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85화 (60/356)

< 낭만필드 - 085 >

‘그렇게 계속 다리를 흔들어서 어쩌려고.’

이미 성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드리블 루트가 막힌 호날두는 성배를 흔들기 위해 계속해서 헛다리를 짚고 있었지만, 성배는 흔들리지 않았다.

“두 선수, 가만히 서서 서로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눈치 싸움이 팽팽하네요!”

가만히 서서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두 선수였지만, 곧 무언가 변화가 있을 것이었다.

많은 팬들이 둘의 대결에 집중하고 있었다.

‘지금!’

호날두가 헛다리를 짚는 동안 가만히 지켜보던 성배는 뭔가 조금 다른 동작이 보이자 바로 발을 뻗었다.

헛다리에서 진짜 드리블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8할 이상은 드리블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아무리 페인트를 줘도 타이밍을 잡기가 어렵지 않았다.

“으악!”

볼을 치면서 앞으로 나가려고 했던 호날두는 볼이 제자리에 멈추면서 앞으로 나아가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주성배의 태클! 호날두의 돌파 시도를 순식간에 막아냅니다!”

“완벽한 태클! 호날두가 출발하기도 전에 막아버렸어요!”

성배의 멋진 태클에 한국 중계진들이 환호했다.

이들의 해설 방향이 성배를 응원하는 쪽으로 움직일수록 TV로 보고 있는 한국 팬들 역시 조금씩 성배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건방지게.’

호날두가 앞으로 날아가는 것을 흘깃 쳐다본 성배는 앞으로 볼을 전개했다.

오늘은 함부로 자리를 비우기보다 지키면서 수비하는 컨셉이었다.

‘나중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네가 날 물로 볼 수 있는 급이 아니지.’

조금 전에는 호날두가 자신을 좀 쉽게 생각했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번 플레이로 자신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 더 진지해진다면 상황이 조금은 달라질 것이었다.

‘조금 더 건방져 줬으면 좋겠는데.’

열혈 청춘 만화처럼 ‘전력을 다해라! 전력을 다하지 않는 건 나에 대한 모독이다!’라는 말을 지껄일 생각은 없었다.

호날두가 방심해서 자신이 막아냈다고 해도 결과는 자신이 호날두를 막아낸 것이었다.

‘굳이 힘들 필요 없잖아. 서로.’

호날두는 오늘 한 번 막힌다고 해도 큰 타격은 없었다.

자신은 오늘 호날두를 막아내면 확 뜰 수 있었다.

‘오늘 좀 쉬어. 나도 편하게 좀 막게.’

조금만 더 건방져 주면 서로서로 편할 텐데.

‘그럴 리 없겠지.’

아직도 씩씩대고 있는 호날두를 보면서 그런 바람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승부욕의 화신다운 모습이었다.

‘어쨌든 나도 져줄 생각은 없어.’

승부욕이 강한 편은 아니었다.

일반인 기준으로는 강하지만, 승부욕 그 자체인 프로선수 중에서는 그리 강하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승부욕과는 별개로 져서는 안 되는 이유가 많았다.

“호날두, 다시 한 번 주성배 선수에게 다가갑니다.”

호날두와 성배의 대결은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포기하지 않네요. 절대 볼을 돌리지 않아요. 계속해서 정면으로 부딪치고 있죠?”

전반전이 절반 정도 흐르는 동안 호날두는 성배를 상대로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호날두의 돌파는 성배의 수비에 꽁꽁 막혀있는 상황이었다.

‘이 정도 했으면 조금이라도 쉬어도 되는데.’

성배라고 해서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막아내고는 있지만, 호날두는 호날두였다.

드리블 일변도라고 해도 그 드리블을 막는 것 자체가 쉬울 리 없었다..

“동료들도 호날두를 믿어주고 있습니다. 계속 볼이 투입되고 있어요.”

맨유 선수들도 그런 호날두의 승부욕을 지원해주고 있었다.

“호날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미래거든요? 자신보다도 더 어린 선수에게 막히면 안 되죠. 이 한 경기보다 호날두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게 어쩌면 더 중요할 수도 있어요.”

호날두의 자존심.

퍼거슨 감독은 물론이고 동료 선수들도 미래의 호날두가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따위에서 자존심을 다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호날두는 맨유의 미래였다.

“그리고 전반전에 조금 고전한다고 해도 맨유는 이 경기를 승리로 장식할 자신이 있을 거예요. 이기는 건 당연한 거고, 호날두의 자존심도 세워주려는 거겠죠.”

사실 이 경기에서 아약스가 승리할 확률은 높지 않았다.

최근 아약스는 과거의 영광을 잃어 유럽 대항전 성적이 그다지 좋지 못한 편이었다.

게다가 여기는 맨유의 성지, 올드 트래포드.

맨유의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자존심 챙기다가 여럿 골로 갔다.’

싸움을 걸어온다면 피할 생각은 없었다.

‘자주 노출될수록 나한테도 좋은 거니까.’

막아낼 수 있다는 전제하에, 호날두가 많이 덤벼주면 많이 덤벼줄수록 좋았다.

‘음?’

그때, 성배를 향해 달려오던 호날두가 스콜스에게 볼을 빼주었다.

이번에도 일대일로 달려들 것이라 예상했던 성배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평정을 찾았다.

‘어차피 다시 돌려주겠지.’

스콜스에게 볼을 돌리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빠르게 침투를 노리는 모습이 보였다.

이건 패스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돌파에 도움을 받기 위해 패스한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퍽!

‘역시...’

먼저 자리를 잡은 성배의 등에 호날두가 와서 부딪쳤다.

처음에 한 번 막힌 뒤, 자존심이 상한 듯 돌파 만을 고집하던 선수가 패스를 했다.

솔직히 너무 뻔한 플레이였다.

“주심! 파울! 파울이잖아요!!”

성배의 등에 부딪혀 넘어진 호날두가 항의해보았지만, 주심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아니었잖아.’

가볍게 양팔을 들면서 결백하다는 사인을 보낸 성배였다.

주심의 단호한 고갯짓을 본 뒤, 중앙의 베르마엘렌에게 볼을 넘겼다.

“훗.”

그리고 이제 막 일어나려던 호날두를 보고 웃어주었다.

웃음과 비웃음의 사이, 그 애매한 경계에 있는 웃음이었다.

‘네가 다혈질인 건 유명하니까.’

다혈질에 승부욕이 지나칠 정도로 심각한 호날두.

그런 호날두라면 상대적으로 무명이나 마찬가지인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고전하는 지금, 상당히 흥분해있을 것이었다.

침착하지 못한 선수를 상대하기가 훨씬 더 쉬웠다.

‘이제 슬슬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 볼까?’

만만치 않은 상대인 호날두를 상대하기 위해 성배는 몇 가지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우선 실력으로 막아내야 하는 단계는 지났다.

가장 어려웠던 부분을 무난히 넘긴 덕분에 다음 단계가 더욱 수월해졌다.

***

“긱스, 중앙으로 넘겨주고, 스콜스!! 골!! 골입니다!! 폴 스콜스의 중거리 슈팅이 불을 뿜습니다!”

성배는 호날두를 완전히 틀어막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약스가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성배와 호날두의 대결과는 별개로 팀의 전력 차이와 원정 경기라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힘들었다.

“전반전 39분, 의외로 고전하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드디어 첫 골을 뽑아냈습니다!”

“경기를 주도하고 있었거든요? 다행히 전반전이 끝나기 전에 선취 득점을 기록하네요.”

한국 중계진이 해외 축구를 중계하는 것이었지만, 거의 한국 중계진이 한국 대표팀 경기를 중계하는 느낌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박인진의 합류 이후 ‘국민 클럽’이 되었고, 한국팀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오죽하면 ‘제.한.맨’(제발 한국인이면 맨유 응원합시다.)라는 유행어까지 있었다.

“측면에서 호날두가 주성배 선수에게 막혀있기는 합니다만, 맨유에는 호날두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긱스와 스콜스, 두 노장이 한 건 해주었네요. 호날두가 최근 떠오르고 있지만, 아직은 노장들의 역할이 커요.”

계속 막히고 있음에도 호날두를 밀어줄 수 있었던 맨유의 자신감에 근거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득점이었다.

호날두를 계속 밀어줬지만, 결과는 나오지 않았고, 그 상태로 전반전이 끝나가자 베테랑 선에서 선취 골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허. 마음만 먹으면 골은 언제든지 넣을 수 있다는 건가?’

무슨 만화도 아니고.

성배는 어이가 없었다.

호날두를 아무리 밀어줘도 전반전 안에는 해결이 나지 않을 것 같자, 호날두를 배제하고 공격을 진행, 바로 골을 넣어버렸다.

“그래도 아약스에게 희망은 있습니다. 호날두 선수가 주성배 선수에게 완벽하게 막혀 있지 않습니까?”

“예. 분명 아약스 쪽에 좋은 소식이죠. 사실상 공격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호날두 선수가 막혔기 때문에 그나마 맨유의 공격이 살짝 무딘 감은 있거든요? 쉽지는 않겠지만, 아직 포기하기는 일러요.”

팀이 리드를 빼앗긴 것과는 별개로 성배의 플레이는 훌륭했다.

성배에게 호감이 있는 한국 중계진들은 성배의 플레이도 짚어주었다.

‘어차피 오늘 이길 거란 생각은 안 했어. 나만 잘하자.’

처음부터 승리할 가능성이 크지 않았던 경기였다.

이변은 다음 경기인 홈경기에서 노려보도록 하고, 오늘은 호날두와의 맞대결을 승리로 장식하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

후반전이 시작되자마자 루이 사하의 두 번째 골이 터졌다.

지난 시즌 21골을 넣은 반 니스텔루이를 쿨하게 내칠 수 있었던 것은 사하가 있어 준 덕분이었고, 사하는 그 기대에 부응해주었다.

분명 재능이 있는 선수였다.

부상만 없다면.

“경기 분위기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쪽으로 확연히 기울었지만, 여기는 여전히 아약스가 우세를 점하고 있습니다.”

호날두가 다시 한 번 성배를 향해 볼을 몰고 들어왔다.

어차피 경기가 기울어서 그런 것인지 퍼거슨 감독과 스콜스가 대화를 나누더니 다시 호날두에게 볼을 투입한 것이었다.

그러나 후반전에도 성배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측면 공격을 가뿐히 막아내는 중이었다.

‘표정이 저렇게 구겨져 있는데 뭘 자꾸 시켜.’

자신에게 계속 막히는 것이 분한지 호날두의 표정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듯한 표정이지만, 전의가 지나쳐 보였다.

‘풀백이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늘 맨유의 라이트백은 존 오셔.

퍼거슨 감독의 만능열쇠지만, 어느 한 포지션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선수는 아니었다.

수비력은 봐줄만한 수준이었지만, 공격력은 떨어졌고, 호날두를 지원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럼 이제 시작해볼까?’

호날두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

성배는 ‘호날두 죽이기’의 다음 스텝을 시작했다.

“호날두, 천천히 앞으로 전진합니다. 신중한 모습입니다.”

“아무래도 신중할 수밖에 없죠? 오늘 주성배 선수의 수비에 철저히 막히고 있으니까요.”

호날두가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성배도 자세를 낮췄다.

‘와라.’

“호날두, 가속합니다! 돌파 시도!”

신중하지만, 소심하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나름대로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는지 사이드라인 쪽으로 바짝 붙어서 돌파를 시도하고 있었다.

‘여전히 과감할 수 있다니. 자신에 대한 믿음이 대단한데?’

온종일 막혀도 여전히 과감할 수 있다는 것.

본인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면 쉽게 보여줄 수 없는 모습이었다.

‘내가 미래에서 왔는데, 넌 곧 최고가 될 거다.’

그래도 오늘은 그냥 보내줄 수 없었다.

-퍽!

-삐-익!

“주성배, 거친 태클! 멀리 날아가는 호날두!”

“반칙이 선언됩니다. 주성배 선수가 거친 파울로 막아냈네요.”

흥분한 호날두를 막기 위해 성배가 선택한 방법.

바로 거친 플레이로 지금보다 더 흥분시키는 것이었다.

한동안 보여주지 않으면서 아껴놓았던 무기를 다시 한 번 꺼내들었다.

< 낭만필드 - 085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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