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84화 (59/356)

< 낭만필드 - 084 >

“로번이랑 호아킨한테 신나게 털렸던데?”

베르마엘렌이 딴지를 걸었다.

“... 호아킨은 몰라도 로번은 어떻게든 막았어.”

성배가 변명했다.

‘호날두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는 건 이번 시즌 후반기부터야. 아직은 충분히 막을 수 있어.’

2006/07시즌, 호날두는 커리어 처음으로 리그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시대, 그 서막을 열었다.

다만, 그 시작은 후반기부터였다.

지금까지는 리그에서 두 골을 기록하고,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아직 골이 없었다.

아직은 유망주 레벨을 넘어서지 못한 상황이었다.

‘제대로 막아줘야지. 어디 가서 호날두 꽁꽁 묶었다고 어필하게.’

최근 들어 미래의 월드클래스 선수들과 붙을 일이 많아진 느낌이었다.

성배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

“그러고 보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PSV에서 이적한 박이 있지 않아?”

헤이팅아가 경기를 앞두고 성배와 함께 몸을 풀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을 걸어왔다.

“응. 그렇지. 박인진.”

성배가 대답했다.

“키야, 대단했지. 요즘도 잘 나가더라?”

에레디비지에에서 몇 번 부딪혀본 전적이 있는 헤이팅아가 탄성을 터뜨렸다.

리그 최상위권의 윙어로 활약했던 박인진은 헤이팅아는 물론이고 다른 수비수들에게도 꽤 골치 아픈 존재였다.

“잘나가는 편이지. 세계 최고라는 맨유에서 그 정도면.”

확고한 주전은 아니었지만, 주전이나 마찬가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의 경기 수를 소화하고 있었다.

지난 시즌에는 리그에서만 주전, 교체 포함해 30경기 넘게 출전했을 정도였다.

‘확실히 대단하지.’

전생에서 박인진은 성배의 우상이었다.

공격수와 윙어로 뛰는 동안 성배는 박인진의 등을 보고 뛰었다.

피지컬과 스피드가 떨어지고 체력은 괜찮은 편이었기에 그를 따라 해보려고도 많이 했지만, 그것도 또 다른 재능의 영역이라는 것만 깨달았을 뿐이었다.

“박이랑 너랑 같은 나라 아니야? 박도 한국 출신으로 알고 있는데.”

헤이팅아가 말했다.

박인진에게 강렬한 인상을 받은 듯 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같은 나라 출신이지. 나야 귀화했으니까.”

성배는 오류를 바로잡아주었다.

“아아, 뭐, 그렇지.”

“그나저나, 박이라고 하면 작년까지 PSV에서 뛰었던 그 선수 말하는 건가?”

박인진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 사이로 베르마엘렌이 끼어들었다.

베르마엘렌도 2004/05시즌 후반기에 RKC 발베이크에서 임대로 열세 경기를 뛰었기 때문에 박인진과 함께 뛴 적은 있었다.

“맞아. 그 선수. 만만치 않은 친구지. 나도 애먹었었으니까.”

어느새 스탐도 다가와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2004/05시즌, PSV가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했을 때, 4강 상대였던 AC 밀란 소속으로 맞대결을 펼친 적이 있었다.

AC 밀란은 1, 2차전 합계 4-4로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겨우 결승에 진출했었다.

“막기 굉장히 힘든 친구였지. 화려한 건 아닌데 어찌나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던지. 공간 찾아다니는 것도 잘했고.”

스탐과 네스타의 수비를 뚫고 파고들어 선취골을 넣었던 선수가 바로 박인진이었다.

이 경기를 기점으로 빅클럽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하고 발롱도르 1차 후보에 들었을 정도였으니, 스탐의 기억에 강하게 남은 것도 당연했다.

“아, 굉장히 까다로운 선수였는데. 오늘 나오나? 나오면 수비수들 피곤할 텐데.”

헤이팅아의 말처럼 이미 박인진의 엄청난 활동량은 유명했다.

지금의 박인진은 커리어 중반기 이후의 이미지와는 달리 공격적인 윙어였지만, 그 체력은 어디 가지 않았다.

“오늘은 안 나오더라. 벤치야.”

다행히 오늘 박인진은 벤치에서 경기를 시작했다.

리그 경기를 마치고 3일 만에 잉글랜드까지 날아와 경기를 치러야 하는 아약스 선수들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이었다.

“감회가 새롭다거나 뭐 그런 느낌은?”

베르마엘렌이 성배를 보며 물었다.

“당연히 새롭지. 나도 팬이었으니까. 특히 2002년에.”

로번이나 호아킨, 제라드 등 세계적인 선수들과 이미 그라운드 위에서 만나 본 성배였지만, 박인진은 그들과 다른 의미였다.

윙어로 활약했던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성배의 우상이자 롤모델이었던 박인진이었다.

한국 선수로서 유럽 무대의 최정상에서 당당히 경쟁하는 박인진의 모습은 성배에게 용기를 주었었다.

‘한 번 찾아가 봐야겠다.’

***

잠시 뒤, 박인진을 비롯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들도 그라운드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몸을 풀고 있는 그들의 곁으로 성배가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뜬금없이 들려오는 한국말에 깜짝 놀란 박인진이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 그래. 성배라고 했지? 반갑다! 아, 미안. 말은 놔도 되겠지?”

그리고 성배의 얼굴을 보며 크게 반가워했다.

박인진도 외국 생활을 오래 하면서 한국 사람을 많이 보지 못하고 외국어만 써야 했기 때문에 반가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당연히 놓으셔도 되죠. 진짜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정말 팬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냉정하며 계산적인 성격이 되었지만, 박인진을 보고서도 냉정을 유지하기는 힘들었다.

그라운드에 나타난 박인진의 모습을 본 순간, 성배는 과거로 돌아갔다.

“나도 한번 보고 싶었어. 작년에 네 소식 들었거든. 귀화했다는 거.”

유럽에서 활약하는 한국 선수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박인진은 성배의 소식을 들었을 때, 혼자 있었음에도 소리 내 탄식했을 정도로 아쉬워했었다.

유럽 무대를 알고 있는 박인진 입장에서는 열여덟 살에 안더레흐트 주전으로 활약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쉽더라. 굉장한 유망주 한 명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성진곤의 기량이 떨어지면서 윤기표를 오른쪽으로 돌릴 생각을 하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팀에 좌우를 가리지 않는 성배가 합류하면 분명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박인진이 아쉬워하는 부분은 그것이었다.

“죄송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사연이 있어서 그런 결정을 내렸습니다.”

성배는 확신을 가지고 진행한 일이었기에 전혀 후회하지 않았지만, 실망했을 박인진에게 사과했다.

“아니, 뭐. 사과할 건 없고. 나도 이해는 해. 귀화의 이점을 설명하려면 입이 아플 정도니까.”

유럽 무대에서 직접 뛰어본 선수가 아니라면 귀화를 이해하기 힘들 것이었다.

박인진은 직접 뛰고 있는 선수였기에 이해해주었다.

“네덜란드 생활은 어때?”

PSV 소속으로 네덜란드에서 활약했던 박인진이기에 두 사람 사이에는 공통분모가 존재했다.

“뭐, 집이 너무 좁은 걸 빼면. 살만하죠.”

“하하, 그건 맞아. 나도 진짜 힘들었다니까? 그러니까 그게...”

두 사람은 짧은 시간이지만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가 카메라를 통해 어디론가 중계되고 있었다.

“아! 우리 박인진 선수와 주성배 선수가 그라운드 위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입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진출한 박인진은 한국에서 엄청난 인지도와 인기를 자랑했다.

당연히 오늘 이 경기도 한국에 중계되고 있었다.

성배는 그것을 노린 것이었다.

“주성배 선수, 먼저 찾아와 깍듯하게 인사하네요.”

“그럼요! 국적이 바뀌었다고 해서 피가 어디 가는 건 아니거든요? 비록 벨기에 국적을 가지고 있는 선수이지만, 몸속에 흐르는 피는 한국인의 것이니까요.”

안 그래도 이제야 조금씩 한국 선수들이 세계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국 축구의 힘을 보여주는 이 선수들을 보면서 자부심을 느끼는 선배 축구인들과 팬들이었고, 성배 정도면 충분히 이들에게 자부심을 안겨줄 수 있었다.

어떻게 국적 문제만 넘길 수 있다면.

“두 선수. 굉장히 즐거워 보입니다.

“같은 한국 출신 선수들끼리 유럽 최고의 무대에서 만났으니 반갑기도 하겠죠! 아, 부럽네요.”

박인진과 친하다는 것만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소속의 몇몇 선수들이 한국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모습이 노출되면 자신의 이미지 세탁에도 꽤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성배는 판단했다.

‘이 정도면 카메라에 잡혔겠지?’

“선배님. 그럼 경기 준비하세요. 제가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것 같네요.”

이제 경기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

“아, 그러네. 오랜만에 한국말을 해서 그런지 시간 가는지도 몰랐다.”

박인진도 아차하는 표정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윤기표와 함께 뛰었는데, 팀이 갈라지면서 함께 떠들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래, 그러면 다음에 암스테르담에서 또 보자.”

“예. 제가 그때 식사 한번 대접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악수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대화를 마치면서 박인진은 성배의 손을 잡고 끌어당겨 어깨를 두드려주었고, 이 장면은 한국의 TV를 통해 생생히 중계되었다.

***

‘미친. 하여튼 정말 대단하네.’

경기 시작 직전, 함께 서서 악수를 하는 순간이었다.

성배는 자신의 앞을 지나치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루니, 비디치, 에브라, 스콜스, 긱스, 사하...’

TV에서나 봤던 선수들이 자신의 앞을 지나가면서 자신의 손을 잡고 있었다.

지난 시즌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아직은 적응이 되질 않았다.

‘호날두...’

오늘 맞대결을 펼칠 호날두도 성배와 악수를 하고 지나갔다.

‘아무것도 못하게 해주지.’

지금은 두 선수 모두 유망주 신분이었다.

물론, 호날두는 세계 최고의 유망주이고, 어느 정도 유망주 티를 벗고 월드클래스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반면, 성배는 이제 조금씩 빅리그에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수준이었다.

‘내 커리어의 밑거름이 되라.’

그래서 오늘 호날두와의 대결은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설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호날두를 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었다.

“잘해. 저거 굉장한 녀석이니까.”

악수가 끝나고 자리를 잡기 전, 헤이팅아가 다가와 경고했다.

“너나 잘해. 크리스티아누도 대단하지만, 아직 라이언만큼은 아니니까.”

오늘 성배는 왼쪽 윙백으로 출전했고, 헤이팅아는 오른쪽 윙백으로 출전했다.

스리백에 윙백 기용.

한 수 위의 전력을 갖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또 한 번 수비적인 카드를 들고나온 케이테 감독이었다.

“음... 그렇겠지? 역시.”

이제 서른두 살. 한국 나이로는 서른네 살이 되었기에 조금씩 노쇠화의 조짐이 보였지만, 여전히 긱스는 최고의 윙어 중 한 명이었다.

헤이팅아와 성배 모두 신구 최강자들을 상대해야 했다.

“좋아. 살아 돌아올 테니 너도 살아 돌아와. 라커룸에서 보자고.”

“그렇게까지 비장할 것까지야.”

누차 말하지만, 성배는 아직 약점이 많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호날두를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

“호날두에게 볼이 이어집니다! 호날두와 주성배의 대결!”

“호날두는 만만치 않아요. 에레디비지에를 정리하고 있는 주성배 선수라고 하더라도 긴장해야죠.”

한국 해설자들은 성배에게 호의적인 방향으로 해설을 진행했다.

팬들의 여론이라는 것 자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분위기를 고려할 필요가 없었으니, 두 사람이 원하는 대로의 중계가 가능했다.

‘쓸데없는 움직임이 너무 많아.’

성배는 호날두와 처음으로 마주했다.

그리고 아직 드리블 과정에서 쓸데없는 동작들을 줄이지 못한 호날두의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 너무 급하게 고칠 필요는 없지.’

호날두가 여전히 저런 드리블을 고수하는 이상, 자신에게 틀어 막힐 수밖에 없었다.

< 낭만필드 - 084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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