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88 >
“박인진, 중앙으로 올라갑니다! 대각선 침투!”
아약스의 오른쪽 측면에서는 성배와 박인진의 맞대결이 계속해서 펼쳐지고 있었다.
이번에도 박인진은 측면에서 라인 쪽으로 파고들어 대각선 방향으로 잘라 들어오면서 돌파를 시도했다.
‘그렇게는 안 되지.’
분명 박인진의 스피드는 살아있었다.
유럽 생활 초창기의 빠른 스피드를 활용, 매서운 돌파를 선보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성배의 스피드도 그에 못지않았다.
“주성배, 태클! 걸려 넘어집니다! 아, 휘슬은 불리지 않았습니다.”
돌파가 안 되면 파울이라도 얻어내려 하는 박인진.
최대한 깔끔한 수비로 위험지역에서는 파울을 내주지 않으려는 주성배.
기량 싸움과는 별개로 두 선수의 눈치 싸움도 치열하게 펼쳐졌다.
“에이, 형. 깔끔하게 볼만 건드렸잖아요.”
성배는 넘어진 박인진에게 손을 내밀며 장난스레 투덜거렸다.
“그래? 분명 발에 걸린 느낌이 있었는데. 뭐, 그러면 내가 잘못했고.”
성배의 손을 잡고 일어나는 박인진은 짐짓 의뭉을 떨었다.
박인진도 성배가 볼을 먼저 건드렸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판정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에 어필을 해봤을 뿐이었다.
“와, 이렇게 하는 거예요? 제대로 한 번?”
성배도 웃으며 받아쳤다.
“뭘 새삼스럽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었다.
“보기 좋은 모습입니다. 박인진 선수와 주성배 선수. 서롤르 일으켜주고 흙을 털어주고 있습니다.”
다행히 이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훈훈한 모습이었다.
“경기는 경기이고, 호감은 호감이죠.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같은 한국인이라서 그런지 벌써부터 친해진 것 같네요.”
그리고 그 모습들은 그대로 TV를 통해 송출되었다.
한국 축구팬들은 두 선수의 훈훈한 모습을 여과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
‘아차!’
성배가 예상했던 것처럼 살아남기 위해 스타일을 바꾸고 있는 박인진은 개인돌파를 많이 시도하지 않았다.
또, 간혹 시도하는 돌파는 막아내는 것이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제길, 놓쳤다.’
하지만 원터치 패스와 동료를 활용한 순간적인 공간 침투는 성배에게도 부담이 되었다.
비교적 정확한 숏패스와 공간에 대한 이해력을 바탕으로 한 박인진의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사전에 플레이를 차단하는 부분에서는 굉장한 능력을 자랑하지만, 플레이가 이루어진 이후에 막아내는 것을 어려워하는 성배였기에 일단 허를 찔릴 경우,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박인진, 캐릭에게 주고 달립니다! 다시 리턴 패스!”
성배가 박인진을 쫓아가는 동안 캐릭이 다시 볼을 투입해주었다.
‘이거 잘못하면 늦겠는데.’
확신이 없다면 몸을 날리지 않는 성배였다.
섣부르게 몸을 날리면 상대에게 완벽한 노마크 찬스를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성배도 어쩔 수 없었다.
‘역시!’
그리고 예상대로 박인진은 성배의 태클을 피해 볼을 접었다.
성배는 압박감이라도 최대한으로 주기 위해 그라운드 바닥에 손까지 쑤셔 넣으며 빠르게 일어나려 했다.
“박인진, 영리하게 따돌리고, 크로스!”
“아! 기회예요!”
성배와 박인진을 모두 응원하던 한국의 중계진도 막상 박인진과 성배의 맞대결이 벌어지니 박인진을 응원하고 있었다.
‘일단은 이거라도.’
이미 다시 일어나서 막기에는 늦었다.
일단은 최대한 크로스라도 방해하기 위해 한쪽 발을 쭉 뻗는 성배였다.
“크로스! 아... 조금 길었습니다.”
“루니가 따라가죠!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박인진의 크로스는 중앙에서 대기하던 맨유 선수들을 지나 반대편까지 흘러갔다.
루니가 급히 따라가고 있었지만, 아약스의 수비진은 이미 전열을 갖췄다.
‘크로스... 생각보다도 더 별로인데?’
박인진이 맨유에서 주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킥이 정확하지 못한 것이었다.
득점력의 부재와 개인 기술의 부족, 킥의 부정확성.
이 약점들이 마지막까지 박인진의 발목을 잡고는 했다.
‘이 정도면 이야기가 또 달라지지.’
상대 윙어의 크로스가 위협적이지 않다는 건 수비수가 한결 편하게 수비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측면 돌파가 이루어질 경우, 수비할 때 큰 부담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측면으로 몰자.’
완벽히 막아낼 필요는 없었다.
측면으로 밀어내면 일단 크로스는 내줘도 된다는 생각으로 수비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른발잡이니까.’
오른쪽과 왼쪽에서 모두 활약할 수 있고 양발을 모두 잘 쓰는 박인진이지만, 그래도 오른발잡이였다.
오른발잡이인 왼쪽 윙어는 중앙으로 파고드는 것에 장점이 있었는데, 왼발잡이인 오른쪽 윙백은 상대 윙어의 중앙 돌파를 수비하는 것에 장점이 있었다.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왼발로 태클을 막아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제 내 차례인가?’
수비에 부담이 조금이나마 줄었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의 턴이었다.
***
“플레처의 돌파가 엠마누엘슨에게 막힙니다! 엠마누엘슨, 가브리에게 빠르게 패스하며 역습 시도!”
0-3으로 완패한 지난 3차전과는 달리 이번 4차전은 아약스도 맨유의 페이스를 잘 따라가고 있었다.
퍼거슨 전술의 핵심인 양쪽 측면 윙어들을 잘 막아내고 있는 덕분이었다.
‘플레처 정도면 엠마누엘슨으로 충분하지.’
플레처가 정상급 선수로 성장하는 건 중앙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한 이후였다.
오른쪽 윙어인 지금은 그냥저냥 가능성은 보이는 유망주 수준이었다.
“가브리가 스네이더에게! 아! 박인진 선수가 가로막습니다.”
아약스의 역습 타이밍을 늦춘 건 박인진이었다.
중앙에서 볼이 전개되는 중이었는데, 측면에서 언제 달려간 것인지 스네이더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하여간 활동량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조금 전 상황에서 박인진의 단점을 확인했다면 지금은 박인진의 장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엄청난 활동량을 바탕으로 역습을 허용할 뻔했던 위기에 잠깐이나마 타이밍을 늦춘 것이었다.
‘베슬리도 신경을 좀 써야 할 텐데.’
역습 전술에 최적화된 선수인 스네이더.
에레디비지에 수준에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중거리 슈팅과 킬패스를 빼면 빈말로도 준수하다고 하기 힘든 능력치들은 나중에 분명 스네이더의 발목을 잡을 것이었다.
“박인진의 압박에 스네이더, 어쩔 줄을 모릅니다!”
지금도 박인진의 압박에 스네이더는 조금씩 측면으로 밀려났다.
볼을 끊어내 오히려 역습을 진행하기 위해 에인세도 스네이더를 향해 달려왔다.
‘여기다!’
하지만 성배는 역습에 대비하기 보다 늦춰진 역습을 다시 시도하기 위한 포지셔닝을 시도했다.
만약 스네이더가 볼을 빼앗긴다고 해도 쫓아갈 수 있는 스피드 덕분이었다.
“박인진의 태클! 볼을 건드리는데, 아!!”
그리고 성배의 예상대로 볼이 성배를 향해 굴러왔다.
박인진의 발에 맞은 볼이 성배가 자리 잡고 있던 곳으로 굴러온 것이었다.
“길게 때려 넣습니다!!!”
성배는 고민하지 않았다.
이미 볼이 오기 전에 다음 플레이에 대한 판단이 서있던 상황이었다.
논스톱으로 볼을 길게 때려준 성배는 볼을 따라 질주했다.
“최전방으로 한 번에 연결! 훈텔라르!”
스네이더가 박인진의 압박에 고생하면서 역습 타이밍이 늦어졌지만, 성배가 단 한 번에 볼을 최전방으로 연결하며 늦어진 만큼의 시간을 단축하며 역습 찬스를 살려냈다.
‘이거 가능하다.’
달려들면서 전방으로 볼을 투입해준 이후, 성배는 멈추지 않고 그 탄력을 살려 계속 달리고 있었다.
에인세가 욕심을 내서 볼을 빼앗으려 한 덕분에 성배의 앞은 뻥 뚫려있었다.
‘좋았어!’
훈텔라르가 실베스트리와의 공중볼 경합에서 승리하며 바벨에게 볼을 이어주었다.
비디치가 바벨의 앞을 막으며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보려 했지만, 한쪽 측면이 완전히 무너진 상황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바벨, 오른쪽으로! 주성배!!”
멀리서부터 전속력으로 뛰어온 성배는 딱 좋은 타이밍에 측면을 파고들었다.
바벨의 절묘한 공간 패스가 이어졌다.
“주성배!! 크로스!”
바벨이 성배에게 볼을 이어주는 순간, 비디치는 바벨을 버리고 성배를 향해 달려왔다.
성배의 킥 정확도를 생각했을 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잘 가.’
크로스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비디치는 성배의 페이크에 속아 몸을 날렸다.
하지만 성배는 크로스가 아닌 패스를 선택했고, 원터치로 이어진 패스에 바벨이 좋은 찬스를 잡았다.
“슈팅! 아!! 박인진!! 박인진이 막아냅니다!”
“언제 또 여기까지 왔나요! 결정적인 순간에 몸을 던져 슈팅을 막아냈어요!!”
하지만 바벨의 슈팅은 골문을 노리지 못했다.
어느새 자기 진영 페널티박스까지 달려온 박인진이 마지막 순간 뒤에서 몸을 날려 슈팅을 막아낸 것이었다.
박인진의 발에 맞은 볼은 굴절되어 골문을 멀리 벗어났다.
“정말이지, 엄청난 활동량입니다!! 중원에서 스네이더를 막고 있었는데, 도대체 언제 여기까지 왔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게 박인진 선수의 장점이죠! 볼이 있는 모든 곳에서 나타나거든요? 이건 정말 대단한 거예요! 도대체 이 선수는 심장이 몇 개인가요?”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실점을 막아낸 박인진의 플레이에 중계진은 또다시 흥분했다.
확실히 흥분할 정도로 결정적인 플레이이기는 했다.
“허. 언제 왔어요, 또. 분명 저기 있었는데.”
어시스트 하나를 도둑맞은 성배가 박인진에게 투덜거렸다.
카메라는 지금쯤 분명 박인진을 잡고 있을 것이었다.
“시끄러워, 인마. 너 때문에 큰일 날 뻔했잖아.”
박인진도 성배에게 투덜거렸다.
방금 성배의 돌파는 맨유 입장에서도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아, 지금 박인진 선수와 주성배 선수가 대화하는 모습이 보이죠? 치열한 경기 속에서도 두 선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대화를 나누고 있어요.”
세계 최고의 무대인 챔피언스리그.
그리고 그 챔피언스리그에서 한 경기에 같이 뛰며 맞대결을 펼치고, 쟁쟁한 선수들 속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 오히려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치고 있는 성배와 박인진이었다.
그러면서도 또 시간이 생길 때마다 서로 친분을 과시하며 한국 팬들의 마음을 건드리고 있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이 큰 무대에서 두 명의 한국 선수가 경기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미 중계진에게 성배는 한국 선수였다.
물론, 나쁜 소리는 할 수 없고, 스포츠에서 애국심을 강조하는 멘트가 잘 통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하나 확실한 것은 이 경기를 보고 있는 팬들의 머릿속에서 성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정말이지, 양 팀에서 이 두 선수만 보이네요! 다른 선수들이 조금 더 분발해줄 필요가 있어요!”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다.
박인진의 경우에는 여기저기서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장점인 왕성한 활동량을 선보이고 있었지만, 백업 선수 위주로 출전한 오늘 경기에서 핵심 멤버에 속하는 만큼 조금 더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성배는 아약스가 수비에 집중하는 만큼 자연스럽게 수비수들에게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과 본인의 맹활약이 더해져 이목을 끌고 있었다.
“동료들의 분발이 필요합니다! 맨유도 자존심을 지켜야 하고, 아약스는 2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승리가 꼭 필요하지 않습니까?!”
어쨌든 그런 것도 상관없었다.
보고 있는 팬들이 두 선수의 활약에 기뻐하면 그것이 바로 완벽한 중계였다.
< 낭만필드 - 08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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