감독의 성향상 선발 명단에 큰 변화를 주지 않을 것이었다.
열네 명 정도의 선수가 선발 명단에 번갈아 이름을 올렸고, 나머지 선수들은 정말 가끔 선발 기회를 얻고 있었다.
한 번 백업 역할로 굳어버린 페레즈가 팀 내 최다 득점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백업으로 활용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최근 경기력은 페레즈가 가장 좋은데. 기회를 좀 줘보지, 참.’
12라운드까지 선발로 두 경기밖에 출전하지 않은 페레즈는 무려 7골을 넣고 있었다.
경기력도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아무리 바벨이 네덜란드 최고의 유망주라는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도 페레즈에게 자리를 내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될 것 같아?”
페레즈와 케이테 감독의 언쟁이 계속 이어졌다.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서 걱정되는 것인지 베르마엘렌이 성배에게 의견을 물어왔다.
“관심 없어.”
관심 없었다.
“누가 이기든 상관없어. 그냥 앞으로 팀 분위기에 문제만 안 생기면 돼.”
페레즈와 케이테 감독, 두 사람 모두 성배와 특별한 감정적인 교류가 없었다.
누가 주도권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든 자신과는 상관이 없었다.
PSV에게 무기력하게 패배한 시점이었다.
팀에게 있어 중요한 시기였고, 팀의 분위기에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와, 냉정하네. 조금 더 마음이 가는 쪽도 없어?”
베르마엘렌이 질렸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마음이 가는 쪽이야 있긴 하지만. 그거와는 상관없지.”
성배도 사람인 이상 마음이 기우는 쪽은 있었다.
아무래도 선수여서 그런지 좋은 활약을 펼치고도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하는 페레즈에게 마음이 가고 있었다.
“내가 마음이 가면 어쩔 건데. 편 들어줄 생각 없어. 나랑 친한 것도 아니고.”
만약 일이 지금보다 더 심해진다면 자신이 아니더라도 분명 감독을 지지하는 선수들과 페레즈를 지지하는 선수들로 나뉠 것이었다.
거기에 자신도 가담할 생각은 없었다.
“확실히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냉정하네.”
베르마엘렌이 웃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심정적으로는 페레즈의 편이지만, 진짜로 붙게 되면 감독 쪽 중립이야. 아직 이 팀에서 조금 더 뛸 생각이니까.”
선수의 출전은 전적으로 감독의 몫이었다.
아직 아약스에서 더 뛸 생각이었기에 굳이 감독과 척지고 싶지는 않았다.
“계산적인 놈. 무섭다, 무서워.”
“내 문제로 한 판 붙는 거라면 모를까. 다른 사람 편들어주다가 문제 생기는 건 딱 질색이다.”
자신의 문제라면 한 판 제대로 붙고 팀을 떠날 각오로 격렬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일로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
폭탄을 안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한동안은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케이테 감독과 페레즈를 비롯한 기량에 비해 기회를 받지 못하는 선수들의 갈등이 시작되면서 팀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그 결과, PSV와의 경기 이후 세 경기에서 1승 1무 1패에 그치며 리그 3위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아약스, 오늘 경기에서 다득점 승리를 거두고 벤피카의 경기 결과를 기다려야 UEFA 컵 진출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되거든요?”
“오늘 아약스는 무조건 다득점 승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맨유가 벤피카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어야지만 UEFA 컵 진출권을 따낼 수 있는 불리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다음 경기는 셀틱과의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6차전 경기였다.
암스테르담에서 펼쳐졌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았다.
“현재 맨체스터에서 펼쳐지고 있는 맨유와 벤피카의 경기는 1-1 상황이라고 합니다. 이대로라면 아약스가 아무리 대승을 거두어도 조 최하위를 면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아약스가 3위를 차지하려면 벤피카는 대패, 자신들은 대승을 거두어야 해요.”
셀틱이 3승 2패로 조 1위를 달리는 이변을 연출하고 있었고, 2위는 3연승 후 2연패로 조 2위까지 떨어진 맨유였다.
3위는 2승 1무 2패의 벤피카, 1승 1무 3패의 아약스는 최하위였다.
“바벨, 슈팅! 보루치의 선방! 아약스, 코너킥을 얻어냅니다.”
아약스는 바벨의 위협적인 슈팅이 셀틱의 골키퍼 보루치의 선방에 막히며 코너킥을 얻어냈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무조건 골을 넣어야 해.’
그리고 코너킥을 처리하기 위해 성배가 움직였다.
“현재 2-0으로 앞서고 있는 아약스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거든요?”
벤피카가 7득점 6실점으로 +1의 골득실을 기록하고 있었고, 아약스는 4득점 7실점으로 -3의 골득실을 기록하고 있었다.
벤피카가 일단 맨유에게 한 골 차로 패한다고 가정하면 아직 세 골이 더 필요했고, 두 골 차로 패한다고 가정해도 두 골이 더 필요했다.
“오늘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주가 코너킥을 준비합니다.”
“킥이 좋은 선수이기 때문에 기대가 되네요. 아약스의 세트피스 공격력은 꽤 괜찮은 편이기 때문에 충분한 가능성이 있어요.”
대승이 필요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공격적인 포메이션을 들고나온 아약스였다.
이에 따라서 엠마누엘슨도 오랜만에 풀백으로 출전했고, 성배도 라이트백으로 출전했다.
왼쪽 수비가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윙어급 공격력을 갖춘 두 풀백의 활약 속에 두 골을 먼저 터뜨리고 있었다.
“주의 코너킥 올라갑니다! 베르마엘렌!! 헤더!!”
성배의 킥은 정확히 베르마엘렌의 머리로 날아갔다.
작은 신장이지만 엄청난 점프력으로 보완하며 뛰어난 제공권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베르마엘렌인 만큼 가볍게 볼을 따냈다.
“골!! 골입니다!! 아약스, 무섭게 치고 나갑니다! 벌써 세 번째 골입니다!”
“이대로라면 3위 탈환이 가능할 것도 같은데요? 방금 맨유의 득점 소식이 전해졌죠? 이제 두 골을 더 넣을 수만 있다면 UEFA 컵 진출이에요!”
셀틱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맨유의 1위 등극이 유력해지고 있었다.
마지막 경기까지 어느 한 자리 확정된 순위가 없는 F조는 조 편성 직후에 누군가 말했던 대로 ‘다른 의미의 죽음의 조’임을 증명했다.
***
-삑! 삐-익!!
“경기 끝났습니다... 아약스가 셀틱을 상대로 3-1로 승리했지만, 리그 최하위를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경기가 끝났을 때, 승리한 팀은 아약스였고, 셀틱은 패배했지만, 셀틱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뛰어다니며 기쁨의 세리머니를 하고 있었다.
아약스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주저앉거나 터덜터덜 라커룸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벤피카가 맨유에게 1-3으로 패배하면서 2승 1무 3패로 아약스와 동률이 되었지만, 골득실에서 두 골 앞서면서 3위를 차지, UEFA 컵에 진출합니다.”
맨유가 여유롭게 1위를 차지하고 2위를 놓고 벤피카와 아약스, 셀틱이 경쟁할 것이라 예상되었지만, 결과는 달랐다.
맨유는 예상대로 1위를 차지했지만, 2위를 놓고 다툴 것이라던 벤피카와 아약스가 3, 4위로 떨어졌고, 이 중에서는 최약체로 꼽혔던 셀틱이 2위를 차지, 16강에 진출했다.
[우우-우!!]
그리고 암스테르담 아레나는 다시 한 번 야유로 가득찼다.
최근 들어서 홈팬들의 야유가 자주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케이테 감독은 점점 더 큰 압박에 시달렸고, 부쩍 조급해하고 신경질도 늘어가는 중이었다.
“아, 다시 한 번 야유가 나오네요. 시원하게 3-1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홈팬들이 야유를 퍼붓고 있습니다.”
이제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팬들의 자긍심을 무시하며 수비적인 전술을 일관하는 것도 모자라 성적까지 나오지 않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 아약스, 확실히 위험해요. 뭔가 반등의 계기가 필요한 것 같네요.”
중계 화면에는 케이테 감독의 사퇴를 요구하는 팬들의 현수막이 잡히고 있었다.
***
[케이테 감독, “시즌 초반, 선수들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초반 부진했던 선수들 탓.” 케이테 감독의 변명.]
[팬들의 야유에 선수들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조 최하위를 기록하며 전반기가 끝나기도 전에 이번 시즌 유럽 대항전을 마친 케이테 감독은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팀의 부진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아닌 선수들과 주변 환경에 떠넘긴 것이었다.
이러한 케이테 감독의 발언은 당연히 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고, 상황을 더욱 좋지 않게 만들었다.
ㄴ 감독 맞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감독이라면 성적에 대한 책임이 없을 수 없지.
ㄴ 헛소리지. 성적 책임은 감독과 선수 모두가 져야 하는 거 아닌가? 개인적으로 선수 책임보다는 감독 책임이 커보이는데.
ㄴ 애초에 팀을 이끌어가는 수장이라는 사람이 구성원들 탓만 하고 있으니 팀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있나.
ㄴ 케이테는 안 돼. 조금 이르지만, 과감한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다.
ㄴ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이르지 않나? 나도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이제 겨우 반년 지났다고.
케이테 감독을 비난하는 팬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직 평가하기에는 이르다며 조금 더 기다려보자고 했던 팬들도 최소한 이번 발언에 대해서 만큼은 비난하고 있었다.
너무 무책임한 발언이라는 것이었다.
케이테 감독이 네덜란드 최고의 명문 클럽인 아약스의 감독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감독 자질 논란까지 일어나는 등 생각보다 더 큰 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 낭만필드 - 09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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