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90 >
‘됐다. 잘 올라갔네.’
경기가 끝나고, 성배는 박인진과 식사 자리를 가졌다.
나름 멋진 식당에서 멋진 식사를 대접한 성배는 박인진과 몇 장의 사진을 찍었고, 집에 돌아와 개인 홈페이지에 사진을 업로드했다.
‘이 사진이 기사로 나오기까지 얼마나 걸리려나.’
몇 년만 더 지나면 개인적인 홈페이지나 SNS에 적은 글들이 기사로 나오기까지 초 단위면 충분했지만, 지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최소한 수십 분 단위는 걸릴 것이었다.
뭐, 기사로 나오기만 하면 충분했으니 상관은 없었다.
‘이 짓도 참 오랜만이네.’
2년 정도 지나면 점점 개인 홈페이지 서비스 붐이 일어날 것이었다.
지금 가장 인기가 많은 홈페이지와 3년 뒤에 이 홈페이지를 밀어낼 다른 홈페이지, 두 곳에 사진을 업로드하며 추억에 잠겼다.
‘미니 때문에 억지로 시작하긴 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했었지.’
애초에 이런 홈페이지 관리를 귀찮아했던 성배였다.
인지도가 그리 높지도 않아 SNS에 올린 글들 때문에 논란이 생기는 다른 선수들을 보며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그 덕에 완전히 개인적인 공간으로 남겨둘 수 있었다.
미니의 채근에 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업데이트하며 귀찮아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기분이 묘해졌다.
‘음... 오랜만에 한 번 찾아볼까.’
자신을 SNS의 세계로 끌어들인 것이 자스민이었던 만큼, 당연히 자스민의 계정도 있을 것이었다.
어차피 만날 수 없는 시기여서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지만, 이제 슬슬 때가 되고 있었기에 자스민의 홈페이지에 방문해보았다.
‘역시. 아르바이트 시작했구나.’
이제 반년 후면 자스민이 Secondary School을 졸업하고 전문 과정 학교에 입학할 시기였다.
학비와 프랑스 이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 것이 이쯤이었다.
‘겨울 휴식 기간부터 만나봐야겠어.’
시간이 많지 않았다.
자스민이 프랑스로 떠나기 전에 만나봐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정리해야 했다.
‘이번에는 과연 어떻게 될지...’
자스민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아직 자신의 감정과 둘의 미래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더 미룰 수는 없어. 이제 부딪쳐보자.’
하지만 언제까지나 결론을 미뤄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
-삐-익!
암스테르담 아레나에 주심의 휘슬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숨 막히는 침묵이 경기장을 지배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주심을 쳐다보고 있었다.
[우-우우!!]
그 뒤, 조금 전까지의 침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야유가 터져 나와 경기장을 뒤엎었다.
4만여 명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는 주심은 윗주머니에서 카드 두 장을 꺼냈다.
옐로 카드 한 장, 레드 카드 한 장.
퇴장이었다.
“아니, 주심!! 이게 어떻게 카드야!! 카드까지는 아니지!”
스탐이 달려가 거세게 항의했다.
전반전 20분.
지금 엠마누엘슨이 퇴장당하면 타격이 너무 심했다.
‘이거 망한 것 같은데.’
2년 연속 에레디비지에 우승을 달성하는 등 최근 분위기가 가장 좋은 팀이 PSV였다.
아약스의 강력한 경쟁자이기도 한 PSV와의 경기에서 이른 시간에 한 명이 퇴장당했다는 것은 아무리 아약스의 홈에서 펼쳐지는 경기라고 하더라도 타격이 컸다.
“주! 지금 바로 투입이야! 빨리 준비해!”
엠마누엘슨의 퇴장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케이테 감독은 바로 성배에게 출전을 지시했다.
공격적인 3-5-2 포메이션을 운용하고 있었지만, 엠마누엘슨의 퇴장으로 숫자가 부족해지면서 윙백을 활용하기로 한 것이었다.
‘아이고, 급하네.’
스탐과 다른 선수들이 시간을 끌어주는 동안 성배가 몸을 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투입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시간을 활용해 몸을 풀어줘야 했다.
‘아직! 조금만 더 끌어봐.’
주심에게 항의하던 스탐이 어이가 없다는 식으로 고개를 돌리며 성배를 바라보았다.
성배는 티 나지 않게, 하지만 자신의 뜻을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게 수신호를 보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었지!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스탐은 물론이고 아약스의 그 누구도 엠마누엘슨의 카드가 취소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몸이 풀리지 않은 성배를 위해 최대한 시간을 끌어주고 향후 판정에서 주심의 보상 판정이라도 받아내기 위해 강력한 항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됐습니다.”
급하게 몸을 푼 성배가 감독에게 말했다.
아직 몸이 조금 무겁고 찌뿌둥했지만, 이 이상 시간을 끌기는 힘들어 보였다.
[IN - 13. 주성배 / OUT - 11. 케네스 페레즈]
오랜만에 선발로 경기에 나선 페레즈가 성배와 교체되며 그라운드에서 내려왔다.
엠마누엘슨의 퇴장으로 측면에 구멍이 뚫리면서 공격수를 한 명 뺄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수비를 강화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좋지 않은데...’
그라운드에서 물러나는 페레즈의 표정을 보면서 성배는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최근 들어 케이테 감독의 선수 기용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페레즈였다.
그 불만을 달래주는 의미로 바벨을 쉬게 하고 선발로 출전시킨 것이었는데, 엠마누엘슨이 퇴장을 당해버리면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겠지.’
케이테 감독이 페레즈의 표정을 보지 못할 리 없었다.
그래서 누구를 빼야 할지 많은 고민을 했겠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공격 숫자를 줄이고 수비수를 투입해야 하는데, 최고 스타 중 한 명인 훈텔라르를 뺄 수는 없었으니까.
케이테 감독의 표정이 굳어진 채 풀어지지 않았다.
“고생했어.”
성배가 참견할 일은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성배가 할 일은 없었다.
“...제길.”
입술을 짓씹으며 나직하게 울분을 토하는 페레즈의 목소리가 성배의 귀로 들어왔다.
현재까지 팀 내 최다 득점자이면서도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는 페레즈의 기분은 충분히 이해했다.
‘현명하게 풀기를.’
성배는 그저 둘 사이의 앙금이 잘 풀리기를 바랄 뿐이었다.
“몸은 충분히 풀었어?”
성배의 투입을 보며 항의를 멈춘 스탐이 다가와 물었다.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대충 어느 정도만 풀고 나온 거죠.”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경기는 성배에게도 부담이었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기회이기도 했다.
‘언제까지 로테이션 돌 수는 없지.’
주전이나 마찬가지이지만, 확고한 주전이라 하기에는 로테이션을 자주 돌고 있었다.
엠마누엘슨이 치명적인 실수를 범한 지금이 성배에게는 기회였다.
‘지금 실점하면 진짜 힘들 텐데.’
그냥 퇴장만 당했어도 힘들 판에 엠마누엘슨은 PSV에게 페널티킥까지 내주고 퇴장당했다.
안 그래도 수비적인 경기를 펼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페널티킥으로 실점까지 하게 되면 굉장히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거 무조건 막는다! 막고 나면 잘 걷어내 달라고!”
그걸 알고 있었기에 스테켈렌부르크도 목소리를 높이며 선수들의 사기를 올리려 노력했다.
이 상황에서 페널티킥을 막게 된 스테켈렌부르크의 부담감 또한 장난이 아닐 것이었다.
‘놓쳐라, 놓쳐라.’
페널티킥을 차기 위해 다가가는 아펠라이를 보며 속으로 주문을 걸었다.
그 유명한 이브라힘 아펠라이가 PK를 놓칠 거라 생각하긴 힘들었지만, 제발 이변이 일어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후우, 긴장된다.”
베르마엘렌이 옆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게라를 대신해 선발로 출전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 베르마엘렌이었다.
하지만 아직 경험이 많지 않았기에 이런 상황에서 긴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쩔 수 없지. 너나 나나 우리 잘못은 없으니까. 우린 그냥 우리가 할 것만 하면 된다고.”
하지만 성배는 자신이 관여하지 않은 상황에 흔들리지 않았다.
여기서 실점한 뒤에 결국 패배한다고 하더라도 잘못은 엠마누엘슨에게 있었다.
자신은 엠마누엘슨보다 좋은 모습만 보여주면 되는 것이었다.
-삐-익!
“놓쳐라, 놓쳐라, 놓쳐라...”
주심의 휘슬이 울리고 아펠라이가 도움닫기를 시작했다.
옆에서 베르마엘렌이 주문을 외우듯 놓치라는 말만 반복했다.
[우우-우!!]
관중들의 야유가 암스테르담 아레나를 뒤덮었지만, 아펠라이의 표정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볼에 접근한 아펠라이가 다리를 들어 올렸다.
-삑! 삑! 삐-익!!
[우우-우!!]
베르마엘렌의 주문은 통하지 않았다.
경기장을 가득 채운 야유에도 불구하고 아펠라이는 흔들리지 않았고, 침착하게 페널티킥을 성공시켰다.
‘힘들어지겠네.’
아펠라이의 득점은 아약스의 고생문이 열렸음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네덜란드의 전설 중 한 명인 코쿠를 비롯해 벨기에 국가대표인 베테랑 시몬스, 브라질 센터백 유망주 알렉스나 골키퍼 고메즈 등이 버티고 있는 PSV 수비진이었다.
이 수비진을 뚫는 것 자체부터가 쉽지 않았는데, 수적으로도 불리했기에 적극적으로 공격하기도 어려웠다.
‘오늘은 그냥 마음을 비워야겠네.’
오늘 경기에서 패배하면 시즌 초반부터 지금까지 지켜온 리그 1위 자리를 PSV에게 내줘야 했다.
하지만 아직 시즌의 1/3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었다.
***
PSV와의 경기는 그대로 끝이 났다.
전반 20분에 페널티킥으로 실점한 아약스는 수적으로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전했지만, 경기를 뒤집지는 못했다.
1위를 놓고 다투던 PSV에게 0-1로 패배하며 2위로 내려앉고 말았다.
경기 종료 이후, 패배의 가장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한 엠마누엘슨에게 비난이 폭주했다.
페예노르트의 부진으로 인해 아약스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된 PSV에게 무기력하게 패배하는 모습을 보인 케이테 감독을 향한 비난도 다시 시작되었다.
“좋겠다? 다들 욕먹는데 너만 칭찬세례여서.”
PSV전 이후 아약스의 클럽하우스.
성배와 베르마엘렌이 훈련을 준비하며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뭐, 나쁠 건 없지. 그게 다 내 입지로 이어지는 거니까.”
엠마누엘슨의 퇴장 이후 급하게 출전한 성배는 갑작스럽게 출전한 선수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PSV의 강력한 윙어, 제퍼슨 파르판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고, 수적인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굉장히 넓은 범위를 뛰어다니는 왕성한 활동량으로 아약스 분전의 최전방에서 활약했다.
“하긴. 잘 뛰긴 했으니까.”
베르마엘렌은 성배를 향한 칭찬들에 흐뭇해 하고 있었다.
챔피언스리그 예선에서 자신의 실수로 탈락할 뻔했던 상황에서 그것을 막아주기도 했고, 벨기에 대표로 함께 활약하면서 성배에게 호감이 생긴 것이었다.
포지션을 변경하긴 했지만, 네덜란드 대표 레프트백 유망주라 불렸던 엠마누엘슨에게 벨기에 대표 레프트백 유망주인 성배가 밀렸던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 벤치로 밀려나는 일이 좀 줄어들 것 같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감독 마음이지.”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성배도 어느 정도는 기대하고 있었다.
아무리 엠마누엘슨이 아약스 유스 출신이고, 네덜란드 자국 유망주라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었다.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여준 성배가 있음에도 기복이 있는 엠마누엘슨을 중용하는 것도 슬슬 끝이 보였다.
네덜란드의 팬들에게서도 점점 비판이 나왔다.
[헹크!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왜 나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는 겁니까!]
그 순간, 복도에 큰 소리가 울리며 분위기가 좋았던 두 사람을 놀라게 했다.
< 낭만필드 - 09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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