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89 >
‘이 경기, 웬만하면 잡고 싶다.’
경기가 진행될수록 승리에 대한 욕심이 커졌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생각보다 더 무기력했다.
‘기량도 그다지, 컨디션도 그다지. 잘만하면 일 한 번 내겠는데.’
백업 선수 위주로 오늘 경기에 나선 맨유였다.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던 맨유의 백업 선수들의 기량경기력은 완전하지 않아 보였고, 기량 자체도 아약스 선수들과 크게 차이 나는 것 같지 않았다.
“좋아, 좋아! 잘 버티고 있어! 조금 더 단단하게!”
하지만 케이테 감독은 무승부로 만족하려는 것 같았다.
‘항상 이해는 되지만. 조금씩 아쉬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무승부로 경기를 마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과 같은 흐름에서는 한 번쯤 승리를 노려볼 만도 할 것 같은데 이럴 때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조금 아쉬웠다.
[IN - 18. 폴 스콜스 / OUT - 24. 대런 플레처]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경기에 나선 맨유였지만, 이렇게까지 되고 보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점점 더 이상해지는 경기 분위기에 맨유는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던 플레처를 빼고 정신적 지주인 스콜스를 투입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오늘 경기를 잡겠다는 교체로 보입니다.”
스콜스와 긱스는 퍼거슨 감독이 신경 써서 체력을 관리해주는 선수들이었다.
체력 관리를 위해 빠졌던 선수를 다시 투입한다는 건 퍼거슨 감독도 그만큼 급하다는 의미였다.
‘밀어붙이자.’
성배는 벤치를 쳐다보았다.
이번 교체는 맨유도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승부수를 던지려면 지금이었다.
‘그래. 케이테 감독은 이런 타입이지.’
하지만 내려온 오더는 더욱 집중하라는 것뿐.
스콜스의 투입으로 매끄러워질 맨유의 공격에 대비해 집중해서 수비하라는 것이었다.
‘이러면 몇 번 없을 기회를 살릴 수밖에.’
아무리 수비적으로 경기를 끌고 가도 완전히 내려앉는 것이 아닌 이상 몇 번의 기회는 찾아온다.
그 기회를 살려 득점을 노릴 수밖에 없었다.
***
[IN - 11. 라이언 긱스 / OUT - 13. 박인진]
“아! 박인진 선수가 교체됩니다. 긱스와 교체되어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경기 종료를 20여 분 정도 남겨놓고 박인진이 교체되었다.
“아쉽네요. 그래도 오늘 맨유에서 가장 빛난 선수 중 한 명이었던 것은 분명해요. 좋았습니다.”
양 팀 모두 이렇다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경기였다.
그 속에서 공수를 오가며 가장 왕성한 활동량을 보였던 박인진은 그나마 베스트라 할 만했다.
“수고했다.”
교체 사인을 본 박인진이 먼저 성배에게 말했다.
“고생하셨어요.”
성배도 박인진의 포옹을 받아들이며 대답했다.
“경기 끝나고 내일쯤 식사나 하시죠. 제가 연락하겠습니다.”
맨체스터 원정에서 박인진에게 밥을 얻어먹었던 성배는 네덜란드에서 자신이 한 번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래. 그럼 내일 전화하고.”
박인진은 성배의 박수를 받으며 그라운드를 빠져나갔다.
“정말 보기 좋은 모습입니다. 두 선수, 마지막까지 훈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한국 중계진의 포장은 끊이지 않았다.
‘긱스라...’
박인진을 상대할 때, 성배는 부지런히 따라서 움직이고 개인 돌파보다는 동료와의 협력을 막는 것에 주력했다.
킥이 정확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측면 쪽 돌파는 크게 위험하지 않은 이상 무리해서 막지 않았다.
긱스는 또 박인진과 달랐기에 막는 방식도 달라야 했다.
‘응?’
긱스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성배의 눈에 맨유의 애매한 패스가 포착되었다.
최후방에서 볼을 잡은 센터백 브라운이 레프트백 에인세에게 길게 넘겨준 롱패스가 좀 짧아보였다.
‘이건... 된다!’
그 패스를 보자마자 성배는 빠르게 뛰어들었다.
패스가 짧았고, 자신의 스피드는 빨랐다.
이 정도 패스는 중간에 끊어낼 자신이 있었다.
“주!! 주!!”
뒤에서 가브리가 급하게 불러세웠지만, 성배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가브리는 케이테 감독 라인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감독의 지시에 맞지 않는 성배의 돌발 행동에 당황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성배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이건 무조건 되는 플레이였다.
“아!! 주성배, 중간 차단 시도!”
브라운의 패스가 짧긴 했지만, 에인세는 제자리에서 볼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배가 이 볼을 커트하기 위해 달려온다는 것을 몰랐고, 설마 빼앗기겠느냐, 하는 안일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안일함은 후회를 불러왔다.
“중간 차단! 허겁지겁 따라붙지만, 늦었고!! 반 데 사르!!”
기어코 성배는 볼을 끊어냈다.
최후방 수비라인에서 돌리던 볼을 빼앗긴 이상, 아무리 맨유라고 하더라도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때려? 제쳐?’
일단 볼을 끊어내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워낙 뒤에서부터 달려왔고, 그 속도로 달려들면서 섬세하게 터치를 조절할 능력은 없었다.
첫 터치는 길었고, 반 데 사르가 어느새 근처까지 나와 있었다.
‘띄우자.’
고민은 짧았다.
안 그래도 멀리 튀어 나간 볼을 정교하게 컨트롤해 제치기에는 아직 자신감이 부족했다.
하지만 정교하게 띄워 반 데 사르의 몸을 넘기는 것은 자신 있었다.
‘제대로다.’
에인세가 사력을 다해 쫓아왔고, 반 데 사르 역시 몸을 날렸지만, 성배의 집중력이 한 수 위였다.
볼의 밑부분을 정확히 찍어 반 데 사르의 몸을 넘긴 성배는 볼을 따라 살짝 점프해 다이빙을 피했다.
“툭 찍어 찬 볼! 그대로 골라인을... 넘어갑니다! 골!! 골입니다!!”
성배의 슈팅은 반 데 사르를 넘은 뒤, 빠르게 굴러가 맨유의 골망을 흔들었다.
비디치와 브라운이 열심히 쫓아가 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주성배 선수!! 챔피언스리그 2호 골이에요!! 박인진 선수의 기록을 넘어서네요!”
2004/05시즌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에서 한국인 최초 챔피언스리그 본선 득점 기록을 세웠던 박인진이었다.
반면, 성배는 박인진이 두 번째 골을 넣지 못하는 동안 두 시즌에 두 골을 터뜨리며 박인진의 기록을 넘어섰다.
한국인 최초 득점 기록은 세울 수 없게 되었지만, 어쨌든 박인진의 기록을 넘어섰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활약이었다.
“수비수인데도 불구하고 매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꼭 득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즌에는 시즌 전체에서 세 골을 넣었는데 챔피언스리그에서 한 골을 넣었고, 이번 시즌에는 두 골을 넣었는데 한 골이 챔스에서 나왔네요.”
귀신같이 임팩트를 찾아 먹는 성배였다.
이러니 성배 본인부터가 하늘이 자신을 돕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브라운의 실책이 가장 크지만, 에인세의 보이지 않는 실책도 치명적이었어요. 노련한 에인세 선수의 플레이라는 믿기 힘들 정도로 너무 안일했죠?”
정확하게 넘기지 못했고, 높이나 거리가 애매했던 브라운의 패스가 가장 큰 실책이었지만, 에인세가 정신만 똑바로 차리고 플레이했더라면 허용하지 않았어도 될 실점이었다.
“이야, 거기서 어떻게 달려나갈 생각을 했냐? 너도 참 대단하다.”
한바탕 골 세리머니를 마치고 수비진영으로 돌아온 성배에게 엄지를 들어 보이는 헤이팅아였다.
“무슨 챔피언스리그 결승전도 아니고. 평소랑 다를 것도 없는데 그 정도 틈은 당연히 보이지.”
시크하게 대답한 성배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상대라고 해서 지나치게 조심하는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성배였고, 그런 생각을 할 자격이 있었다.
강팀이 상대라고 주눅 들기에는 성배의 경험들이 너무나 거칠었다.
“잘했다. 역시. 깡 하나는 괜찮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이별이 매끄럽지 않았던 스탐이었다.
맨유에게 일격을 가할 기회를 만들어 준 성배의 골이었다.
스탐 입장에서는 기쁠 수밖에 없었다.
“깡만 괜찮은 건 아닌데. 뭐, 상관없죠. 야콥의 평가가 크게 의미 있는 건 아니니까.”
“뭐? 하. 확실히 겁이 없어.”
성배의 선취 골로 아약스 선수단의 사기는 확실히 높아졌다. 덩달아 경기가 펼쳐지는 암스테르담 아레나의 분위기도 후끈 달아올랐다.
실점의 빌미를 제공한 에인세는 80분에 바로 에브라와 교체되었다.
질책성 교체인지 체력 안배 차원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에인세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을 수 없을 것이었다.
안 그래도 시즌 초반 팬들에게까지 비난을 받았던 에브라가 점점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치고 올라오는 시점에 패배로 이어진 실수까지 저질렀으니, 에인세에게도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후 경기 종료까지 15분 정도의 시간 동안 거세게 아약스를 몰아붙인 맨유였지만, 끝까지 아약스의 골문을 열지 못했다.
맨유를 상대로 업셋을 연출할 수 있게 된 아약스의 선수들은 남은 시간 동안 필사적으로 뛰었고, 효과적으로 맨유의 공격을 막아냈다.
[주! 주! 주! 주! 주!]
그리고 역시나 오늘 경기의 주인공은 성배가 되었다.
“여러분. 이 소리가 들리십니까? 4만 명이 넘는 네덜란드 관중들이 주성배 선수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습니다!”
“괜히 자랑스럽네요. 네덜란드 축구의 중심에 한국어가 울려 퍼지고 있는 상황이 자랑스럽지만, 이제 더는 저 이름을 대한민국에서 부를 수 없다는 것이 정말 아쉬워요. 정말 안타깝네요.”
암스테르담 아레나에 울려 퍼지는 이 이름은 분명 한글이었지만, 한국 선수의 이름은 아니었다.
그것이 아쉬운 대한민국의 중계진이었다.
“기분이 어때? 거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잡아내는 데 1등 공신이 되었는데.”
경기 종료 후, 스탐이 흔히 볼 수 없는 환한 표정을 하고 성배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기분, 당연히 좋죠. 이 거대한 그라운드의, 이 권위 있는 무대의 주인공이 된 건데.”
이런 일들을 겪을 때마다 성배의 욕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처음에 세웠던 소박한 목표는 이미 흔적을 찾기 힘들 정도로 사라진 상태였다.
“그래. 너라면 앞으로도 계속 이런 경험들을 하겠지. 무던해지지 마라. 이런 순간들을 매 순간 즐기고, 그걸 선수생활의 즐거움으로 삼아. 그러면 오랫동안 정상을 지킬 수 있을 거다.”
성배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다른 선수들에게 발걸음을 옮기는 스탐이었다.
‘무슨 뜻이지? 나한테 가능성이 보인다는 말인가?’
자신의 가능성과 잠재력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과거에 너무 얽매이지 않기로 한 이후,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흘리지 않았다.
세계 최고의 수비수였던 스탐.
그의 말은 성배에게 또 한 번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아, 형!”
스탐의 말에 기분이 좋아져 미소 짓던 성배의 눈에 박인진의 모습이 보였다.
성배는 급하게 달려가 박인진의 앞에 서서 말했다.
“유니폼 저한테 주세요. 제 거랑 바꾸죠.”
“아, 그래. 유니폼 줄 테니까 내일 밥 비싼 거로 사라. 이 유니폼 엄청 비싼 거야. 알지?”
“에이, 어차피 팔 것도 아니고 보관하는 건데 뭘 비싼 척하고 그래요. 하하하. 형이 가져가 봐야 빨랫감인데, 제 방에 걸리는 게 낫죠.”
카메라는 잘 찍고 있나?
박인진과 신나게 수다를 떨면서도 방송을 의식했다.
의외로 코드가 잘 맞아 빠르게 친해지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였다.
박인진에게 남은 단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뽑아먹으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좀 더 친해져야겠지?’
전생에서 자신의 우상이었던 선수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대는 핑계는 아니었다.
전혀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 낭만필드 - 08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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