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87 >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최근에는 급성장한 PSV에 밀리는 느낌이지만, 여전히 에레디비지에 빅3 중 한 팀이었고, PSV보다 역사와 전통을 갖춘 명문 클럽이었다.
그리고 아약스의 가장 큰 라이벌이기도 했다.
네덜란드 제1의 도시인 암스테르담의 아약스와 제2의 도시인 로테르담의 페예노르트였기에 라이벌이 될 수밖에 없는 관계이기도 했다.
‘페예노르트도 엄청 망가졌구나.’
하지만 이번 시즌의 페예노르트는 뭔가 달랐다.
시즌의 1/3이 지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7위에 불과했다.
그러는 사이 AZ와 트벤테 등 신흥 강자들이 나타나면서 에레디비지에 빅3의 붕괴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중요한 경기에 백업이라고?’
성배는 페예노르트와의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지난 그로닝겐과의 경기에서 뜨거운 맛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케이테 감독은 공격적인 전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헤이팅아, 베르마엘렌, 그리게라, 스탐이라는 훌륭한 센터백 진용에서 두 명을 쉬게 하고 싶지 않아 했다.
결론은 스리백과 측면 윙어 기용이었다.
‘젠장. 요즘 시대에 스리백이라니.’
플랫 4-4-2 전술부터 시작된 포백 열풍은 수그러들기는커녕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4-4-2 다이아몬드, 4-3-2-1 트리, 4-2-3-1, 4-3-3 등 수많은 포백 파생 전술들이 현대 축구를 지배하고 있었고, 스리백은 후반 막판 승기를 굳히는 용도로나 사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케이테 감독은 스리백을 고집하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상대 수준이 아쉬운데, 계속 약팀과의 경기만 나서다니.’
성배의 출전 횟수도 적지는 않았다. 오히려 많은 편이었다.
수비를 강화해야 하는 진짜 강팀과의 경기나 포백을 운용하는 약팀과의 경기에는 거의 선발로 출전하고 있었다.
다만, 페예노르트나 에인트호벤, 셀틱, AZ 등 수준이 비슷한 경쟁팀과의 경기에서는 거의 벤치를 지키고 있었다.
‘뭔가 특별한 계기가 필요해.’
곧 세계 최고의 윙어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호날두를 아무것도 못 하게 막아버린 지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챔피언스리그 경기처럼.
***
페예노르트와의 경기에서, 그것도 원정에서 4-0의 대승을 거둔 케이테 감독은 일단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최대 라이벌과의 원정 경기에서 상대를 완전히 압도하며 대승을 거두었으니 팬들의 비난도 일단 수그러들었다.
케이테 감독을 극찬하는 팬들도 나왔을 정도였다.
‘좋지 않은데 말이야.’
페예노르트 전 이후에 펼쳐진 ADO 덴 하그와 헤렌벤과의 경기에는 성배도 출전했다.
두 경기에서 모두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었고, 코너킥으로 어시스트도 한 개 기록했지만, 성배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계속 이렇게 팀이 잘 나가면 케이테 감독이 자신의 방식을 바꿀 이유가 없는데.’
초반에 팀이 흔들렸을 때, 팬들의 강한 비난에 직면한 케이테 감독은 여러 변화를 주었다.
하지만 아약스는 에레디비지에 내에서 적수가 거의 없는 클럽이었기 때문에 금방 제자리로 돌아왔다.
여기서 또 변화를 줄 필요는 없었다.
‘전술이 좋아서 이런 건 아닌데.’
성배의 생각은 그랬다.
케이테 감독의 전술은 분명 뛰어났다.
선수단 장악력과 관리 방식에는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지만, 전술적 능력은 분명히 있었다.
그래도 아약스에게는 지금보다 더 잘 어울리는 전술이 분명 있을 것이었다.
‘포백을 써야 하는데. 수비 쪽 자원 낭비가 너무 많아.’
스리백이 사장된 이유부터가 선수 자원의 낭비였다.
아직은 투톱을 가동하는 팀이 더 많은데, 이럴 경우 센터백 한 명이 노는 경우가 잦았다.
그런 경우를 줄이려 하다가 포백이 떠오른 것이었다.
‘마우로나 케네스를 쓰면 더 공격적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데, 왜 센터백 세 명을 쓰는 건지.’
자신이 출전하고 싶어서 포백을 원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객관적으로 보려고 해도 포백이 더 좋은 선택이었다.
지난 시즌 아약스의 챔피언스리그 16강에 큰 힘을 보태며 훈텔라르의 득점왕 등극을 도왔던 마우로 로잘레스와 지난 시즌 10골을 넣었던 케네스 페레즈 등 좋은 공격수들이 뛰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벌써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곧 들고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거야.’
케네스 페레즈는 교체로 출전하면서도 훈텔라르보다 더 많은 골을 넣고 있었다.
그러나 주전으로 나서지 못했다.
케이테 감독의 단점 중 또 한 가지는 로테이션 활용에 인색하다는 것이었다.
‘계속 이대로 가면 한 번 흔들린다.’
로테이션 선수들을 믿지 못한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었다.
그들도 충분히 자신을 증명하고 네덜란드의 최고 명문, 아약스에 입단한 선수들이었다.
팀을 위해 많은 것들을 해주었던 선수들이었다.
이번 시즌부터 감독직을 맡은 신임 감독이 무시하고 그래도 되는 선수들이 아니었다.
***
‘그래도 챔피언스리그 경기에는 계속 나와서 다행이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조별리그 4차전.
이번에도 성배는 선발 출전이었다.
‘흠. 박인진 선배도 나왔네.’
과거부터 일면식도 없었음에도 선배라고 호칭했기 때문에 이게 편했다.
별 의미는 없지만.
“이번에는 호날두 안 나왔네? 너한테 겁먹었나 본데?”
함께 선발 명단을 확인하던 베르마엘렌이 헛소리를 지껄였다.
“겁은 무슨. 선수 중 절반은 백업 요원인데, 뭐.”
조별리그 3차전까지 3전 전승을 거두고 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
여유가 있었기에 이번 원정에는 1.5진을 출전시켰다.
“1.5군인데 이겨야지? 아무리 수준 차이가 난다지만, 1.5군은...”
베르마엘렌은 맨유 1.5군을 무시하고 있지만, 글쎄.
과연?
“헛소리하지 마라. 맨유 정도 되는 클럽이면 한 팀을 둘로 나눠도 UEFA컵 출전권 정도는 노릴 수 있다.”
성배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며 나타난 사람은 아약스 선수들 중 유일하게 빅클럽 경험이 있는 스탐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트레블을 기록할 당시 핵심 멤버로 활약했고 AC 밀란 소속으로도 빅 이어를 들어 올리며 완벽한 커리어를 쌓은 그가 하는 말이었기에 설득력이 있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팀을 둘로 나누고 그 두 팀과 다섯 경기씩 한다면 우리가 얼마나 이길 수 있을까? 합쳐서 열 경기 중 세 번 이기면 잘하는 거겠지.”
맨유 정도의 빅클럽에서 뛰는 선수들은 대부분 에레디비지에나 포르투갈 프리메라리가 등 중견급 리그를 씹어먹은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빅클럽으로 건너가 그런 경험이 있는 선수들끼리 또 경쟁을 펼쳐 거기서도 살아남은 선수들이었다.
“뭐, 그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질 순 없죠.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프라이드가 있는데.”
그러니까 져도 된다.
스탐의 말이 이런 뜻일 리는 없었다.
그저 긴장하자는 뜻이었다.
맨유의 2군이라고 해도 실력으로 앞서는 것은 아니니까 최선을 다하라는 것.
“그렇지. 어쨌든 우리는 네덜란드의 자존심이니까.”
2004/05시즌에 PSV가 챔피언스리그 4강에 올라가는 돌풍을 일으키긴 했지만, 그래도 네덜란드의 얼굴은 아약스였다.
아무리 맨유가 대단한 클럽이라고는 하지만, 2군급 선수들이 다수 출전한 맨유에게 패배할 수는 없었다.
“박인진의 팬이라고 했던가? 팬이라고 해서 봐주고 그러면 안 된다.”
“허, 누가 누굴 봐줘요. 맨유 선수인 그쪽에서 봐주면 모를까.”
라이트 윙백으로 경기에 출전한 성배.
그리고 레프트 윙으로 경기에 출전한 박인진.
오늘 경기에서 두 선수는 맞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
“지난 3차전에서 주성배 선수에게 호되게 당한 호날두는 오늘 경기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퍼거슨 감독이 휴식을 주었죠? 현재 맨유는 여유가 있고, 호날두 선수는 많은 경기에 출전하고 있기에 쉴 때가 되기는 했어요.”
오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양쪽 윙어는 왼쪽의 박인진과 오른쪽의 플레처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예전 같지 않은 긱스와 거의 매 경기 출전하면서 휴식이 필요한 호날두를 빼고 다음 순서의 선수들을 출전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로테이션 및 백업 멤버들이 대거 출전했죠? 맨유는 오늘 경기를 쉬어가는 경기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물론 이 명단으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었다.
그래도 전력을 내보낸 경기는 분명 아니었다.
“아! 말씀드리는 순간, 오셔의 패스가 박인진 선수에게 이어집니다!”
박인진이 볼을 잡았을 뿐인데, 캐스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오늘 여기가 키포인트죠! 박인진 선수와 주성배 선수의 맞대결이 펼쳐지니까요!”
박인진과 성배가 맞붙게 된 아약스의 오른쪽 측면.
한국 팬들의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막았다고 욕먹는 건 아니겠지?’
모든 한국 팬들이 박인진의 맹활약을 바랐다.
성배의 이미지가 아주 조금은 좋아졌다고 해도 박인진과 비교하면 1/100도 되지 않을 것이었다.
만약 성배가 박인진을 꽁꽁 묶어 교체라도 된다거나 향후 입지에 타격이 있기라도 하면, 귀화했을 때보다도 더 많은 욕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돌파? 패스?’
개인 돌파 능력은 분명 호날두가 한 수 위였다.
하지만 성배에게는 거의 원 패턴이나 다름없는 지금의 호날두보다 박인진을 막는 것이 더 어려웠다.
성배의 수비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 수싸움에서의 우위를 먼저 깔아두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신 못지않게 뛰어난 축구 지능과 전술 이해도를 가진 선수를 막는 것이 개인기량이 뛰어난 선수를 막는 것보다 힘들었다.
‘역시!’
하지만 그런 박인진이라고 하더라도 무기에 한계는 있었다.
유럽 무대에서 활약하는 윙어, 그것도 빅클럽에서 활약하는 윙어들 중에서는 신체 능력과 테크닉이 부족한 편이었기에 개인 돌파보다 동료를 활용한 플레이를 시도하는 빈도가 훨씬 높았다.
‘아직 그렇게 원숙해질 때는 아니지.’
PSV 시절까지는 개인돌파도 즐기는 선수였다.
그런데 맨유 이적 후 살아남기 위해 스타일을 바꿨다.
지금은 과도기.
아직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잡기에는 경험이 많지 않았다.
“아악!”
‘그리고 이렇게 되는 거지.’
몇 년이 지나면 다르겠지만.
동료를 활용한 플레이와 뛰어난 전술 이해도, 공간 침투 능력 등이 장점인 박인진에게 지금은 새로운 플레이 스타일을 정립하는 과도기였다.
또 한 가지.
피지컬 보완이 아직 되지 않은 시기였다.
“아! 박인진 선수, 주성배 선수와의 몸싸움에서 밀려나면서 넘어집니다!”
지난 시즌이 끝나고 이번 시즌이 시작하기 전.
토까지 해가면서 식단조절과 하드한 트레이닝을 병행한 성배의 피지컬은 평범한 아시아인의 수준을 넘어있었다.
몸에 배지 않아서 아직 약점이라 불리고 있을 뿐, 의도를 가지고 먼저 시도한 몸싸움에서는 쉽게 밀리지 않았다.
-삐-익!
“휘슬! 주심이 휘슬을 불었습니다. 파울이 선언된 것 같습니다.”
“역시, 박인진 선수네요. 힘에서는 밀렸는데, 노련하게 파울을 얻어냈어요.”
대신 피지컬을 보완하기 전의 박인진은 뛰어난 파울 유도 능력으로 약점을 가리고 있었다.
‘허. 정상적인 플레이인 것 같았는데.’
허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성배 본인도 파울을 유도하는 교묘한 액션과 보이지 않게 파울을 저지르는 등의 플레이에 능했고, 이것을 능력이라 생각하는 쪽이었다.
“이야, 노련하시네요.”
“뭐, 이 정도쯤이야. 떡대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는 발악이지 뭐.”
성배는 넘어진 박인진에게 팔을 뻗어 일으켜주었다.
다른 선수는 몰라도 박인진에게만큼은 호의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주성배 선수가 넘어진 박인진 선수를 일으켜줍니다.”
“지금은 경쟁할 수밖에 없지만, 두 선수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죠? 보기 좋네요. 이런 것이 스포츠의 매력 아니겠습니까?”
박인진과 주성배.
올라간 높이에는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유럽 무대에서 신체적인 약점을 껴안고 버티며 이런저런 노하우를 쌓은 한국인.
화려하지는 않지만, 못지않게 치열할 것이 분명한 대결.
그 서막이 올랐다.
< 낭만필드 - 08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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